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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
역사는 기억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만큼이 그들의 역사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고 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전해 준 내용을 간추려 본다.
세 번의 이천년
한민족은 유달리 기록에 강한 면모를 가졌다. 고려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국무총리)을 지낸 이암 선생이 편찬한 <단군세기>에는 "3대 단군 가륵 3년에 신지 고결에게 '배달유기'라는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달유기'는 고조선에 앞서서 1565년간 존속했었던 ‘배달의 나라’ 역사책이다. 한민족을 흔히 ‘배달겨레’라고 부르는데 배달의 나라 백성이라는 뜻이다.
조상들의 기억을 토대로 하면 한민족의 역사는 ‘세 번의 이천년’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상고시대>로 배달의 나라 1565년이고, 둘은 <고대>로 고조선(1908년), 대부여(188년), 그리고 북부여(181년)로 합하여 2276년이다. 셋은 <한반도 역사시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조 시대까지 1천년과 고려(475년)와 조선(518년)까지 1천년을 합하여 세 번째 2천년이다.
<상고시대>와 <고대>에는 동북아의 문명과 문화의 주도권이 신시 배달국과 단군조선에 있었고 선진문명의 전달자였다. 그러다가 중국이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철기를 산업에 도입하여 농업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진시황이 BC221년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하면서 동북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BC207년 3대 '자영'이 한고조 유방에게 항복하여 통일국가 한나라가 시작된다(해모수단군 33년).
북부여는 상고시대(신시 배달국)와 고대(고조선, 대부여)에서 한반도 역사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군대를 일으켜 북부여를 창건한 천왕랑 '해모수'는 BC232년 북부여 단군에 즉위한다. 그후 북부여 서쪽지방, 번조선을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점령하고 위만조선을 세워 3대 86년간 지속된다.
BC108년 위만조선의 3대 '우거'를 멸망시킨 한무제의 침략군이 북부여를 계속 침공했으나,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참패하여 물러갔다. 동명성왕은 22년 후 북부여 5대 고두막단군이 되어 27년을 더 다스린다.
한반도 역사시대
<한반도 역사시대>는 고주몽이 고구려를 창건하여 삼국시대가 열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2천년 동안을 말한다. 고구려는 국가창건이념이 ‘다물’이다. 조상의 옛 강토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고주몽은 해모수단군의 차남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의 아들이다. 그리고 북부여 6대 고무서단군의 사위이다. 고구려는 해모수 단군이 북부여를 창건하고 단군으로 즉위한 시기를 고구려의 출발이라고 선언했다.
한반도 역사시대의 최대 화두는 ‘자주권과 사대주의 외교’이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수 양제의 침공을 분쇄하여 수나라를 망하게 했고,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130만 대군을 섬멸하고 당 태종을 병들어 죽게 했다. 신라 김춘추와 당 고종의 ‘나당연합군’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통일신라는 한수(한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당나라와 싸워 되찾는 일과 ‘사대주의 외교’가 주요 국정과제가 되었다.
발해는 최초에는 ‘후고구려’를 표방한 나라였고 후에 ‘대진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259년 발해의 역사는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조시대’이다. 대조영 황제는 친동생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명하여 단기고사(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 그들의 정체성은 고구려의 계승자이고, 명백히 ‘단군의 자손’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계승한 강한 나라였다. ‘서희’가 요나라의 침공을 물리쳤고 ‘윤관’은 성종의 명을 받아 두만강 북쪽 7백리를 올라가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여 ‘6진’을 세웠다. 1231년부터 28년간 계속된 몽골과의 전쟁에 패하여 1259년부터 98년간 ‘원 제국’의 사위나라로 복속되었다. 475년의 고려 역사는 마지막 98년동안 자주권을 상실하고, 공민왕에 이르러 이자춘, 이성계 부자의 군대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자주권을 회복한다.
