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었다. 사진은 1970년대 말 동두천 기지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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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0> 기지촌 정화운동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선거의 핵심 표어로 ‘여성대통령’을 들고나왔다. 생물학적인 성(섹스)과 사회적인 성(젠더)을 엄격히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박근혜의 여성대통령론을 마뜩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박근혜 후보가 동시대 여성 전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동년배 여성들과도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여성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박근혜가 영애로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생활했던 유신시대에 동년배 여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유신시대 여성들의 삶은 이미 살펴본 여공들보다 더 내려가 기생관광과 기지촌을 들여다보아야 바닥이 보인다.
박근혜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찬양해온 유신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지촌 정화운동이 나온다. 인혁당이나 정수장학회 문제와 같은 낯익은 국가폭력 사건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자도, 직접적인 가해자나 수혜자도 국민 전체에서 보면 소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지촌 문제는 그 피해자가 수십만이고, 수혜자도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다 너무나 뚜렷하게 현재진행형이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실상의 공창제를 운영하면서 힘없는 여성들의 몸뚱이를 담보로 국가안보와 외화벌이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미군철수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 주둔지역에 주둔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의 조선군사령부 자리였고, 미국 공군이 자리잡은 평택도 일본군이 비행장을 닦던 곳이었다. 당연히 일제 때에 형성된 유곽은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으로 바뀌어갔다. 사회안전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시절,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여성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던 전란 속에서도 순결은 여전히 목숨보다 귀한 가치였다. 한번 ‘몸을 버린’ 여성들, 특히 가진 것이라곤 ‘이왕 버린 몸뚱어리’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은 극도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다. 수많은 순이들은 지친 몸을 누일 곳이라곤 기지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레나가 되어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순이가 에레나가 되었을까?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의 수를 관련 연구논문에서는 대개 30만가량으로 추산하는데, 30만이라면 파월장병 수와 비슷한 규모이다.
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7사단과 3개 공군 전투부대 등 주한미군 6만2천명 중 2만여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미군 철수로 공황상태에 빠진 박정희는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갑’인 미국은 ‘을’인 한국에 다양한 경로로 기지촌 정비에 대한 요구를 해왔다. 미국대사관은 주로 한국의 기지촌에서 한국인들이 흑인 병사들을 인종차별하는 것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우려를, 미8군 쪽은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를 제기했다. 1971년 12월 박정희가 한미 1군단사령부를 순시했을 때 부사령관 이재전은 박정희를 수행하면서 미군 쪽이 요구하는 기지촌 정화에 대하여 건의했다. 미군은 지원병 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한국이 성병 발병률도 높고 인종차별도 심하다며 자식의 한국 배치에 극력 반대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쪽은 독일이나 오키나와 등지의 쾌적한 기지촌의 예를 들며 한국 쪽에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요구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박정희는 수년에 걸쳐 내각에 지시했는데 왜 정화가 안 됐느냐고 크게 화를 내면서 청와대가 직접 사안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담당자는 정무비서관 정종택이었는데, 그는 새마을운동 담당관을 겸임하고 있어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의 새마을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1년 12월31일 청와대에서는 10여개 부처의 차관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의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발족해,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기지촌의 환경 개선과 성병의 예방과 치료 등의 과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미군 철수의 절박한 상황에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기지촌 정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지촌 정화운동이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추진도 한·미 합작으로 이뤄졌지만, 한국 정부는 사실 기지촌 정화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기지촌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정희의 지시로 5·16 군사반란의 적극 가담자이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으로 막강한 위세를 떨친 백태하가 주도한 군산의 아메리카타운은 미군들의 쾌락을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1969년 9월 문을 연 아메리카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여성학자들은 군산의 아메리카타운을 정부 주도 아래 설립된 ‘군대창녀주식회사’라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투력을 극대화하려면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어야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는 국가관리 성매매 시스템이었다. 이 점에서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무섭게 빼닮았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야만적인 제도지만, 이 제도를 만든 자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이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입안한 자들도 한국과 미국의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도,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웠다는 위대한 미국의 빼어난 아들들도, 일본에서 미국으로 주인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승승장구한 식민지 조선의 수재들도 위안부들의 인권같이 사소한,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기지촌 정화운동을 건의한 이재전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처럼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었다.
