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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Mar 201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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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뉴스 김봉길 인천 감독 "선수들의 사기 저하가 염려된다"

(사)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2월 13일부터 5박 6일 동안 구수정씨가 이끄는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진행했습니다. 전쟁피해자를 직접 만나며 진행한 평화기행은 베트남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꼭 닮은 역사를 가졌으나 비극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나라의 서글픈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전합니다. - 기자 말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나비기금'을 모으고 있다. 나비기금은 전 세계의 전시 피해여성을 돕기 위해 조성되는 기금으로,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살아야 했던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의 뜻으로 시작되었다.

두 분은 일본 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전시 성폭력 피해여성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활동하면서 세계 도처를 다니다 보니, 우리만 피해자가 아닌 걸 알았어. 아파본 사람이 아픈 마음 안다고 뭐든 도울 게 없을까 생각 끝에 나비기금을 만들게 된 거지(김복동 할머니)."

그러한 뜻에 살뜰히 공감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나비기금이 조성된다. 베트남의 경우, 현재는 9명의 전시 피해여성이 매달 나비기금을 전달받고 있다.

평생 한국인 '남편'을 기다리는 상(Sang) 할머니

▲ 전쟁 피해여성 Pham Thi Sang 할머니. 전쟁 중 사귄 한국군 남자는 할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떠나갔다. 다시 돌아오겠다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 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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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 3일차, 나비기금 수혜자 중 한 분인 팜 티 상(68·Pham Thi Sang) 할머니를 찾아가는 길. 놀랍게도 버스는 2시간 이상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을 달렸다. 파도 위의 작은 배처럼 마구 출렁거리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베트남 땅은 우리나라와 유난히 닮아있었다. 완만하게 솟구친 산세와 들판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 눈을 감았다 뜨면 혹여 여기가 한국은 아닌가 싶었다.

마을을 지날 때는 길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버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소들까지…. 베트남의 시골에선 버스도 흔치 않은 까닭이리라. 그 순박함에 마음이 한없이 젖어들었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이 베트남의 국토는 런 아저씨처럼 온몸에 파편이 박혀 있다(관련 기사 :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전쟁 시 투하한 폭탄의 약 10%, 150만 톤의 폭탄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베트남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불발탄으로 사망한 사람이 4만2000명이라고 했다. 1㎡에 폭탄 하나. 절대적 강자인 미국은 이 가난하고 순한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걸 무엇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야만의 역사,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더없이 깊어졌다. 
 
상(Sang) 할머니는 우리 일행이 갈 거란 소식을 듣고 구수정 본부장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다.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 구 본부장이 누누이 그러지 마시라 대답했지만 할머니의 조그만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당 하나 가득 50명분의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곱게 쪽진 머리에,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우리를 맞은 상 할머니는 전쟁 당시 한국군 한 사람을 만났다. 할머니는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할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떠났다. 갈 때 남자는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만 나중에 서류를 만들어서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할머니는 홀로 아들을 낳고 키워야 했다. 할머니는 그 남자의 이름을 '김(Kim)'이라고만 알고 있다. 백마부대 29연대 소속이라 했다.

잠시 후 기막힌 사실이 밝혀졌다. 할머니는 우리 일행이 그 남자, 한국의 '남편'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한국·베트남시민연대, 정대협으로부터 받은 지원금도 모두 한국의 '남편'이 시켜서 보내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믿는 데는 오해가 있었다. 2002년쯤에 3시간 거리쯤 떨어져 있는 깐난이란 곳에서 라이따이한을 찾는 방송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웬 한국인이 상 할머니가 과거 그 남자에게 주었던 자신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할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할머니는 한국의 '남편'이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라, 그런데 자신이 만나지 못한 것이라 믿었다.

잠시 후 동행한 베트남의 지역 인민위원회와 여성위원회 사람들, 그리고 구 본부장과 정대협의 윤미향 대표까지, 할머니의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일대 설전이 벌어졌다. 동네사람들이 다 마당으로 모여들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그 잠시 동안,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가 실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달콤한 상상에 젖어들었다. 어쩌면 뒤늦게 그 남자가 할머니를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 Sang 할머니 댁 마당에 모여든 사람들. 현재 정대협에서는 나비기금을 통해 전쟁피해여성을 지원하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9명의 여성이 지원금을 받고 있다.
ⓒ 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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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철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대화가 오간 끝에 그때 라이따이한을 찾는 방송을 한 것은 한·베시민연대였으리라는 것, 그리고 사진을 들고 온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그녀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려야 했다. 다음과 같은 잔인한 진실 말이다. 즉 우리는 당신이 기다리는 한국의 '남편'이 보낸 사람이 아니고, 지원금도 남편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으리라는….

