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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미군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관리했다. 낙검자 수용소로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싣고 와 강제치료도 했다.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외부 모습.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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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지촌 여성과 국가 책임
위안부라는 단어는 옛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 제국주의 전쟁터 한복판에 성노예로 끌려간 피해 여성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불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위안부라는 단어는 비단 일본군 위안부만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군인을 위안하는 직업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단어였다.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 모두 위안부로 불렸다.
‘미군 위안부’의 존재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새롭게 우리 앞에 등장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흔히 ‘기지촌 여성’으로 기억하는 바로 그들일 뿐이다. 실재함을 알면서도 애써 드러내지 않던 존재, 바로 그들이다.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는 기지촌 여성의 인권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전략적 혹은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엄연히 정부와 언론은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 여성으로 지칭해왔다. ‘미군 위안부’는 관행과 제도로서 존재했다. 1961년 경향신문, 1961년 경기도청 공문서, 1973년 의정부시 공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관리사업계획에 따라 등록을 실시, 그 사업치고는 명칭이 요란스러워”(경향신문 1961년 9월15일 1면)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 취급 세부 기준 수립. (중략) 마. 본 영업소는 동지구에 유동하는 위안부를 접대부로 고용하고…(중략)”(1961년 9월15일 경기도청 기안지)
“제1조 (목적) 이 조례는 위안부를 검진하여 낙검자(성병검진을 통과하지 못한 성병 환자를 일컬음)를 격리 수용 치료하기 위한 성병관리소의 설치 및…(중략)”(1973년 6월9일 공포한 의정부시 성병관리소 설치 개정 조례)
미군과 한국쪽 30여명으로 구성된 한미친선위원회는 기지촌 여성들의
정신·위생·영어회화 교육 협의
경기도 당국은 유엔군 특수업소의
시설개선을 인천시에 지시하기도
71~72년 미군의 철군 움직임에
청와대에서는 기지촌 정화사업
국가는 그 여성들을 한미동맹과
외화획득의 전진기지로 생각
장관이 ‘소녀 충정’ 표현할 정도 한국전쟁 때도 ‘군 위안소’ 설치 기지촌 여성들은 왜 지금 국가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것일까. 그동안 일부 증언을 통해서만 알음알음 알려졌던 국가의 폭력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군 위안시설의 설치와 관리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자료들이 그것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가장 노골적으로 국가가 개입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가 쓴 <종군위안부 자료집>(1992)을 보면, 일본군 위안소의 형태는 크게 네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군 직영의 위안소, 둘째는 군이 인가를 내준 위안소, 셋째가 군이 지정한 민간 매춘숙, 넷째가 군인이 이용한 순수 민간 매춘숙이다. 군 위안소의 모습은 도시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양태가 달라졌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소’도 국가가 직접 설치했다. 1951년 여름께 설치돼 1954년 3월 해산됐다. 만 4년 가까이 육군본부가 서울, 강릉, 춘천, 원주 등에 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 1994년)에도 군 위안소를 군이 직접 통제하고 관리한 정황이 나온다. 책에는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개 운용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1948년 공창제가 폐지되고 성매매가 금지된 상황에서 국가가 군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군은 “국가 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후방전사 148쪽)이라고 규정하고 1954년 위안소를 폐지했다. 다만, 한국군 위안소는 피해자의 증언이 없고 기록으로만 확인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 상태다. 불법성을 인식한 탓인지 미군 위안시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위안시설의 지역과 구조는 국가가 계획하되 민간 성매매업자들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위안시설을 운영하는 형태를 띠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961년 11월9일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했다. 윤락방지법은 1948년 공창제 폐지령에서 나아가 처벌 사항을 상세하게 기재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6월 성매매를 사실상 허용하는 특정지구를 전국 104개소에 설치했고, 그중 9개소를 서울에, 61개소를 경기도에 할당했다. 이 특수 지구는 상당수가 미군 기지 인근이었다. 미군 전용 특수 업소는 미군 부대 반경 2㎞ 이내로 제한됐다. 정권의 정당성이 취약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미군 기지 인근에서 성매매를 허용한 것은 미군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9월10일치 <경향신문> 7면을 보면, 휴 P 해리스 미1군단장과 박창원 경기도지사 등 미군과 한국 쪽 30여명 인사들은 한미친선위원회를 열어 기지촌 여성 대책을 논의했다. 미군과 한국 쪽 인사들은 “윤락여성 전원에게 28시간 정신, 미용, 위생 및 영어회화 등의 교육을 실시한다. 법정검진을 철저히 하고 검진을 필한 자에 한하여 위안부 행위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협의했다. 지방 정부는 구체적으로 위안소 시설의 규격을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4월24일치 <인천신문> 3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인천시당국은 유엔군 전용 간이특수업소의 시설을 개선하도록 하라는 경기도당국의 지시에 따라 시내 18개소에 대하여 6월30일까지 시설을 개선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중략) 특수업소당 업태부는 15명이 있어야 하고 거실은 20개인데 1실당 평수는 1평 반 이상으로 미달 시는 6월30일까지 증축하되 건물은 영구건물(가건물 불가)이어야 한다.” 당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소에 집단 수용하기를 바랐지만 예산상 문제로 민간에 시설 설립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1961년 9월14일 작성된 경기도청 기안지(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 수립)에는, “현지 주둔 유엔군에 대한 위안 또는 사기 앙양 면을 고려하여 위안부들의 집단 수용시설이 시급하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므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함”이라고 관계 당국의 판단을 적시했다. 인천시는 기지촌 여성들이 위안시설 집단 수용을 거부하면 처벌할 계획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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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내부 모습.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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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미군의 수에 맞추어 지역별 위안업소의 수를 조절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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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고문헌
<미군 위안부 역사 2014 자료집>(김현선·신영숙)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김정자)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읽기: 기지촌 성매매 여성과 성별화된 민족주의, 재현의 정치학>(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2008)
<한국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박정미 한양대 HK연구교수, 2011)
<동맹 속의 섹스>(캐서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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