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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1951∼1954년] 3∼4개 중대 규모 운영…연간 최소 20여만 병력 '위안' 朝鮮戦争期間[1951~1954年] 3~4個中隊規模運営…年間最小 20余万兵力 '慰安'
흔히 전쟁이 나면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통을 한 가지 더 겪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다름아닌 '성적 유린'인데, 피아 군인을 가릴 것 없이 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같은 여성들의 피해사례는 동서고금의 전쟁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 よく戦争が起これば女性たちは男性たちに比べて苦痛をもう一つ経験することが普通だ. これは外でない '成績染躪'なのに, 彼我軍人を選り分けるまでもなく恣行されることが普通だ. このような女性たちの被害事例は東西古今の戦争社あちこちに記録されている.
흔히 '위안부'라면 일제하 구 일본군들이 조선(한국)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 중국, 남양군도 등에서 성적 노리개로 부린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도 병사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던지고 있다. よく '慰安婦'なら日帝下句日本軍たちが朝鮮(韓国)女性たちを強制に連れて行って中国, 南洋君もなどから性的おもちゃで使ったことだけで思いやすい. しかし朝鮮戦争当時韓国軍も兵士らの士気高揚次元で '慰安婦'を運用したという主張が申し立てられて衝撃を投げている.
당시 서울, 강릉 등지의 군부대에서는 중대단위로 '위안부대'를 편성, 운용했는데 병사들은 '위안 대가'로 티킷이나 현금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当時ソウル, 江陵等地の軍部隊では重大単位で '慰安部隊'を編成, 運用したが兵士らは '慰安対価'でチケットや現金を使ったことで現われた.
<오마이뉴스>는 우리 현대사에서 묻혀진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전문학자의 연구결과와 김당 편집위원의 취재를 토대로 4회 정도의 관련기획물을 실을 예정이다.-<편집자 주> <oh my news>は私たちの現代史でつけられた歴史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という次元で専門学者の研究結果と金当たり編集委員の取材を土台で 4回位の関連企画物を積む予定だ.-<編集者注>
 | ▲ 위안소 앞에 줄지어 선 일본군 병사들.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 장병들도 24인용 야전막사니 분대천막 앞에서 이처럼 줄을 서서 위안대를 이용했다. ▲ 慰安所の前に列をなしては日本軍兵士ら. 予備役将星たちの回顧録によれば朝鮮戦争当時国軍将兵たちも 24人用野戦幕舍だの分隊天幕の前でこのように並んで慰安台を利用した. |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군 위안소를 두고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공식 제기되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위안소를 두고 장병들이 이용케 했다는 주장은 그 동안 몇몇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어 왔다. 朝鮮戦争当時国軍が余分の慰安所を置いて慰安婦制度を運営したという主張が学界で初めに公式申し立てられた. 6·25 戦争当時国軍が慰安所を置いて将兵たちが利用するようにしたという主張はその間いくつかの予備役将軍の回顧録と参戦者たちの証言によっても裏付されて来た.
그러나 군 당국이 편찬한 공식기록(전사) 등을 근거로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이를 계기로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진상 규명운동이 전개될 경우, 지난 90년대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된 때와 유사한 파문도 예상된다. しかし余分の政府が編纂した公式記録(戦死) などを根拠で韓国軍が慰安台を設置·運営したという主張の申し立てられたことは今度が初めてだ. またこれをきっかけで当時慰安婦被害者たちの証言と真相糾明運動が展開される場合, 去る 90年代日本軍従軍慰安婦問題が初めて申し立てられた時と類似の波紋も予想される.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는 2월23일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열리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한국전쟁과 여성ː군 위안부와 군 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관련 인터뷰 기사 송고 예정). ギムグィオック博士(慶南大北朝鮮専門大学院ビジティングプロフェッサー·社会学)は 2月23日日本京都リツメイカン(立命館)大学で開かれる第5回 '東アジア平和と人権国際シンポ'でこんな内容を記した '朝鮮戦争と女性〓軍隊慰安婦と余分の慰安所を中心に'という題目の論文を発表する(関連インタビュー記事送稿予定).
김박사의 논문은 한국군(한국전쟁) 위안부 문제라는 사안의 특성상 일본 언론들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계 언론의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金博士の論文は韓国軍(朝鮮戦争) 慰安婦問題という事案の特性の上日本言論たちとゼイルボンゾソンインチォングリョンハブフェ(総連)係言論の大きい気を引くように見えて帰趨が注目される.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방지를 위한 필요악" "詐欺高揚と戦闘力損失防止のための必要悪"
현재까지 발굴된 한국전쟁 당시 군 위안부 제도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공식자료는 육군본부가 지난 1956년에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에 실린 군 위안대 관련 기록이다. 現在まで発掘された朝鮮戦争当時軍隊慰安婦制度の実体を見せてくれる唯一の公式資料は陸軍本部が去る 1956年に編纂した <後方戦死(あいさつの方)>に積まれた余分の慰安台関連記録だ.
