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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독도 침탈 전진기지…오키섬을 가다”
    • 입력2014.05.10 (08:51)
    • 수정2014.05.1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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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멘트>

    일본은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땅인 이 독도를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때 군사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몰래 편입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물개와 같은 독도의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는데요.

    KBS 취재 결과 한국 해녀들까지 독도로 데려와 해산물을 채취하게 하고 밤에는 위안부처럼 술시중을 들게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독도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에 수탈의 증거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도쿄 박재우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남서쪽 시마네현에서 북쪽으로 80 킬로미터 정도, 배로 2시간 반 걸리는 인구 만 5천여 명의 작은 섬 `오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잘못된 역사의 한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섬 입니다.

    그 내막을 알려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기 직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려야 합니다.

    110년 전 이곳 오키섬의 수산업자들은 독도의 조업권을 얻기 위해 중앙 정부에까지 가서 치열한 로비전을 폈습니다.

    왜 이렇게 이들은 독도에 열광적이었을까요? 그건 바로 독도의 물개잡이 때문이었습니다.

    오키섬의 자연생태계를 보여주는 자료관, 독도에서 잡은 물개 가죽과 그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가방이 전시돼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독도 물개'가 예전에는 얼마나 많았을까?

    기록상 일본인이 독도에서 처음으로 물개잡이를 한 것은 1903년, 독도 어업권 신청을 준비하던 오키섬의 수산업자 `나가이 요사부로'의 시험 조업 보고서입니다.

    `나가이'가 그린 당시 독도의 모습을 보면, `갑'이라고 쓴 독도의 서도에는 어민들의 임시 막사와 우물이 있고, 독도 주위는 온통 검은색으로 표시했는데, 물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을 나타낸 것입니다.

    1905년 8월, 일본의 첫 독도 시찰 기록을 보면, 당시 수천만 마리의 물개들이 바위마다 무리를 지어, 장관을 이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야하다(독도조업 수협장 아들) : "독도에 있던 동굴은 신비했습니다. 거기서만 물개가 새끼 낳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물개 때문에, `나가이'는 1903년 시험조업 당시, 300엔, 현재 시세로는 우리 돈 약 6천만 원을 투자해 불과 1주일 만에 1723엔, 약 3억 4천만 원의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독도 조업권을 얻은 것은 일제가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한 1905년, `나가이'가 이때부터 1912년까지 8년 동안 독도에서 잡은 물개는 모두 만 천여 마리, 해마다 평균 1300~1400마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물개 1마리의 가죽 가격은 현재 시세로 우리 돈 약 300만 원, 물개 가죽으로만 연간 40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던 것입니다.

    물개기름 등 다른 수익을 합치면 연간 백억 원대가 넘습니다.

    <인터뷰> 오키 주민 : "나무를 가지고 배 위에서 우리를 만들어서 물개를 넣어 왔습니다. 이 근처가 바다였습니다."

    독도의 물개 덕분에 `나가이 요사부로'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나가이'는 독도어업권을 얻은 보답으로 독도 물개 가죽으로 당시 최고급 가방을 만들어 메이지 일왕의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마네현 어민들에게 `독도'는 `황금알을 낳는 섬'이었습니다.

    오키섬에서 독도로 가는 길목입니다.

    제 뒤로 보이는 바다로 곧장 가면 4시간이면 독도까지 닿을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1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멀고도 험한 뱃길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황금알을 낳아주기만 했던 독도는 30년이 지난 1930년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그림은 1930년대 당시 독도 어업권을 가졌던 수협 조합장이 그린 것입니다.

    동도 정상에 러일전쟁 당시 감시초소와 서도의 우물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에는 1900년대 초에 독도를 뒤덮었던 물개는 보이지 않고, 전복과 미역 서식지만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독도의 물개를 새끼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서 불과 30년 만에 독도의 생태계가 바뀐 것입니다.

    당시 독도 조업 일지를 분석해 보면, 1905년 한 해 천 마리 이상 잡았던 물개가 1930년대에는 20~30마리에 불과합니다.

