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14 22:45:21ㅣ수정 : 2013-10-14 23:00:29
- 일제 ‘낮엔 노역·밤엔 위안부 강요’ 14세 소녀 앓다 숨졌다
-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 글자크기
- l
- l
- l
“시집 안 간 딸 있지. 오늘 데리고 공회당으로 나와.”
1943년 강원 양구군의 한 시골마을. 일본 순사의 방문에 장모 할머니(당시 14세)와 어머니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집집마다 순사가 찾아와 전쟁터로 아들딸들을 데려간다는 소문이 한창이던 때였다.
순사는 14살부터 20살까지 마을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무조건 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서 결혼한 상태나 다름없는데…”라는 장 할머니의 애원에도 소용이 없었다. 순사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 줄 몰랐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포함해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여성 탄광 노동자들이 석탄을 고르는 모습. | 연합뉴스
▲ 태평양전쟁 시기, 8~20살 여성 12시간씩 중노동
감독관들, 지각하거나 졸면 발길질·매질 등 학대
며칠 후 장 할머니는 마을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춘천에 있는 한 공장에 도착했다. ‘돈도 벌면서 공부도 하는 곳’이라고 들었지만 실상은 일본군이 입을 방탄복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장 할머니는 이곳에서 매일 새벽 6시부터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지각을 하거나 작업 중 졸면 ‘선생님’이라 부르는 감독관으로부터 여지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식사는 쥐꼬리만큼 지급됐다. 장 할머니는 매일 잠들기 전 엄마를 그리며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기숙사는 작업장 바로 옆이었다. 늘 ‘선생님’들이 지켜보고 있어 언감생심 도망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쩐 일인지 문밖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장 할머니는 친구를 깨워 공장 문밖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고향집 앞에는 이미 일본 순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 할머니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다시 트럭에 태워져 공장으로 되돌아갔다. ‘선생님’들은 장 할머니의 옷을 벗기고 심한 매질을 했다. 장 할머니는 머리카락을 강제로 밀린 뒤 청소 등 원래 작업 외에도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했다. 공장 내에는 ‘도망은 죽음보다 못하다’는 말이 퍼졌다. 2년 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야 장 할머니는 다시 공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경북 예천에 살던 김모 할머니(80)가 인천의 광목 직조 공장으로 끌려간 것은 겨우 9살 때였다. “공부시켜주겠다”는 동네 어른의 말을 믿고 따라간 김 할머니는 순사에게 이끌려 역시 공장으로 향했다. 군복 제작에 필요한 실을 생산하는 곳으로 공장 내부 습도는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켜주는 반면 색이 바래지 않도록 빛을 차단했다. 폐결핵에 걸려 기침을 내뱉는 동료들 틈에서 꼬마 김 할머니는 부지런히 실을 지었다.
의자와 선반, 공장의 기계는 모두 성인을 기준으로 돼 있었다. ‘9살 꼬마’가 기계라도 돌리려면 의자에 별도의 받침대를 놓고도 한껏 발을 뻗어야 했다. 손발이 항상 아팠다. 해방 이후 김 할머니는 한쪽 눈 시력을 잃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작업 중 피로를 이기지 못해 졸다가 ‘감독 선생님’이 실 뽑는 꼬챙이로 눈을 찔렀던 탓이다.
14살에 경북 경주에서 서울 영등포 소재 방직공장으로 끌려온 이모씨는 낮에는 공장일을 하고 밤에는 공장 관리자로부터 ‘위안부’ 역할을 강요당했다.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씨는 1년 만에 해방돼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몸이 아파 앓아눕다 얼마 되지 않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