김박사는 <후방전사> 기록과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계자 증언 등을 토대로 당시 국군은 직접 설치한 고정식 위안소와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사창(私娼)의 직업여성들을 이용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후방전사(인사편)>의 '제3장 1절 3항 특수위안활동 사항' 기록을 보면 군 위안대 설치 목적은 다음과 같다. 金博士は <後方戦死> 記録と予備役将星たちの回顧録, そして関係者証言などを土台で当時国軍は直接設置した固定式慰安所と移動式慰安所そして私娼(私娼)の働く女性たちを利用する三種類方式で慰安婦制度を運営したと主張する. まず <後方戦死(あいさつの方)>の '第3章 1節 3項特殊慰安活動事項' 記録を見れば余分の慰安台設置目的は次のようだ.
"표면화한 사리(事理)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斷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교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來往)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本)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表面化した私利(事理)のみを持って簡単に国家施策にさからって行く矛盾した活動だと断岸(断案)すれば別問題だが実質的に詐欺高揚はもちろん戦争事実による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弊端をあらかじめ防止するのみならず長期間交代ない戦闘によって後方通い(来往)がオブウニほど理性に対するあこがれで惹起される生理作用による性格の変化などで鬱病及びその他差し支えをもたらすことを予防するために本(本) 特殊慰安台を設置するようになった."
당시 군은 위안부들을 '특수위안대(特殊慰安隊)'라는 부대 형식으로 편제해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후방전사> 제3장의 '특수위안활동 사항'에는 흔히 '딴따라'라고 부르는 군예대(軍藝隊) 활동도 포함된다. 当時軍は慰安婦たちを '特殊慰安台(特殊慰安隊)'という部隊形式に編制して運営したことを分かる. <後方戦死> 第3葬儀 '特殊慰安活動事項'にはよく 'タンよって'と呼ぶ郡芸大(軍芸隊) 活動も含まれる.
따라서 '특수위안대'는 군예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후방전사>는 군예대의 활동을 '위문 공연(慰問 公演)'이라고 표현하는 반면에 특수위안대의 활동은 '위안(慰安)'이라고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특수위안'은 여성의 성(性)적 서비스를 뜻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したがって '特殊慰安台'は郡芸大を指称するのではないかと言う理論もあり得る. しかし <後方戦死>は郡芸大の活動を '慰問公演(慰問 公演)'と表現する一方に特殊慰安台の活動は '慰安(慰安)'と用語を区分して使っている. 結局ここで '特殊慰安'は女性の性(性)敵サービスを意味することを難しくないように分かる.
흥미로운 사실은 전사(戰史)에서 위안대 운영이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임을 인정한 대목이다. 이는 일제시대에 설치된 공창(公娼)이 1948년 2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 발효로 폐쇄되었음에도 국가를 수호하는 군이 자체적으로 사실상의 공창(군 위안대)을 운영하는 모순된 활동, 즉 범법행위를 자행했음을 의미한다. おもしろい事実は戦死(戦史)で慰安台運営が "国家施策にさからって行く矛盾した活動"であることを認めた書き入れ時だ. これは日帝時代に設置された公娼(公娼)が 1948年 2月米軍政庁の公娼廃止領醗酵に閉鎖されたにも国家を守護する軍が自主的に事実上の公娼(余分の慰安台)を運営する矛盾した活動, すなわち犯法行為をほしいままにしたことを意味する.
따라서 <후방전사>는 군이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전투력 손실 방지와 사기 앙양을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したがって <後方戦死>は軍が朝鮮戦争当時慰安婦制度を戦争の長期化による戦闘力損失防止と詐欺高揚のために不可避な一種の '必要悪'で見做したことを現わしているのだ.
결국 한국군 위안대는 그 동원방식이나 운영기간 및 규모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치 목적이나 운영 방식 면에서는 비슷함을 보여준다. 이는 또 당시 한국군 수뇌부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음을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 크다. 일본군에서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군 수뇌부가 한국전쟁 기간에 위안부 제도를 주도적으로 도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結局韓国軍慰安台はその動員方式や運営期間及び規模面で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と根本的な差異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 その設置目的や運営方式面では似ていることを見せてくれる. これはまた当時韓国軍首脳部のかなり多い数が日本軍出身だったのを勘案する時示唆するところ大きい. 日本軍で慰安婦制度を経験した軍首脳部が朝鮮戦争期間に慰安婦制度を主導的に取り入れたことはもしかしたら自然な経験の産物だからだ.
