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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한인회 김승백(44·사업·사진) 회장은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미국령 사이판에 도착한 27일 이렇게 말했다. 일왕 부부는 이날 2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잃은 일본의 전몰자 추모를 위해 사이판을 찾았다.
김 회장의 가슴이 답답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2차대전 종전(終戰) 이후 처음으로 해외 지역 위령방문에 나선 일왕의 모습이 어이없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군국주의를 추모하는 의도가 과연 뭐냐는 것이다. 사이판은 일본이 1914년 점령한 이후 미국에 빼앗길 때까지 30년이나 지배했던 곳이다.
특히 일본군이 섬을 점령한 미군에 투항을 거부하며 뛰어내렸다는 ‘반자이(만세) 절벽’ 등 일본으로선 잊지 못할 전흔이 남아 있다. 일왕은 이번에 1974년 사이판에 건립한 ‘중부 태평양 전몰자의 비’,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사망한 미군 추모시설인 ‘제2차 세계대전 위령비’에 헌화하고 ‘반자이 절벽’을 돌아볼 예정이다.
김 회장은 또 “종전 60년 가까이 되도록 해외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상들의 유골이나 관련 기록조차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고국의 현실을 다시 깨닫게 돼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일왕의 사이판 방문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부터 동분서주했다. 이곳에서 희생당한 한국인들의 넋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영사관측에 일왕 방문시 사이판에 있는 한국인 추모탑도 찾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 회장은 “방문을 아예 막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대안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사이판 시내에 ‘태평양에서 희생된 한국인에게 사죄하고 위령제를 지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으나, 곧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사이판 고위 관계자들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판에 한국인 데모대가 출현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김 회장과 현지 교민들은 원주민들의 눈총을 받는 처지에까지 몰렸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관광업 의존도가 높은 사이판 원주민들은 한인들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결국 김 회장은 27일 오후 “사이판 한인회는 일왕 내외를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마지못해 발표했다. 성명 말미에 “한인회는 일왕의 방문이 일본의 전몰자들만을 위한 추모가 아니라 사이판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민족을 위한 추모의 방문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는 데 그쳤다.
그는 “한 달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에 이런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건 우리 사정상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회장님이 잘 알아서 대처하시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60년간 기념박물관은커녕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 작업도, 희생자 기록 복원 작업도 없이 민간인이 세운 추모탑 하나만 덩그러니 놓아두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생각을 하니 허탈하기만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