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보의 세월따라 노래따라]
일본엔카가요협회의 '다카키 이치로우'(高樹一郎)회장은 다큐멘터리에서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에서 온 것으로,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로트는 매우 닮았다'라며 '엔카의 시조인 故 '고가 마사오' 선생은 원래 한국인으로 패전 후 절망하고 있던 일본인에게 노래로 꿈과 희망을 안겨주고 일본국가 복원에 큰 힘이 돼주셨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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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카 가요계의 두 거목(작곡자/가수)은 한국인이었다!!
1966년 일본 열도를 강타한 노래 '悲しい 酒 '(가나시이 사케) ㅡ '슬픈 술' 작곡자/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ㅡ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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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목/ 悲しい 酒 (슬픈 술)/ 작사: 石本美由起 / 작곡: 古賀政男
<에피소드>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히트곡 중에서 '고가 마사오'가 작곡한 노래이다. 슬픈 심정을 달래기 위해 술잔을 놓고 울고 있는 미소라 히바리의 모습이 어쩌면 화려한 가수 생활만큼이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던 자신을 노래한 듯 하다. 이 노래는 원래 북해도 출신 '北見澤淳'이 최초로 취입한 노래였으나, 그리 히트를 하지 못한채 묻혀졌다. 그후 미소라 히바리가 두 번째로 취입을 하였다. 1966년 6월에 취입을 하였으나 좀처럼 히트하지 못한채 시간이 지났으나, 레코드가게에 미소라 히바리 상반신 사진과 함께 '悲しい 酒'라는 스탠드를 세워놓으면서 점점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 후 TV에 출연하여 느린 템포로 노래하면서, 미소라 히바리의 특유의 연기력을 십분 발휘하여 대사를 집어 넣어 호소력있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면서 폭발적인 인기 노래가 되어 그 옛날 100만장을 돌파하는 레코드가 되었다. <2절>에 들어가기전의 그 대사를 번역하면, '사케야 도오시데 도오시테 아키라메타라 이이노' 아아! 헤어진 뒤에 남아있는 마음의 슬픔은.... 미련인가! 그 사람의 모습, 쓸쓸함을 잊어 버리려고 마시는 술잔은 오늘밤도...나를 슬프게 만드는구나! 술아! 어찌하여 어찌하면 그사람을 잊어야만 한단말인가! 잊어야만 한단말인가! (술아! 어찌하여 어찌하여 그사람을 단념해야만 좋단 말인가! )라고 흐느낀다. <작곡자 고가 마사오가 남긴 말> '노래는 아무리 고운 목소리 만으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슬픈 술이라는 이 노래를 방송에서 부를 때마다, 미소라 히바리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하였다. 그래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의 마음을 울렸다.' | |||||
[이제는 일본인들이 인정해야 할 한국인들의 초상(肖像)]
태평양전쟁 패전 후 절망하고 있던 일본인에게 노래로 꿈과 희망을 안겨주고 일본국가 복원에 큰 힘이 되어준 한국인이 있다. 바로 '역도산'(力道山/리키도잔)이다. 한국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일부 문헌에 김광호(金光浩)로 되어 있기도 하나 김신락이 정확한 이름이다. 1925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오무라시(大村市)의 부농에게 양자로 들어가 '모모타 미쓰히로'(百田 光浩)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스모 선수가 되면서 '역도산'(리키도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스모를 중단하고, 1951년부터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의 여러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1963년 12월 8일, 폭력단 스미요시 일가(住吉一家)와의 말다툼이 원인이 되어 칼로 배를 찔렸다. 이 상처가 화농성 복막염의 원인이 되어 12월 15일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또 하나의 '한민족'의 설움이요 비극의 주인공이다!! [회복되는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왜 프리메이슨은 아직도 한반도를 탐내는가!! <일본편> (자세히보기). | |||||
곡목/ 노도의 사나이(怒涛の男) 노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역도산 멘트(力道山 あいさつ入り <YouTube/자세히보기> オヤジ伝説検証隊「自由雲」のオヤジ伝説 <히바리-역도산 열애 증언/자세히보기> ―力道山もご存じなんですか? 重「力道山は白いオープンカーに美空ひばりさんを乗せて、銀座のナイトクラブによく遊びに来ていました。我々の伴奏でひばりさんがジャズを歌うんです。彼女の歌は最高だった。浜口が〝力道山マンボー〟なんてオリジナル曲を作っていて、力道山が来ると、この曲で盛り上げたりしてね」 ㅡ역도산을 아십니까? '역도산은 백색 오픈카에 미소라 히바리를 태우고, 긴자의 나이트 클럽에 자주 놀러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반주로 히바리가 재즈를 노래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노래는 최고였습니다. 하마구치 씨가 '역도산 맘보'라고 오리지널 곡을 만들었고, 역도산이 오면, 이 곡으로 북돋워 주었지요.'
'미소라 히바리'는 1937년 5월 29일 요코하마 시에서 생선장수로 일하는 아버지 '가또 마스키치'(加藤增吉/한국계 일본 귀화인설)와 일본인 어머니 '가또 키미에'(加藤喜美枝/한국계 일본 귀화인설) 사이에서 태어났고, 쇼와(昭和)시대의 '화'(和)자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지'(枝)를 따와 본명은 '가토 가즈에(加藤和枝)이다. 1946년 일본 가요계에 데뷰해서1989년 6월 29일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1500여곡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로 불리워졌다고 전한다. 일부는 그가 일본에서 한국에서 건너 온 이미자 씨랑 3개월간 협연을 하였으며, 일본에서의 한국의 '이미자'라고도 평한다. 미소라 히바리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의 고향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에서 공연하기를 바랐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해외공연 교섭이 있었으나, 오직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의 공연을 원했다는데, 당시 한일문화개방이 되기 전이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일본의 정통 엔카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역도산과 함께 2차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일본을 건설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한국계설이 있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김해였다는 증언들이 많다. 아버지 '마스키치'는 멋을 아는 사람으로 외출을 할 때에는 생선 냄새가 나지 않도록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는 버릇이 있었고, 음악적 성향도 풍부하여 1945년 딸인 미소라 히바리를 보컬로 '미소라악단'이란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미소라 히바리가 어렸을 때는 어린 소녀가 엔카(演歌)를 부른다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음악활동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원래 말이 없던 미소라 히바리는 말이 없어 오만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출석일수가 부족하여 쉬는 날 혼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기고 했다고 그의 자서전 '흐르는 강물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에서 털어놓고 있다. 이러한 법칙은 고대의 한반도계 실력자들이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통된 일본인들의 심리현상이다. 일찍이 '칸무텐노'(桓武天皇/한무천황)은 두 왕비가 백제계 후손이었을 정도로 편애하였고 <오른쪽 책 참조>, 백제왕씨들을 관료로도 중용하였다. 이에 반대파들의 한반도, 한반도인에 대한 시기와 폄훼는 날로 심해져 대 한반도 인식이 험악해졌다. 이에 '칸무'는 일본판 '분서갱유'를 실시하니, 이때 한반도 관련 서적들이 대부분 불태워져 버리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본관을 둔 족보가 사라짐은 물론 한반도인에 대한 불이익이 유행하던터라, 신라, 가야계이면서도 중국계 후손임을 주장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바로 신라에서 건너간 '하타씨'(秦氏)라든가, 가야계가 대부분인 '아야씨'(漢氏)들이 한반도 출신임에도 중국성씨임을 내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대 일본에 있어서도 그대로 통용되니 일본으로 귀화하는 한국인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 |||||
<Created/20120113> <Updated/2012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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