그런데 <후방전사>에 따르면 위안대를 설치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동란(動亂)중 (위안대) 활동상황을 연도별로 보면 큰 차이가 없었으며 전쟁행위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 돼 있어 전쟁 이후 설치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ところが <後方戦死>によれば慰安台を設置した時期は不明だ. ただ "動乱(動乱)中 (慰安台) 活動状況を年度別で見れば大きい差がなかったし戦争行為といっしょに不可分の関係を持ったのだとないことができない"となっていて戦争以後設置されたことなのを見当をつけるようにする.
김귀옥 박사는 관련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설치 시기를 1951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후방전사>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公娼) 폐지의 조류에 순명(順命)하여 단기 4287(서기 1954)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고 그 폐쇄 시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ギムグィオック博士は関連資料と関係者たちの証言を土台でのさばるのを 1951年で推正する. 一方に <後方戦死>は "休戦によってこのような施設の設置目的が解消されるに至って公娼(公娼) 廃止の潮流に順命(順命)して檀紀 4287(西紀 1954)年 3月これを一斉に閉鎖した"とその閉鎖時期を確かに明らかにしている.
서울 강릉 춘천 원주 속초 등 7개소 설치 운영 ソウル江陵春川原州束草など 7ヶ所設置運営
한편 <후방전사> 기록에 따르면 위안대가 설치된 장소는 △서울지구 3개 소대 △강릉지구 1개 소대 △기타 춘천 원주 속초 등지로 총 7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위안대 규모에 대해서는 <후방전사> 내에서도 앞뒤의 기록이 달라 정확한 그 규모를 산정하기가 어렵다. 一方 <後方戦死> 記録によれば慰安台の設置された場所は △ソウル誌で 3個小隊 △江陵誌で 1個小隊 △その他春川原州束草等地で総 7ヶ所にのぼる. しかし慰安台規模に対しては <後方戦死> 内でも先後の記録が違って正確なその規模を算定しにくい.
이를테면 <후방전사>의 일부 기록(148쪽)에는 위안대 규모가 △서울지구 제1소대 19명 △강릉 제2소대 31명 △제8소대 8명 △강릉 제1소대 21명 등 총 79명으로 돼 있다. 言わば <後方戦死>の一部記録(148ページ)には慰安台規模が △ソウル誌で第1小隊 19人 △江陵第2小隊 31人 △第8小隊 8人 △江陵第1小隊 21人など総 79人になっている.
그러나 같은 책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50쪽)에는 위안부 수가 △서울 제1소대 19명 △서울 제2소대 27명 △서울 제3소대 13명 △강릉 제1소대 30명 등 총 89명으로 돼 있다. しかし同じな本の '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150ページ)には慰安婦数価 △ソウル第1小隊 19人 △ソウル第2小隊 27人 △ソウル第3小隊 13人 △江陵第1小隊 30人など総 89人になっている.
따라서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전자의 기록은 오기(誤記)이고 후자의 '실적 통계표'가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통계도 기타(춘천 원주 속초 등지) 지역 위안대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기록을 토대로 당시 위안소 소재지와 규모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したがって前後脈絡で見る時電子の記録はやせがまん(誤記)で後者の '実績統計表'が正確なことに推定される. もちろんこの統計もその他(春川原州束草等地) 地域慰安台は含んでいない. とにかく記録を土台で当時慰安所所在地と規模を <切符>で整理すれば次のようだ.
 |  | <표 1> 한국군 위안대 설치 장소와 규모 <切符 1> 韓国軍慰安台設置場所と規模 | 군에 위안대를 설치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후방전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군이 위안대 설치 및 운영을 주도한 사실은 <후방전사>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나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軍に慰安台を設置した主体が誰かは <後方戦死>で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 しかし軍が慰安台設置及び運営を主導した事実は <後方戦死>の次のような書き入れ時や予備役将星たちの回顧録で推し測ることができる.
