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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루 수십만원 '셰프 필수품' … 예리한 날로 음식 맛 살려

한 자루 수십만원 '셰프 필수품' … 예리한 날로 음식 맛 살려

[중앙일보] 입력 2014.09.27 01:33 / 수정 2014.09.27 10:56

일본 최고 칼 '슌' 생산 공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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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오른쪽)와 일본 장수가 칼로 겨루는 그림. 19세기 일본의 화가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렸다. 서울대 김시덕 교수는 “동대문과 함흥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혼합해 그렸다”고 말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나오는 한 장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부하 이영남이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노려봤다. 두 장수의 칼이 부딪치기 전, 달빛은 와키자카가 꺼낸 왜도(倭刀)를 환하게 비췄다. 싸움에서 조선 칼은 두 동강 났다. 이영남은 와키자카의 칼에 맞아 처절하게 전사한다.

 60년간 대장간에서 식칼을 만드는 주용부(77) 명장은 텔레비전을 보고 “쯧쯧쯧” 혀를 찼다. 그는 “임진왜란이 난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칼 만드는 기술은 일본이 앞서 있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직후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온 대장장이로부터 강하면서도 날이 잘 서는 쇠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전통 기법으로 만든 칼은 4만~5만원 정도에 팔린다.

 반면 유명 백화점에서 팔리는 일본산 제품은 수십만원에 달한다. 서울 영등포의 대형 백화점에는 일본 기후(岐阜)현 세키(關)시에서 만들어진 칼 브랜드 ‘슌(旬)’이 진열대를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었다. 세키시는 일본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 예부터 사무라이 간 전투가 많아 칼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백화점에서 일본 칼 한 개 가격은 30만~40만원. 김정화(39) 매니저는 “수년 전부터 일본산 칼이 일주일에 2~3개 꾸준히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 고객은 1년에 3000만~4000만원을 쓰는 VIP이지만 1억원 이상 소비하는 트리니티(Trinity) 회원도 종종 찾는다고 한다. 김씨는 “주로 60대 여성인 트리니티 회원은 입소문을 듣고 와서 일본 칼을 주저 없이 고른다”고 말했다. 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산 칼이 설 자리를 잃은 모습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25년간 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장미칼이라 불리는 1만원짜리 국산 칼을 몇 번 팔아봤지만 고객 반응도 없고 일회용에 가까울 만큼 품질이 떨어진다”며 “일본산 칼은 독일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우수한 품질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해외 언론과 관계기관 평가에서도 수년째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일본 식칼의 제조 비법은 무엇일까. 25일 일본 최대의 날 생산 업체 ‘카이(貝印)’가 최초로 한국 기자들을 초청해 공장을 공개했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적한 교외 지역인 세키에 위치한 식칼 공장은 반도체 공장을 연상케 했다. 미세한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는 로봇 팔이 칼날을 잡더니 숫돌에 갈았다. 80여 명의 근로자에게 칼을 전달해주는 마차식 로봇은 바닥의 검은색 선을 따라 움직였다. 직원들은 대부분 칼날과 손잡이를 마지막 단계에서 갈거나 검수작업을 한다. 공장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칼 갈이 자격시험이 있어 직원들의 기술 등급이 1~3급으로 나뉜다”며 “기술력을 인정 받은 사람은 정년 이후에도 연계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회사가 도와준다”고 말했다.

카이의 ‘슌’ 브랜드 칼. 가격은 개당 30만원 이상이다. 철을 여러 겹으로 접어 두들겨 만드는 다마스쿠스 기법으로 물결 무늬가 보이는 게 특징이다. [사진 카이]

