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이름의 유령이. 이 노상강도의 서식지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였다. 지나가는 행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쇠 침대에 눕힌 뒤 다리가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작두로 잘라내 버렸다. 악행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바로 그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즉, 프로크루스테스 자신의 키조차 침대 길이와 맞지 않았다는 의미다.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탓만 했다는 것이야말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악랄함을 잘 설명해 준다. 시점을 현대로 옮겨보자. 대한민국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비슷한 게 하나 있다. 머리맡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고 적혀 있는 이 침대를 나는 ‘친일파의 침대’라 부르겠다. 원리는 비슷하다.
일본 마음껏 욕하면 영웅이 되는 이상한 사회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을 이 침대 위에 눕힌다. 자의적으로 제작된 침대의 길이보다 친일도(親日度)가 높으면 무자비하게 다리를 잘라 내버린 뒤 이마에 ‘친일파’라는 낙인을 새긴다. 관용의 여지가 없는 분노 일변도의 메커니즘이다. 흥미로운 건 친일도가 침대 길이보다 짧다고 해서 다리를 늘이지는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반일(反日)에는 경계가 없다. 마음껏 해도 된다. 그런 의미에선 또 한없이 관대한 게 한국인의 속성이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칭찬받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일본(인)을 욕하면 된다. 혹은 일본을 두둔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을 욕하면 된다. 심하게 비난할수록 인터넷에서, 학계에서, 또래집단 사이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2030 사이에서는 외면 당한지 오래된 메이저 일간지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인간의 얼굴을 한 우파’로 살아남기 위해 택하는 전술도 비슷하다. 언젠가부터 무턱대고 아베 신조를 극우파로 몰아붙이는 게 국제면의 정론이 돼 버렸다. 이렇게 편리한 전술이 또 있을까. 한국의 좌익 신문들이 전부 반일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한국 언론계에서 일본을 균형 있게 다루는 대형매체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평평한 21세기, 대명천지 오늘에도 변치 않는 한국 저널리즘의 민낯이다.
‘문창극 참극’의 두 가지 전제조건
저널리즘의 상황이 이러하니 문창극 사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속절없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앞뒤 맥락을 잘라버린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 발언은 모든 언론의 숭고한 반일정신에 스크래치를 가했던 셈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찌됐건 ‘하나님의 뜻’ 비슷한 표현이라도 입 밖에 내뱉은 시점에서 문창극은 ‘친일파의 침대’ 위에 눕혀졌다.
엉거주춤한 신문으로 변질된 지 오래인 중앙일보가 그나마 옛 동료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시늉을 했을 뿐 나머지 우익 언론들의 떨떠름한 태도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켰다. 그들 중 온누리교회 강연 풀 버전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전체 맥락을 보라”고 아무리 같은 소리를 반복해도 그들이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점 역시 우리는 안다.
우파 언론이 반일노선에 경도돼 있다는 사실 말고도 문창극 파문을 가능케 했던 요인은 하나가 더 있다. ‘안티 기독교’ 분위기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기독교인들을 ‘약간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다. 한국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일본을 욕하라. 한국에서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가? 기독교를 욕하라. 이 두 가지가 절묘한 비율로 결합된 것이 바로 문창극 파문이다.
문제는 교회마저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KBS가 문창극 발언을 문제 삼자 이 영상의 제작자인 온누리교회와 CGN TV는 해당내용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이 결정은 논란 초기 문창극에 대한 여론을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었다. 뭔가가 있으니까,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지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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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자진사퇴 입장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이날 문 후보자는 “지금 시점에서 사퇴하는 게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총리지명 14일만에 후보직을 자진사퇴 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
반일(反日) 정서와 반(反)기독교의 광기가 만날 때
오히려 교회가 나서서 전체 영상을 확산시켰어도 모자랄 판에 숨기는 데 급급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만큼 한국교회가 많이 위축돼 있다는 의미다. 역사에는 주관자가 있다는 얘기를 일요일마다 하고 있으면서도 그게 교회 밖으로 나가길 원하지는 않는 것. 이것이 한없이 나약해져 버린 한국 교회의 현주소다.
많은 목회자들이 부정과 불륜으로 얼룩져 버린 지 오래니 기독교가 신용을 잃은 것도 자업자득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허나 목사가 틀렸다고 해서 기독교 정신 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이번에 한국 교회는 이 구분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여러 종교 중 하나가 아니었다. 문화사(史)적 혁명성을 띠고서 조선의 오랜 굴종적 메커니즘을 엎어 버린 ‘위대한 전복’의 주도적 에너지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서 기독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보자. 16인이 기독교 신자였다.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핫’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건국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요즘엔 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1948년 건국 이후 첫 번째 제헌의회에서 국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도’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은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청했다. 제헌의회 속기록 첫 문서가 기도문인 나라인데 문창극이 교회 ‘안’에서 강연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문제를 삼을 일인가?
기억해둬야 하는 또 다른 이름, 박유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문창극 논란이 미궁에 빠진 가운데 또 한 사람의 ‘강경 친일파’가 등장해 한국인들을 분노케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극보다 훨씬 더 민감한 부분,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를 건드린 그녀의 이름은 박유하다(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그녀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1년 전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름 송사에 휘말리며 어마어마한 논쟁을 파생시키고 있다.
요지는 박유하가 “위안부 할머니를 비하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특정구절만 발췌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지만, 아래 <제국의 위안부>의 구절들을 읽고도 박유하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하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 보시길 바란다.
“사실은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애매하게 겹쳐지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로 만들어진 기억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p.43)
“물론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p.51)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p.204)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를 비하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역사의 피해자들을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만일 박유하에게 뭔가 죄가 있다면 듣기 거북한 얘기를 담담히 꺼냈다는 것뿐이다. 허나 듣기에 거북한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면 학자로선 그걸 탐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정의로운 군중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녀의 책을 유심히 읽는 것이 아닌, 학자 박유하의 책과 그 정신을 친일파의 침대 위에 눕혀 썰어버리려는 시도뿐이다. (그들이 적어도 위안부와 정신대만큼은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친일파와 커피 마셔 본 적이 있나요?
어쩔 수 없이 올해 광복절까지 ‘친일파’는 한국 사회의 주요 검색어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친일파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디부터가 친일파인가? 일본 제품을 쓰고 일본 영화를 보고 일본 소설을 읽으면 친일파인가?
한국인들은 이 복잡한 ‘친일파’라는 세 글자에 극히 단순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을 악(惡)으로 상정해 놓고, 민족주의적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결국엔 일본을 등지고는 살 수 없는 우리 스스로의 입지를 약화시키리라는 걸 잠시 잊은 채로.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누구도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친일파라는 이름의 유령이. 당신 앞에 놓인 선택은 두 가지다. 침묵하는 다수가 되거나, 이 기묘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소수가 되어 광기 어린 작두로 당신의 다리가 뭉텅 잘려나가거나….
글/이원우 미래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