"일선 부대의 요청에 의하여 출동위안(出動慰安)을 행하며 소재지에서도 출입하는 장병에 대하여 위안행위에 당하였다.(……) 한편 위안부는 1주에 2회 군무관(軍務官)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후방전사>) "一線部隊の要請によって出動慰安(出動慰安)を行って所在地でも出入りする将兵に対して慰安行為にあった.(……) 一方慰安婦は 1株に 2回群舞官(軍務官)の協助で軍医の厳格な検診を受けて性病に対しては徹底的な対策を講じた."(<後方戦死>)
이는 당시 군이 군인들이 위안소를 찾아와 이용하는 고정식 위안소뿐 아니라 위안대가 위안을 위해 부대를 찾아가는 이동식 위안소도 운영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또 군의(軍醫)가 직접 위안부를 상대로 주 1회 성병검진을 실시한 점이나 장교를 상대하는 여성과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이 따로 있었다는 점 등은 한국군 위안부 제도가 과거 일본군 종군위안부 운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음을 의미한다. これは当時軍が軍人たちが慰安所を尋ねて来て利用する固定式慰安所だけではなく慰安台が慰安のために部隊を尋ねる移動式慰安所も運営したことを立証する書き入れ時だ. また軍医(軍医)が直接慰安婦を相手で週 1回性病検診を実施した点や将校を相対する女性と兵士を相対する女性が別にいたという点等は韓国軍慰安婦制度が過去日本軍従軍慰安婦運営方式をそのまま踏襲したことを意味する.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예비역 육군 중장)은 자신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넘어>(1994년)에서 <후방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소대 규모가 아닌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이 서울지구의 3개 소대 위안부 인력을 1개 중대 규모로 계산한 결과일 수 있다. 어쨌건 채장군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 규모는 180∼240명으로 추정된다. ズオル(駐越) 韓国軍司令官を勤めたチェ名臣将軍(予備役陸軍中将)は自分の回顧録 <斜線をノムゴノムオ>(1994年)で <後方戦死>の記録とは違い小隊規模ではない重大規模で慰安台を運用したと書いている. これはチェ名臣将軍がソウル地球の 3個小隊慰安婦人力を 1個中隊規模で計算した結果であることができる. とにかく債帳君によれば当時慰安婦規模は 180~240人に推定される.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5연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이하 밑줄은 필자 강조) "当時私たち陸軍は士気振作のために 60人余りを 1個の中どおりする慰安部隊を三四犬運用していた. だから予備部どおり抜けるだけで社団要請によってすべての部隊は慰安部隊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た. だから 5連帯も例外ではなかったし, 予備どおり抜ける前から将兵たちの話題は皆慰安部隊件だった."(以下下線は筆者強調)
 | ▲ <후방전사>에 실려있는 단기 4285년(서기 1952년)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89명의 위안부가 연간 20여만명의 군인을 '위안'했음을 보여준다. ▲ <後方戦死>に積まれている檀紀 4285年(西紀 1952年)の '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 89人の慰安婦が年間 20余万人の軍人を '慰安'したことを見せてくれる. |
그렇다면 한국전쟁 기간에 군이 설치한 이 '특수위안대'의 '위안' 활동 실적은 얼마나 될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자료는 바로 <후방전사>(150쪽)에 실린 '특수위안부 실적통계표'이다. 단기 4285년도이니 곧 1952년도 1년간의 '위안' 실적이다. 다른 해의 실적도 이와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それなら朝鮮戦争期間に軍が設置したこの '特殊慰安台'の '慰安' 活動実績はどの位だか. それを見積ることができる唯一の根拠資料はまさに <後方戦死>(150ページ)に積まれた '特殊慰安婦実績統計表'だ. 檀紀 4285年度だからすなわち 1952年度 1年間の '慰安' 実績だ. 他の海衣実績もこれに似ていると記録されている.
아무튼 이 통계표에 따르면, 1952년 당시 '특수위안대'에 편성된 위안부는 89명이고,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은 군인은 연간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이 실적이 실적통계표에 적시한 4곳(서울 제1, 2, 3소대·강릉 제1소대)에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위안대가 현지부대로 '출동위안'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とにかくこの統計表によれば, 1952年当時 '特殊慰安台'に編成された慰安婦は 89人で, これらから '慰安'を受けた軍人は年間 20万名が越えることに集計された. ただこの実績が実績統計表に指摘した 4ヶ所(ソウル第1, 2, 3小隊·江陵第1小隊)に出入りした軍人たちの統計なのか, 慰安台が現地部どおり '出動慰安'一軍人たちの統計まで含んだことなのかは不確かだ.
 | ▲ <표 2> 김귀옥 박사가 수정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 <切符 2> ギムグィオック博士が修正した 1952年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 |
'위안대'는 예비대 병력의 '제5종 보급품' '慰安台'は予備台兵力の '第5種補給品'
전선에서 전투를 마치고 후방으로 교대된 예비부대 병력이 위안부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차규헌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 또한 자신의 회고록 <전투>(1985년)에서 예비대 시절에 겪은 이동식 군 위안소 제도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電線で戦闘を終えて後方に交代された予備部隊兵力が慰安婦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事実は他の将軍たちの回顧録でも一致する書き入れ時だ. チァギュホン将軍(予備役陸軍大将) また自分の回顧録 <戦闘>(1985年)で予備台時代に経験した移動式余分の慰安所制度をこんなに回想している.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할 듯 쌀쌀했다.(……)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1952年) 3月中旬の気候は春を妬むように肌寒かった.(……) 残敵を完全に掃討した後予備台になって部隊整備を実施している時買うという恤兵部(恤兵部)から将兵を慰問しに女慰安台が部隊宿営地近所に到着したという通報があった. 重大あいさつ係報告によるとこれらは 24人用野戦天幕に合板と雨着で仕切りを一野戦寝室に収容されたと言って他の重大兵士たちは列を立ってまでたくさん利用したと言った."