 카이는 미셸 브라스, 팀 멜저 등 세계적인 유명 요리사와 공동으로 칼을 개발하고, 중동의 전통적인 제조 기법을 도입하는 등 현재와 과거를 조합하기도 한다. 엔도 히로후미(遠藤浩文) 해외마케팅 부장은 “매년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칼 박람회에 참석해 요리사와 교류를 갖는다”며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받은 미셸 브라스와 공동으로 낸 칼 브랜드는 6년 만에 전 세계에서 210개 매장을 갖출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2000년 도입한 ‘다마스쿠스’ 공법은 쇠를 여러 번 접어 강도와 절삭력을 동시에 높였던 중동 전통 기법을 현대식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이 공법으로 만든 칼 덕분에 이슬람은 중세시대 유럽 십자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카이는 성질이 다른 두 쇠를 33겹으로 겹쳐 만들어 칼날이 단단하면서도 예리하다. 칼 표면에 33겹을 보여주는 물결무늬가 선명해 사용자의 눈길을 더욱 잡아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40년 이상 칼을 갈아온 전만배(58)씨는 “현대적으로 다마스쿠스 공법을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을 정도로 잘된 칼”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카이 측은 다마스쿠스 제작 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는 “고가 제품 제작 과정이나 칼 성분은 직원들에게도 노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칼 제조업체 카이 공장의 직원이 제조 공정 마지막 단계에서 숫돌에 칼날을 갈고 있다. [김민상 기자]
 일본 칼은 판매가 끝나도 철저한 고객 관리로 소비자들을 사로잡는다. 수십만원대에 달하는 고가의 칼은 원하면 언제든지 갈아준다. 칼에 고객의 이름을 새기고 일련번호까지 달아 제품으로 맺은 관계를 평생 지속한다. 세키나 오사카 주변 전통 장인들은 수백만원에 달하는 요리사용 고급 칼을 판매한다. 제작 주문을 하면 제품을 받기까지 최소 3개월 이상 소요된다. 웨스턴조선호텔 일식당 스시조의 이진욱(36) 셰프는 “일본 전통 대장간은 칼의 각도에서 손잡이로 쓰이는 나무의 재질까지 물어보는 꼼꼼함이 있다”며 “칼의 가격이 높아지면 숫돌로 갈아야 하는 횟수가 정확히 적어질 정도로 품질이 보증된다”고 말했다.

 일본에 비해 한국의 칼 제조 기술이 뒤지는 이유를 오래전부터 시장을 잠식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는 지적도 있다. 포스코로부터 철강을 공급받아 중소업체에 칼 재료를 공급하는 한 금속업체 대표는 “한국의 칼 시장이 작지는 않지만 고가는 일본산과 독일산에, 저가는 중국산에 이미 빼앗겼다”며 “일본산과 같은 좋은 품질의 쇠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시장성이 없어 포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음식은 칼에서 시작한다”는 말처럼 한식을 고급화하려면 우리 음식에 맞는 고급 칼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주용부 명장은 “한국에서 음식을 많이 버리는 것은 칼부터 잘못됐기 때문”이라며 “칼날이 무뎌 음식을 자르는 게 아니라 찢기 때문에 영양소가 새어 나와 식중독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도쿄에서 미슐랭 가이드 별 2개짜리 고급 일식당을 운영하는 하시모토 미키조(橋本幹造·44)는 “생선과 채소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일본의 칼로 일식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며 “미세한 칼날로 섬유소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을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도쿄·세키=김민상 기자


[S BOX] 칼갈이 봉은 임시방편 … 숫돌로 갈아야 날 서

최근 독일제 칼이 가정에 널리 보급되면서 칼 가는 봉이 많이 쓰이고 있다. 봉은 30㎝ 길이로 칼보다 강한 다이아몬드나 크롬 합금 재질로 만든다. 봉을 수직으로 세우고 칼을 비스듬히 대고 긁듯이 4~5번 내리 갈면 된다.

 하지만 일본의 칼 전문가들은 서양의 칼갈이 봉이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으로 날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다나카 가쓰야(田中勝也) 카이 제품개발팀장은 “서양 요리는 지방이 많은 고기를 식자재로 쓴다. 봉으로 칼을 갈면 이런 지방을 떼내는 역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라며 “역시 날을 세우려면 숫돌로 갈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용부 명장도 “봉은 임시로 날을 세우는 것”이라며 “최근에 칼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가정에서 싼 칼을 사서 쓰다가 날이 무뎌지면 그냥 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숫돌은 일정한 각도로 칼을 들어서 갈아주는 게 중요하다. 양손으로 칼을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잡고 날을 10~20도 사이로 올린 채 간다. 몸통 바깥쪽으로 밀 때 힘을 주고 잡아당길 때는 빼야 한다. 다나카 팀장은 “ 손으로 자주 연습해 감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전기를 사용하는 소형 원형 숫돌로 칼을 갈아주는 20만원대 기계도 판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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