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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7 20:12 수정 : 2014.08.27 22:23

김종수 ‘관동대지진 특별법 추진위원회’ 공동대표가 27일 사이타마현 소메야의 사찰 조센지에서 조선인 희생자 강대흥의 묘비에 적힌 글을 확인하고 있다.

[현장 l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91년]
학살 당시 죽임당한 강대흥씨
사이타마현 일부 주민들이
‘억울한 죽음’ 애도 묘비 세우고
7년 전부터 9월 4일에 추도식도

외교통일위원회 무관심 속에
‘진상규명 법안’ 기약없이 낮잠

“저쪽에 있는 묘비입니다. 윗부분이 사망 당시, 아래가 최근에 만든 것입니다.”

지난 26일 오전, 일본 사이타마현 소메야에 자리한 조센지(상천사). 1923년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문제를 연구하는 다나카 마사타카 센슈대학 교수(역사학)가 일행을 절 뒤편에 자리한 공동묘지로 안내했다. 한줄로 늘어선 묘비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특이한 모양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91년 전 이곳 가타야나기 마을(현재 미누마구로 통합)에서 주민들에게 학살당한 조선인 강대흥(당시 24살)의 묘비였다. 현장답사에 나선 한국 한신대의 박고은(23)씨가 묘비에 꽃다발을 놓고, 도쿄 조선대의 황희나(22)씨가 향을 피워 올렸다.

강대흥은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매우 드문 사례다. 대지진이 터지자 사이타마현 경찰은 현내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모아 현의 북부에 있는 군마현 등으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다. 강씨는 이 과정에서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고 가타야나기 마을로 흘러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 발생 사흘 뒤인 9월4일 새벽 2시, 강씨를 발견한 주민들은 그를 창으로 찌르고 일본도로 베어 처참하게 살해했다. 고교 교사인 세키하라 마사히로(61)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주민들이 강씨를 죽인 사실을 경찰에 알리며 포상을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대지진 직후 군과 관헌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에 부화뇌동한 자경단 등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과정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파악된다.

강씨의 묘비는 두 부분으로 돼 있다. 위쪽은 사망 직후 만들어진 시멘트 재질의 조잡한 묘비로 1923년 9월 대지진 때 숨졌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지역 주민 다카하시 다케스케(70)는 “마을 사람들이 상을 받을 줄 알고 경찰에 학살 사실을 알렸다가 5명이 살인죄 등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이후 지역 주민들이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추도하며 만든 비”라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지역의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을 중심으로 진상 규명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강씨의 죽음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됐다. 2001년 검은색 대리석 재질의 반듯한 새 묘비가 만들어졌고, 2007년부터는 강씨의 기일인 9월4일에 맞춰 추도식도 열린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간토대지진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김강산(26)씨는 “일본에선 학살의 역사를 끊임없이 파헤치며 자료를 만드는 분들이 있다. 이를 볼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많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해당 상임위인 외교통일위원회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된 심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소메야(사이타마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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