 |  | ▲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 34년간의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공개적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기록하고 있다. ▲ ギムフィオ将軍(予備役所長)の回顧録 <人間の香り>. 34年間の軍生活で朝鮮戦争当時初めに見た公開的余分の慰安所運営事例に対して '永遠に気まずい記憶'で記録している. | 한편 김희오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 또한 '이동식'이긴 하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안부 제도를 기억하고 있다. 一方ギムフィオ将軍(予備役陸軍所長) も '移動式'ではあるがこれとは少し他の角度で慰安婦制度を憶えている.
김장군은 군에서 직접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연대 간부들이 당시 사창가였던 '종3'(종로3가)에서 거금을 주고 위안부로 데려온 것으로 기억한다. 김장군은 자신의 자서전 <인간의 향기>(2000년)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キムチの漬け込み君は軍で直接慰安所を設置運営したことだと言うよりは連帯幹部たちが当時売春町だった '鐘3'(鐘路3街)で巨金を与えて慰安婦で連れて来たことで憶える. キムチの漬け込み君は自分の自敍伝 <人間の香り>(2000年)でそのところをこんなに回考している.
"(중부전선) 수도고지 전투도 잊혀지고 도망병 발생도 진정되어 갔다. 이제 FTX(야전훈련)에 본격 돌입하기 위해 소화기 및 장비 점검, 보급품 정비 등이 한창 진행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백주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라던가 또 도덕적으로나 양심상 어정쩡하기도 해서 썩 내키지가 않았다. 먼저 소대에 2명이 할당되고 그중 1명이 먼저 소대장 천막으로 배정되어 왔다. 나는 출신환경 등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별로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 동안 모아 놓았던 건빵 한 보따리를 싸서 선임하사관에게 인계하였다." "(中部前では) 首都高だ戦闘も忘れて逃亡病発生も鎮まって行った. もう FTX(野戦訓練)に本格突入するために消火器及び装備点検, 補給品整備などが盛んに進行されるある日朝だった. 連帯1科で重大別第5種補給品(余分の補給品は 1~4種しかなかったら) 受領指示があって行って見たら私たち重大にも週刊 8時間制限で 6人の慰安婦が割当されて来た.(……) しかし私は白昼に多い人が行き交う中に並んで分隊天幕を利用することとかまた道徳的でも良心上いかがわしかったりしてあまり気が向かなかった. 先に小隊に 2人が割り当てされてなかでも 1人が先に小将天幕に割当されて来た. 私は出身環境など一言二言対話だけ交わしてあまり手伝ってくれる方法がなくてその間集めておいた乾パン一包みを包んで先任下士官に引き継いだ."
 |  | ▲ 김희오 장군 ▲ ギムフィオ将軍 |
두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군 부대에 소위 '제5종 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들이 배정되어 왔고 24인용 야전천막이 위안소로 가설(차규헌 장군)되거나 분대 막사를 위안소로 대용(김희오 장군)하였다. 二人の将軍の証言によれば余分の部隊にいわゆる '第5種補給品'という名前で慰安婦たちが割当されて来たし 24人用野戦天幕が慰安所で架設(チァギュホン将軍)になるとか分隊幕舍を慰安所で代用(ギムフィオ将軍)した.
위안대가 '제5종 보급품' 취급을 받은 것은 일본군 종군위안부가 '천황의 하사품'이나 '군수품'으로 취급받은 점과 일맥상통한다. 또 병사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한 것이나 소대장 천막으로 먼저 배정된 후에 병사들에게 배정된 점 등도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위안소의 풍경과 닮은꼴이다. 慰安台が '第5種補給品' 取り扱いを受けたことは日本軍従軍慰安婦が '天皇のくだされ物'や '兵站品'で扱われた点と一脈相通ずる. また兵士らが並んでまでたくさん利用したことや小将天幕に先に割当された後に兵士らに割当された点等も日本軍従軍慰安婦被害者たちが証言する慰安所の風景と似た形だ.