‘주한미군 전투력 극대화 위해 섹스를 즐기도록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제와 흡사한
좋게 말하면 국가포주제였다
영애 박근혜는 그 시절
원로급 인사들을 모아놓고
충효사상을 강연했지만
밑바닥에서 사회를 떠받치는
기지촌 여성들 손을 잡은 적 없다 “안보와 달러를 위해 몸을 씻으시오” 기지촌 여성들은 청결한 몸과 깨끗한 성을 판매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에 두 번 검진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몸을 파는 여성이라 해도 검진대에 올라 남자 의사에게 치부를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검진을 받아야만 검진증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검진증은 신분증이자 ‘영업허가증’이었다. 검진증을 갖고 있지 않다가 미군 헌병의 검문(기지촌에서는 이를 ‘토벌’이라 불렀다)에 걸리면 즉심에 회부되었다. 당시 미군의 성병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연구인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따르면, 1천명당 성병 발생 건수는 1970년 389건, 1971년에 553건, 1972년 692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미군부대 정문 보초의 주된 임무는 외출 나가는 병사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검진에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적발당한 여성은 가차없이 ‘몽키하우스’라 불린 성병진료소에 감금되었다. 반면 성병에 걸린 미군이 완치될 때까지 외출이 금지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미군의 7할이 성병에 걸려 있건만 성병의 책임은 오로지 한국 여성의 몫이었다. 성병진료소에서는 처음에는 페니실린을 투약했지만 부작용이 자꾸 생기고 잦은 투약으로 내성이 생겨 약효가 떨어지니 투약 용량을 거푸 늘렸다. 의사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었다고 했지만, 여성들은 주사를 맞으면 다리가 끊어지게 아팠고, 많은 사람들이 자다가 죽고, 화장실에서 죽고, 밥 먹다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직 한국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 기지촌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나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근 10퍼센트인 970만달러에 달했다. 한국 정부는 주말 외출을 나온 미군들이 오키나와나 일본으로 가 성매매하는 것을 기지촌 여성들을 업그레이드하여 국내에서 흡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어와 에티켓을 교육하려 했다. 기지촌 ‘양공주’에서 활동가로 우뚝 선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김연자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강사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흠흠,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왔으니 그 앞에서 옷도 단정히 입고, 그 저속하고 쌍스러운 말은 좀 쓰지 마세요.”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이자 미군을 붙들어 두는 안보전사로 그대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이니 긍지를 갖고 일하라는 말에 그렇게 좋은 일이면 제 딸부터 시키지 하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 우리는 “열심히 씹을 팔고 좆을 빨자”고 자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어 강사들은 “메이 아이 싯 다운?” 하는 식의 교양 영어를 가르쳤지만, 여성들은 바쁜 세상에 ‘메이’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메이냐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어란 렛스 고 숏 타임, 렛스 고 롱 타임, 하우 마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나 ‘자매회’가 주최하는 이런 교양강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검진증 뺏기지 않으려면 자리를 채워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학교 문전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일본어를 몰랐다. 그들은 “닛뽄징 조센징 덴노헤이까 오나지네”(일본인과 조선인은 천황폐하가 같지요) 따위의 서비스 언어를 날림으로 배워 급히 외워야 했다. 안보전사답게 기지촌 여성들도 팀스피릿 훈련을 뛰었다. 기지촌과는 달리 훈련 나와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미군들도 훈련 사이사이의 짧은 시간에 욕구를 풀려니 앞사람이 조금만 오래 끌면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쳤다. 이렇게 밖에는 길게 줄을 서 있고, 안에서는 5분도 안 걸리게 일을 치르면서 여성들은 옛날 정신대 끌려간 사람들이 이랬겠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 한국 정부는 야전에 임시보건소를 지어 여성들을 검진했다. 여성들이 아니라 미군을 위해서였다. 왕언니 김연자는 그런 데까지 돈 벌러 간 여자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거기에 천막 치고 보건소 세워 준 정부도 참 대단한 정부였다고 혀를 찼다.
동두천 기지촌의 여성들. 정부는 그들을 안보전사이자 산업역군이라고 떠받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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