    물개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물개잡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개 대신, 전복과 성게, 미역 등 독도의 해산물도 당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특산품으로 일본인들에 인기였습니다.

    오키섬의 역사를 기록한 향토사료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1933년 독도에서 조업을 하던 일본 어민들을 촬영한 것입니다.

    이 사진 오른쪽에 긴장된 표정의 여성 4명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독도까지 끌려온 해녀들입니다.

    <인터뷰> 야하다(독도조업 수협조합장 아들) : "해녀들은 길게는 6년. 평균 4년 정도 일했습니다. 전복을 전문적으로 채취했습니다."

    당시 독도에서 조업을 한 수협의 조업 일지를 살펴봤습니다.

    1941년 제주도에서 16명 등 1921년부터 해마다 여러 명의 한국 해녀를 데려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일본 어민들은 독도에 숙소 2채를 짓고 20~30명씩 무리를 지어 봄부터 여름까지 4~5개월 정도 조업을 했는데, 제주 해녀들은 독도에 갇혀, 이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한 일본 언론은 한국 해녀들이 낮에는 전복을 따고 밤에는 일본 어부들의 술 시중까지 들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인터뷰>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 : "사실상 `정신근로위안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 해녀들까지 동원해 독도에서 잡아들인 해산물은 일본군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도는 물개 등 풍부한 수산물로 일본 오키섬 어민들에게는 최고의 호황을 안겨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물개를 포함한 독도의 수산자원은 씨가 말랐고 제주 해녀들까지 동원되는 등 수탈이 이어졌습니다.

    독도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일본 오키섬은 스스로 간직해온 자료들을 통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오늘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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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독도 침탈 전진기지…오키섬을 가다”
    • 입력 2014.05.10 (08:51)
    • 수정 2014.05.10 (10:48)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일본은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땅인 이 독도를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때 군사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몰래 편입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물개와 같은 독도의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는데요.

KBS 취재 결과 한국 해녀들까지 독도로 데려와 해산물을 채취하게 하고 밤에는 위안부처럼 술시중을 들게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독도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에 수탈의 증거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도쿄 박재우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남서쪽 시마네현에서 북쪽으로 80 킬로미터 정도, 배로 2시간 반 걸리는 인구 만 5천여 명의 작은 섬 `오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잘못된 역사의 한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섬 입니다.

그 내막을 알려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기 직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려야 합니다.

110년 전 이곳 오키섬의 수산업자들은 독도의 조업권을 얻기 위해 중앙 정부에까지 가서 치열한 로비전을 폈습니다.

왜 이렇게 이들은 독도에 열광적이었을까요? 그건 바로 독도의 물개잡이 때문이었습니다.

오키섬의 자연생태계를 보여주는 자료관, 독도에서 잡은 물개 가죽과 그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가방이 전시돼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독도 물개'가 예전에는 얼마나 많았을까?

기록상 일본인이 독도에서 처음으로 물개잡이를 한 것은 1903년, 독도 어업권 신청을 준비하던 오키섬의 수산업자 `나가이 요사부로'의 시험 조업 보고서입니다.

`나가이'가 그린 당시 독도의 모습을 보면, `갑'이라고 쓴 독도의 서도에는 어민들의 임시 막사와 우물이 있고, 독도 주위는 온통 검은색으로 표시했는데, 물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을 나타낸 것입니다.

1905년 8월, 일본의 첫 독도 시찰 기록을 보면, 당시 수천만 마리의 물개들이 바위마다 무리를 지어, 장관을 이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야하다(독도조업 수협장 아들) : "독도에 있던 동굴은 신비했습니다. 거기서만 물개가 새끼 낳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물개 때문에, `나가이'는 1903년 시험조업 당시, 300엔, 현재 시세로는 우리 돈 약 6천만 원을 투자해 불과 1주일 만에 1723엔, 약 3억 4천만 원의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독도 조업권을 얻은 것은 일제가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한 1905년, `나가이'가 이때부터 1912년까지 8년 동안 독도에서 잡은 물개는 모두 만 천여 마리, 해마다 평균 1300~1400마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물개 1마리의 가죽 가격은 현재 시세로 우리 돈 약 300만 원, 물개 가죽으로만 연간 40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던 것입니다.