운영 방식은 증언에 따라 조금 다르다. 채명신 장군에 따르면 전선에서의 위안부대 출입은 '티켓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켓이 주어지는 것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주었다. 또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숫자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는 군인들이 군표나 현금을 주고 이용했던 일본군 위안소와는 차이가 있다. 運営方式は証言によって少し違う. チェ名臣将軍によれば電線での慰安部隊出入りは 'チケット制'で運用するようにした. ところで誰にもチケットが与えられることではなかった. 戦地で勇ましく争って功を立てた順に配った. また手柄の程度によってチケットの数字が変わったと言う. これは軍人たちが軍票や現金を与えて利用した日本軍慰安所とは差がある.
오히려 이것은 홋카이도나 사할린 지역에 강제 연행한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회사에서 마련한 위안시설에서 일한 '산업위안부' 제도와 닮은꼴이다. 일본이 저지른 대표적인 전쟁범죄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가려 산업위안부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むしろこれは北海道やサハリン地域に強制連行した朝鮮人労動者と日本人労動者たちを相手で会社で用意した慰安施設で日韓 '産業慰安婦' 制度と似た形だ. 日本がやらかした代表的な戦争犯罪人従軍慰安婦問題に選り分けて産業慰安婦問題はよく現われなかった.
그러나 일본 군수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으로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제공하는 등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위안소 제도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한국전쟁 기간의 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의 잔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しかし日本軍需企業たちは労動者たちに一種の '成果給'で慰安所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るチケットを提供するなど労動者を統制するのに慰安所制度を利用したことで現われている. 結局こんな事実たちを総合すれば朝鮮戦争期間の軍隊慰安婦制度は '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の残在'という結論に到逹するようになる.
"부끄러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재" "恥ずかしい日本軍慰安婦制度の残在"
그 때문인지 회고록에 군 위안부 제도를 기록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위안소 운영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전쟁의 아픔, 그리고 절대빈곤의 참상을 지적한다. そのためか回顧録に軍隊慰安婦制度を記録した将軍たちは一様に慰安所運営の妥当性に対する疑問とともに戦争の痛み, そして絶対貧困の惨状を指摘する.
 | ▲ 한국전쟁 당시 연대장으로 복무한 채명신 장군(주월 한국군사령관)은 "군 위안부 제도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을 위해 도입한 '군부의 치부'이지만 당시 사회에 만연한 사창(私娼)을 군에 흡수해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 朝鮮戦争当時連隊長に服務したチェ名臣将軍(ズオル韓国軍司令官)は "軍隊慰安婦制度は将兵たちの士気振作と性病予防のために取り入れた '軍部の恥部'だが当時社会にはびこった私娼(私娼)を軍に吸収して人権を保護した側面もある"と主張した.
| 채명신 장군은 자신이 회고록에 기록한 한국전쟁 당시 겪은 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이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채장군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과 시대상황을 예로 들어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チェ名臣将軍は自分が回顧録に記録した朝鮮戦争当時経験した軍隊慰安婦制度に対して "現わしたくない軍部の恥部だが動くことができない事実を記録したこと"と言った. といえども債帳君は当時の暗鬱な現実と時代状況を例であげて不可避性を力説した.
"당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젊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고 전선 근처에까지 밀려드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사창에는 성병이 만연했고 사창을 방치할 경우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도 우려되었다. 따라서 군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위해서 위안대를 편성해 군의관의 성병검진을 거쳐 장병들이 이용케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창녀들을 군의 위안대에 흡수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많은 사창가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 "当時は戦争が長期化するによって多くの若い女達が生計のために米軍部隊で身を売っての前では近くにまで押し寄せる時代だった. 当然私娼には性病がはびこったし私娼を捨ておく場合性病による戦闘力損失も憂慮された. したがって軍で将兵たちの士気振作と戦闘力損失予防のために慰安台を編成して軍医の性病検診を経って将兵たちが利用するようにしたのだ. しかしどう思えば (娼婦たちを軍医慰安台に吸収することで) 当時社会の必要悪として人権死角地帯に放置された多くの売春町女達の人権を保護した側面もある."
그러나 당시 연대장이었던 채장군은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한 군 수뇌부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채장군은 위안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명칭 상으로는 부대(특수위안대)이지만 부대 편제표에 의해 편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안부나 사창의 사정(수요공급)에 따라 위안대 규모가 그때그때 달라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しかし当時連隊長だった債帳君は軍隊慰安婦制度を企てた軍首脳部の主体が誰なのかに対しては "よく分からないだろう"と返事した. また債帳君は慰安台の規模に対しても "名称上では部隊(特殊慰安台)だが部隊編制表によって編成されたのではないから慰安婦や私娼の事情(需要供給)によって慰安台規模がその時々違って正確な人員を算出しにくかったはずだ"と指摘した.
| | | "소대장님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小隊盲人チケット一枚もっと得ることができないんですか?" | | | ....우리 5연대에서는 '위안부대'를 이용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위안부대 출입은 티킷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킷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我が 5連帯では '慰安部隊'を利用するのに何種類規則を作った. 慰安部隊出入りはチケット制で運用するようにした. ところで誰にもチケットが与えられるのではない. 戦地で勇ましく争って功を立てた順に配る. もちろん勲章を受けたら当然優先権があってブロウムの対象だ.