구 본부장이 할머니에게 한참을 설명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평생을 가져온 믿음은 그랬다. 서로 사랑했고 그가 언젠가 자신을 찾아오리란 믿음과 바람은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일가를 이뤘다. 아들 '언'이 또 2남 1녀를 두었고, 맏딸은 결혼해 막 100일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딸의 얼굴 생김이 한국인과 꼭 같아 마음이 아렸다.

▲ Sang 할머니의 가족. 할머니는 평생 홀로 가족을 건사했다. 왼쪽부터 둘째 손자, 셋째 손자, 첫째 손녀, 손녀사위, 할머니, 며느리, 아들 ‘언’이다.
ⓒ 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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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 29연대 Kim, 당신이 준 것은 사랑이었나요

아들 '언'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긴장한 듯도 했고 불안한 듯도 했다.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대화가 끝나고 한참 음식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질문을 던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누가 저의 친척입니까?"

아, 아들도 우리 일행이 한 번 보지 못한 한국인 아버지가 보낸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전해도 들리지 않은 듯했다. 아들은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웅변하듯 다시 우리에게 물었다. "여기서 누가 저의 아버지와 친척입니까?" 목이 멨다. 할 말이 없었다.

아들은 우리 일행 중 아버지의 배다른 자식이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고, 우리 모두가 분명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라이따이한인 그에게는 우리가 태어나 처음 보는 한국인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음식이 끝도 없이 나왔다. 할머니는 남편이 보낸 사람, 혹 남편의 가족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온다하니 이토록 큰 상을 차렸던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빚이라도 냈던가? 숟가락질 하기가 한없이 송구스러웠다.

일정이 한참이나 늦어져 어두워졌을 때 우리는 할머니 댁을 떠났다. 머물렀다 떠나버린 그 한국군처럼, 우리는 휑하니 왔다가 기약 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우리가 당신들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그 누군가들이 아니어서 더욱 그러했다. 마당에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그들이 떠나는 우리를 향해 내내 손을 흔들었다.

상 할머니는 지금도 그 지붕 낮은 집에서 한국인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남편이 언젠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믿음은 할머니의 생의 전부를 관통하는 것이어서 그 무엇도 깰 수 없다. 그 믿음이 무너지는 날, 어쩌면 할머니는 망부석처럼 굳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백마부대 29연대 김(Kim). 그에게 이 '팜 티 상'이란 여성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당신의 일가가 여기서 이렇게 평생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가난하고, 가난하여 한없이 순수한, 그리하여 당신의 달콤한 거짓말도 믿음으로 바꿔버린 이들에게 당신이 준 것이 사랑이었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폭력에 가까웠으리라. 여인에게 이름 석 자도 알려주지 않은 당신이니 말이다.   

▲ 라이따이한인 ‘언’ 씨. 현재 라이따이한은 최소 5천 명에서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산된다. 라이따이한들은 적국의 아이, 적군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라는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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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게 집단윤간당한 홍(Huong) 할머니

또 다른 나비기금 수혜자 누엔 티 홍(66·Nguyen Thi Huong) 할머니를 찾았다. 자그마한 몸에 고운 선을 가진 이 할머니는 전쟁 당시 미군기지에서 청소와 밥을 해가며 생계비를 벌었다. 하루는 한국군들이 음료수 마신 자리를 치우라 해서 치우던 중이었다고 한다. 한 병사가 "너 오렌지주스 마실래?" 라고 묻더란다. 할머니는 별 의심 없이 주스를 받아마셨다. 하지만 잠시 후 할머니는 혼절했다. 깨보니 옷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제야 자신이 윤간당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던 한국군 여러 명에게 집단적으로 당했을 터였다. 그때 할머니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해서 할머니는 다시 부대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일을 시키지 않고 할머니를 쫓아냈다.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는 임신했음을 깨달았다.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한 것도 그러한데, 게다가 한국군에게 집단윤간을 당했으니 세상이 자신을 배척할 터였다. 한 사람의 일생이 끝 모를 어둠속으로 침잠하는 순간이었다. 늙은 아버지는 첫아이를 억지로 떼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며, 어쩌겠냐고 했다. 생명이었다. 뱃속에서 자라나는 그것도 결국 생명이어서 할머니는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라이따이한'을 낳았다.

