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국제부장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로 활동하는 재미교포 이창래 씨의 근작 ‘생존자(원제 The Surrendered)’에는 1934년 만주 관동군 소속
일본인 장교들이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인근에서
교육사업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와
영국계 중국인을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인 장교들은 중국군 관련
정보를 요구하며 선교사 앞에서 그의 부인을 윤간하고 영국 여권을 소지한 중국인 청년의 양쪽 눈꺼풀을 칼로 도려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들은 이어 선교사 부부를 총살한 뒤 이들의 13세 딸까지 성폭행한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은 중국인뿐 아니라 미국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영미권에서는 이창래 씨가 ‘한국인 작가 중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작가’라고 평이 나오고 있는데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면 망각 지대에 묻혀 있던 일본군의 과거 만행을 오늘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린 ‘생존자’ 덕분일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후 동북아 역사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경제적 몸집 불리기에 최우선 가치를 뒀던 지난 세기와 달리 ‘중국의 꿈’을 집권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세기 중국 인민들을 울렸던 일본에 책임을 묻고 단죄할 태세다. 중국 정부는 지난 1월 베이징외신기자단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인근의 만주사변 기념 9·18역사박물관으로 초대한 데 이어 최근엔 난징(南京)대학살 기념관 초청행사도 했다. 아베 측근들이 “난징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자 난징대학살에 대한 대대적인 국제홍보전에 돌입한 것이다.
헤이룽장(黑龍江) 성은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의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 전시시설을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라고 22일 밝혔다. 하얼빈(哈爾濱) 시는 이미 지난 1982년 731부대가 생체실험을 했던 장소에 전시관을 만들어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해왔는데 최근 수집한 문물 1740점을 더 전시하기 위해 신관을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2009년 8월 관훈클럽 답사반과 함께 하얼빈의 731부대 전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장에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731부대장이 쓰던 책상과 각종 고문 도구 등이 전시돼 있다. 다양한 생체 실험 장면들도 재현돼 있어 한여름에도 음산한 기운이 도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이 시설이 확장된다니, 이제 중·일간 역사전쟁은 전면화할 수밖에 없다. 13억 인구가 살고 있는 중국은 거대 함대와 같아 한번 방향을 잡으면 바꾸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전세계에 폭로하고 책임을 묻겠다는 시진핑 정부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중국의 과도한 역사·영토 드라이브는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 위압적이다.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내해로 삼으려는 시진핑의 대국주의적 발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러한 중국의 드라이브에 원인을 제공하는 세력은 바로 극우 아베 진영이다. 이제 일본은 아베 세력이 추구하는 길이 21세기 일본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리더국가로 나가는 길과 부합하는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아베 정권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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