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집에 가야 하는 거예요, 말아야 하는 거예요?"

직장인 이윤(여·29)씨는 한국 팀이 0대3으로 뒤지자 돗자리를 접었다.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던 이씨는 "와!" 하는 함성에 100m를 질주하듯 되돌아와 대형 화면 앞에 섰다. 첫 번째 만회 골이었다. 한국 팀이 이내 한 골을 먹어 1대4가 되자 다시 돗자리를 챙겨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씨는 다시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달려와 2대4 상황을 지켜봤다. 23일 새벽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 영동대로에선 이씨처럼 오락가락 뜀박질을 하는 이가 수백명이었다. 이씨는 결국 경기 종료까지 지켜봤다. 그는 "이길 줄 알았던 알제리한테 참패하니 허망하다"고 말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브라질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2차전이 열린 이날 전국의 새벽 거리에서 10만여명이 승리의 염원으로 들끓었다. 18일 러시아전 때의 2배 가까운 인파였다. 서울의 광화문광장, 강남 영동대로, 신촌 연세로 세 곳에만 8만5000여명이 모여 환호와 탄식,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가슴을 졸였다. 경기가 한국 팀의 참패로 끝나자 일부 성난 시민들은 맥주 캔과 응원 도구를 집어던지며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전 때 1만6000여명이 모였던 광화문광장에는 이날 경찰 추산 4만여명이 모였다. 대표팀 공식 서포터스인 '붉은 악마'가 신고한 2만5000명보다 1만5000명이나 많았다. 인파가 몰리면서 이동식 화장실과 인근 커피숍 등의 개방식 화장실에는 15~20m의 긴 줄이 늘어섰다. 그래도 다들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날 거리 응원장에는 특히 기말고사를 마친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유미(20·대학 1학년)씨는 "지난 금요일 종강을 해서 친구 4명과 함께 응원을 나왔다"고 말했다.

오전 1시 30분 입장이 시작된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거리 응원장엔 3만3000여명이 모였다. 경기 시작 직전엔 걸어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새벽 4시가 넘어서까지 인근 지하철 역에는 서울 전역에서 달려온 응원객을 태운 택시들이 줄줄이 멈춰 섰다.

고등학생 윤모(17)군은 "등교 때문에 고민을 좀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길 것 같고 16강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양재동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택시기사 윤일현(50)씨는 "밤새 서울 곳곳에서 응원객들을 이곳으로 실어 날랐다"고 말했다. 양복 차림의 직장인 함영모(31)씨는 지각 걱정 없이 영동대로 한쪽에 앉아 알제리전을 지켜봤다. "전날 오후 6시에 잤어요. 이번엔 경기를 다 보고 간단히 요기를 한 뒤 바로 출근할 수 있어서 좋네요. 하하."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 연세로에는 전날 학교 축제를 마친 연대생 등 1만2000여명의 젊은 응원객들이 몰렸다. 신촌을 들썩인 응원 열기에 외국인들도 거리로 쏟아졌다. 스웨덴에서 온 요한(31)씨는 "한국인의 응원 문화를 직접 느껴보니 기분이 좋다"고 했고, 일본인 아키(24)씨는 "한국의 거리 응원은 정말 신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대표팀이 전반 26분과 28분 잇따라 실점하자 급격하게 식었다. 광화문광장에선 붉은 악마가 응원을 독려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침묵 속에 대형 화면만 쳐다봤다. 전반전 막바지 알제리의 세 번째 골이 들어가자 "조기 축구를 해라" "차라리 내가 나가도 더 잘하겠다" "에휴, 집에나 가자"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우수수 일어서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영동대로에서도 승부가 기운 4시 30분부터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해 귀가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김정문(24)씨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졸음이 쏟아져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혈기 넘치는 신촌의 젊은 응원객들은 "○○○은 그라운드에 산책 왔느냐. 신발 착용감을 느껴보려 나왔느냐"며 특정 선수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는 한국에 유학 왔거나 파견 온 알제리인 10명이 눈에 띄었다. 한글로 '알제리'라고 쓴 알제리 선수복을 입은 이들은 알제리 팀이 득점할 때마다 얼싸안고 국가를 불렀다. 전반전 대형 화면 가까이 있던 이들은 일부 응원객이 "알제리 사람들 꺼지라"며 욕을 하는 바람에 다소 한산한 이순신 동상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GS건설에서 근무한다는 아멜(28)씨는 그래도 "내 나라가 이겨서 기분이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