▲ 전쟁 피해여성 Nguyen Thi Huong 할머니 할머니는 평생 한국군에게 윤간당한 여자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 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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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딸을 키우는 일은 몸서리치게 힘들었다. 온 지방을 떠돌며 노동을 했고, 5년 후 베트남 사람을 만나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혼하지 못했다. 한국군에게 윤간당한 여자란 소문에 남자의 집안에서 반대했던 것이다. 딸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을 때면 할머니는 다만 '김(Kim)'이라고 대답했다. 김(Kim)은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군들이 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비겁하고 졸렬한 대명사일 뿐이었다.

라이따이한인 딸은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다. 적국의 아이, 적군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라는 냉대와 멸시였다. 라이따이한의 '라이'에는 경멸적인 혼혈잡종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딸은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에 뛰어들어 온갖 궂은일을 하며 살아왔다. 그런 생에 볕이 든 것은 몇 년 전이다. 한·베시민연대를 만나 학비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덕분에 딸은 자녀 셋을 모두 공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 취업이 되지 않아 여전히 이들은 가난하다.

부산대 조흥국 교수에 따르면, 현재 라이따이한은 최소 5000명에서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들 모두 냉대와 차별 속에서 살아간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생이다. 홍(Huong) 할머니와 딸은 이야기 도중,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동안의 생이 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했을지, 한 줄기 눈물이 말해주고 있었다.

딸(45)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탰다.

"호치민 시에서 복권 파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한국인을 만났어요. 너무나 심장이 뛰고 무섭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그 아저씨에게 용기를 내 저는 라이따이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내가 너를 도와줄게'하면서 복권을 10장 사주셨어요. 너무 고마웠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그 아저씨가 준 돈이 모두 가짜였습니다. 그날 전 종일 펑펑 울었어요. 그동안의 모든 설움이 한꺼번에 터지더군요. 하지만 나중에는 그 아저씨도 속았겠지, 속아서 가짜 돈이란 것도 모르고 내게 주었을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어찌 이리 가혹한가? 신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용서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아버지를 찾고 싶으냐고 물었다. 딸은 싫다고 했다.

"절실함이 있지만 찾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것이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린 이렇게 우리를 걱정해주는 한국의 단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라이따이한, 더는 안 된다

▲ 라이따이한 2세인 Sang 할머니의 손녀. 백일 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웃음이 해맑다. 그녀는 나중에 정말 자신의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냐고 다시 물어와 마음을 아프게 했다.
ⓒ 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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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은 먼 이국의 신기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배다른 형제자매다. 수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여전히 차별과 냉대 속에 있다. 그들은 오늘도 대한민국의 이름 모를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또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들을 그냥 그렇게 두어도 괜찮겠는가? 경멸의 의미를 내포한 그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게 두어도 괜찮겠는가?

베트남이 그러했듯이, 선진국 문턱에 있다는 대한민국이 이제는 포용력과 정직함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싶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국가가 공식적으로 전쟁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전쟁 후 사회를 재건하고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다급한 마당에 배상을 요구해 강대국들로부터 고립될 순 없었던 까닭이다. '과거를 묻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슬로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들까지 과거를 묻은 것은 아니다. 과거는 그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또 사랑과 화해에 기반한 치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

한 때 품었던 여인을 외면하는 아버지, 자신이 뿌린 씨앗인 자식을 모른 척하는 아버지는 존경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시인하고 그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대한민국, 존경받는 아버지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쟁 2세대들은 이제 라이따이한과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눌 만큼 자랐다. 그저 상처 있는 자리에 꽃이 피어나는 감동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 나비 한 마리 날아들어 우리와 함께 했다. 나비기금이라 나비도 날아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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