조선의 자주권과 사대주의 외교
조선의 개국(1392년)은 명나라와의 사대주의 ‘조공외교’로 시작한다. 전기조선 2백년은 태조, 태종과 세종대왕을 비롯한 군신들의 협력으로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가 정통성 없는 자신의 약점을 방어하고자 공신을 양산한 결과, 그 아들 예종은 즉위 2년에 공신세력에게 독살되었다,
그 아들 성종은 인재양성을 명분으로 홍문관을 세워 유림을 많이 양성해서 공신세력을 제압하는 전략을 실천했다. 공신세력을 제압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정을 지배하는 기득권세력이 된 유림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방어하려면 10만 양병이 필요하다."는 이율곡의 상소를 묵살한다. ‘10만 양병’은 왜적만 막는 것이 아니라 유림의 기득권과 전횡도 막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당수이고 노론의 학문적 종주가 된 이율곡의 ‘국가를 위한 충정’마저도 조정대신과 유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조선의 상무전통과 국방’은 공백이 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한순간에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전쟁준비가 없었던들 후기조선의 명운을 상상하기 어렵다.
후금의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제압하는 국제정세를 통찰한 광해군은, 명의 파병요청을 망설인 탓에 임금자리에서 밀려난다. 뒤를 이은 인조는 후금이 청나라가 되어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무시하고 몰락한 명나라를 떠받드는 ‘숭명척금’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자초하여 ‘삼전도의 치욕’으로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임진왜란으로 깊이 멍든 조선에게 설상가상이 되어 후기조선의 백성들은 좌절하고 지배계층들은 기득권 정치를 추구하고 부정부패가 구조화 되었으며 백성을 수탈하는 정치로 이어졌다.
1800년, 탕평을 애쓰던 정조대왕 사후에는 사색당쟁도 사라지고 세도정치가 대세를 이루었다. 왕과 함께 사색당파들이 공유하던 정치가 증발하고, 대궐을 떠난 정치는 일개 가문이 독점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후에는 왕조실록의 기록조차 볼 것이 없다. 조선말기, 노론과 세도가문의 번영은 국가의 쇠락을 앞당겼다.
19세기 후반에 서구열강과 청국, 일본의 경쟁적인 침략과 함께 내정의 부패는 ‘내우외환’이 되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뒤늦은 '근대화 작업'의 몸부림으로도 국가의 패망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시대의 '비전과 목표'
한민족은 지나간 6천년 역사에서, 특별히 한반도 역사시대 2천년 동안 주변국들과의 치열한 다툼과 전쟁 속에서 자주권을 지켜내고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왔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점령했던 35년과 해방이후 미국 군정 3년은 한민족이 6천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민족 통치자를 갖지 못하고 이민족의 일방적 지배에 놓인 세월이었다.
더구나 1945년 해방과 함께 분단되어,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 소련의 '냉전대결'과 중국 '국공내전'의 후폭풍으로 남북한은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었다. 해방 69년이 지나도록 통일하지 못하고 치욕적인 분단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2015년이면 해방, 분단 70주년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제점령 35년의 두 배가 되는 세월이 지나고 있다.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는 부끄러운 일이고,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4강은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전시작전권도 없는' 분단 한국을 내심 경멸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 역사시대 2천년에 처음으로 1백년 넘게 '자주권'을 놓치고 있다. 세 번째 2천년의 끝부분에 서서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역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비전과 목표'는 무엇인가?
2015년이 오면 뒤돌아보지 말고 남북화해, 경제협력, 문화교류, 연합국가, 민족통일을 목표로 달려가자. 남북한과 한민족의 생존을 추구하는 절실한 통일의지 앞에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장애물이 있겠는가?
한반도의 통일은 다만 한민족의 자주권과 자존심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와 주변 4강에게도 평화와 번영을 선물하고, 21세기를 '동아시아 시대'로 만들 수 있다. 6천년 동안 자주권을 지켜온 한민족에게는 비로소 '네 번째 2천년'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시개천 5911년 / 단군기원 4347년 추석에
둥근 달을 우러르며… <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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