"5연대는 무조건 계급에 관계없이 훈장을 많이 탄 사람부터 순서대로 위안부를 상대할 수 있다." "5連帯は無条件階級にかかわらず勲章にたくさん乗った人から順に慰安婦を相対することができる."
내가 이런 규칙을 만들자 부대 내에선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私がこんな規則を作ると部隊内ではひとしきり押し問答が起った.
"이제 너희는 모두 내 동생이다. 알았나?" "もう君逹は苗も私の弟(妹)だ. 知ったか?"
"잠시만 기다려라. 곧 내가 너희들에게 등정기를 발표할테니…. 기대하시라." "少しの間だけ待ちなさい. すなわち私が君たちに登頂記を発表するから…. 期待しなさい."
모든 입과 귀가 위안부대로 쏠려 있었다. 용감한 박판도 중사도 규정대로 두 장의 티킷을 받게 되었고, 첫 번째로 위안소에 가게 되었다. すべての口と帰宅慰安婦どおり傾いていた. 勇ましい薄板も中佐も規定どおり二枚のチケット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し, 一番目で慰安所へ行くようになった.
난 당시 연대장이었으니 이 얘긴 후일 대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박중사는 숫총각이라 위안부 상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다. 그리곤 티킷도 다른 전우에게 주려 하는 걸 규칙이라 안된다며, 분대원들이 억지로 떠메곤 위안부대의 천막 속에다 집어넣었다 한다. 私は当時連隊長だったからこの話は後日大隊長を通じて伝えて聞いた. ところで朴中佐はやらはただから慰安婦相対することを頑として拒否したと言う. そしてチケットも他の戦友に飢えてすることを規則だからだめだと, 分隊院たちが無理やりにトメゴン慰安部隊の天幕の中に入れたと言う.
모든 분대원들은 천막 안을 들여다보면서 역사적 사태(?)를 지켜보았는데, 아뿔싸 순진한 박판도 총각은 여자가 바지를 벗기려 하자 "싫다"며 도망가질 않나, 억지로 벗기곤 강행하려 하자 결사적으로 피하질 않나, 밖에서 지켜보는 분대원들에게 한바탕 웃음만 안겨주고 있었다. すべての分隊院たちは天幕中をのぞき見ながら歴史的事態(?)を見守ったが, アプルサ純粋な薄板もチョンガーは女がズボンを脱がせようと欠点 "嫌いだ"と逃げださないが, 無理やりにむいたり強行しようと思うと決死的に避けないが, 外で見守る分隊院たちにひとしきり笑いだけ抱かれてくれていた.
그러나 워낙 좁은 곳이라 결국은 여자한테 붙잡혔는데 상대가 숫총각이란 걸 안 여자가 장난삼아 그의 물건을 만지면서 "애걔, 요만한 걸 가지고 왔어?"하며 놀리자, 끝끝내 그는 총(?) 한방 못쏴보고 얼굴만 빨개가지곤 도망쳐 나왔다는 거였다. しかしあんまり狭い所だから結局は女につかまったが相手がやらはたと言うのが分かった女が悪戯で彼の品物を触りながら "エギェ, 敷布団ほどのことを持って来たの?"しながら冷やかすと, 遂に彼は鉄砲(?) 漢方うつ事ができないh見て顔だけパルゲがジゴン逃げて出たというのだった.
분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에게 치욕의 여름(夏)을 남기지 않으려, 그날 밤 철저한 강의와 사례를 들려주어 결국 박판도 중사를 설득시켰다. 다음날 재시도 끝에 박판도 중사는 결국 성공한다. 分隊院たちは自分の分隊長に恥辱の夏(夏)を残さないようと, その晩徹底的な講義と事例を聞かせて結局薄板も中佐を説得させた. 翌日やり直しあげく薄板も中佐は結局成功する.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한번 위안부대를 다녀온 박중사가 완전히 맛을 들인 것이다. ところで問題は次からだ. 一度慰安部隊を行って来た朴中佐が完全に味を入れたのだ.
"저…, 소대장님. 저…,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私…, 小隊盲人. 私…, チケット一枚もっと得ることができないんですか?"
이 지경까지 되어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この地境までなり出すように報告が上って来たら私は笑いを噴き出さざるを得なかった.
"허, 그놈 참. 그래 대대장이 알아서 두어 장 더 집어줘…. 하하하…." "虚, あいつ真実. そう大隊長が分かって二つ程の枚もうつまんでくれて…. ハハハ…."