물개기름 등 다른 수익을 합치면 연간 백억 원대가 넘습니다.

<인터뷰> 오키 주민 : "나무를 가지고 배 위에서 우리를 만들어서 물개를 넣어 왔습니다. 이 근처가 바다였습니다."

독도의 물개 덕분에 `나가이 요사부로'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나가이'는 독도어업권을 얻은 보답으로 독도 물개 가죽으로 당시 최고급 가방을 만들어 메이지 일왕의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마네현 어민들에게 `독도'는 `황금알을 낳는 섬'이었습니다.

오키섬에서 독도로 가는 길목입니다.

제 뒤로 보이는 바다로 곧장 가면 4시간이면 독도까지 닿을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1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멀고도 험한 뱃길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황금알을 낳아주기만 했던 독도는 30년이 지난 1930년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그림은 1930년대 당시 독도 어업권을 가졌던 수협 조합장이 그린 것입니다.

동도 정상에 러일전쟁 당시 감시초소와 서도의 우물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에는 1900년대 초에 독도를 뒤덮었던 물개는 보이지 않고, 전복과 미역 서식지만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독도의 물개를 새끼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서 불과 30년 만에 독도의 생태계가 바뀐 것입니다.

당시 독도 조업 일지를 분석해 보면, 1905년 한 해 천 마리 이상 잡았던 물개가 1930년대에는 20~30마리에 불과합니다.

물개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물개잡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개 대신, 전복과 성게, 미역 등 독도의 해산물도 당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특산품으로 일본인들에 인기였습니다.

오키섬의 역사를 기록한 향토사료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1933년 독도에서 조업을 하던 일본 어민들을 촬영한 것입니다.

이 사진 오른쪽에 긴장된 표정의 여성 4명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독도까지 끌려온 해녀들입니다.

<인터뷰> 야하다(독도조업 수협조합장 아들) : "해녀들은 길게는 6년. 평균 4년 정도 일했습니다. 전복을 전문적으로 채취했습니다."

당시 독도에서 조업을 한 수협의 조업 일지를 살펴봤습니다.

1941년 제주도에서 16명 등 1921년부터 해마다 여러 명의 한국 해녀를 데려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일본 어민들은 독도에 숙소 2채를 짓고 20~30명씩 무리를 지어 봄부터 여름까지 4~5개월 정도 조업을 했는데, 제주 해녀들은 독도에 갇혀, 이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한 일본 언론은 한국 해녀들이 낮에는 전복을 따고 밤에는 일본 어부들의 술 시중까지 들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인터뷰>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 : "사실상 `정신근로위안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 해녀들까지 동원해 독도에서 잡아들인 해산물은 일본군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도는 물개 등 풍부한 수산물로 일본 오키섬 어민들에게는 최고의 호황을 안겨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물개를 포함한 독도의 수산자원은 씨가 말랐고 제주 해녀들까지 동원되는 등 수탈이 이어졌습니다.

독도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일본 오키섬은 스스로 간직해온 자료들을 통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오늘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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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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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2 20: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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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독도 문재갖고 왈가 불가 할 문재가 아니고. 대마도가 우리땅 이라는 사실를 두고 따질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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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1 0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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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의 일본이름 은 , 도요타 타이주 ( 豊田大中 김대중 ),
김대중 대통령 하면서,韓日漁業협정 에,독도 를 한국 과 일본의 어업
공동수역으로 , 인정하여, 韓日 間 독도분쟁 의 불씨를 키웠다
김대중 이 독도 에 부분적 으로 , 일본 의 권리를 인정한 꼴이되었다
공유된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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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0 21: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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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결사코 사수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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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0 16: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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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 누락된 점들이 있는데,여기에 독도에 대한 침탈과 피해도
포함시키는 것도 검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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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0 14: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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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대한민국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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