그때부터 난 왠지 마음에 걸렸다. 순진한 녀석이 전투만 알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어떤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면…. あの時から私はなんだか気にかかった. 純粋なやつが戦闘だけ分かっている途中ある日急に人生のどんな新しい面が分かるようになったら….
<채명신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267~269쪽에서 인용) <チェ名臣回顧録 '斜線を越えて過ぎて'> (267~269ページで引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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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후방전사>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952년)에 따르더라도 당시 위안대를 이용한 장병은 적게 잡아도 연간 20만명을 넘는다. 또 "위안대를 이용할 수 있는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는 채장군의 증언에서 보듯,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은 군이 설치·운용한 '특수위안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陸軍本部の公式記録である <後方戦死>の '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1952年)によっても当時慰安台を利用した将兵は少なく取っても年間 20万名を越える. また "慰安台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る予備どおり抜ける前から将兵たちの話題は皆慰安部隊件だった"は債帳君の証言で見るように, 当時朝鮮戦争に参戦したすべての軍人たちは軍が設置·運用した '特殊慰安台'の存在が分かっていた.
바로 그 '공공연한 비밀'이 50년만에 뒤늦게 불거진 것은, 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찌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まさにその '大っぴらな秘密'が 50年ぶりに一歩遅れてはみでたことは, この現わしたくない軍部の恥部が日本軍慰安婦制度の残物だからかも知れない.
물론 한국군 위안대는 동원방식이나 기간 그리고 규모 등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용된 것 또한 사실이다(아래 <표 3> 참조). もちろん韓国軍慰安台は動員方式や期間そして規模などで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と本質的な差異がある. しかし相当部分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と類似の方式に運用されたことも事実だ(下の <切符 3> 参照).
 |  | <표 3> 일본군·한국군 위안부 제도의 유사점과 차이점 <切符 3> 日本軍·韓国軍慰安婦制度の類似点と差異 | 우선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내세운 설치 목적부터가 유사하다. 또 병사들이 군대천막 앞에서 줄을 서서 이용하고 군의관이 성병검진을 하는 이용·관리 풍경도 흡사하다. 또 일본군의 군표 대신에 티켓과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되기도 했다. まず詐欺高揚と戦闘力損失予防を立てた設置目的からが似たり寄ったりだ. また兵士らが軍隊天幕の前で並んで利用して軍医が性病検診をする利用·管理風景もそっくりだ. また日本軍の軍票代りにチケットのような対価が支払いされた取り引き形式に運用されたりした.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한국전쟁 당시 이 희한한 제도를 처음 겪은 김희오 장군은 처음 위안대를 목격한 순간에 직감적으로 "이는 과거 일본군 내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장군은 34년간 군 생활에서 처음 본 공개적인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그 당위성을 떠나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기억한다. これは目撃者たちの証言でも裏付される. 朝鮮戦争当時この珍しい制度を初めて経験したギムフィオ将軍は初めて慰安台を目撃した瞬間に直感的に "これは過去日本軍私の従軍経験がいる一部幹部たちが部下詐欺高揚のための発想から始まったことだね" と言う気がしたと言う. それでキムチの漬け込み君は 34年間軍生活で初めに見た公開的な余分の慰安所運営事例に対してその当為性を去って永遠に気まずい記憶に刻印されていると憶える.
이 '찜찜한 기억'은 바로 8·15 해방과 48년 정부 수립 이후 초기 국가 및 군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친일파 청산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 의장부터 14대 노재현 의장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 총장부터 21대 이세호 총장에 이르기까지 일제 군경력자들이 독식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문제는 미청산된 친일파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この '気まずい記憶'はすぐ 8·15 解放と 48年政府樹立以後初期国家及び軍部形成に深い影響を与えた親日派清算問題と触れ合っているのだ. 言わば合同参謀議長は 1台イヒョンググン議長から 14台労災県議長まで, 陸軍参謀総長は 1台イウングズン総長から 21代二世号総長に至るまで日製軍警力者たちが独占したという点を推し量る時, 朝鮮戦争当時慰安婦問題は未清算された親日派問題と直結されていることを直感することができるのだ.
김귀옥 박사는 "한국전쟁 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불행한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 문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피해 여성과 사회 단체 그리고 학계가 연대하여 풀어내야 할 우리의 과거 청산 문제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ギムグィオック博士は "朝鮮戦争軍隊慰安婦問題は日本軍慰安婦制度の不幸な子だと言える"と "この問題も (日本軍慰安婦問題のように) 被害女性と社会団体そして学界が連帯して解かなければならない私たちの過去清算問題の一つ"であることを強調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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