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04 22:07:21ㅣ수정 : 2013-10-04 22:07:21
- “일본인들 썩은 감자 주고 매질… 난 사람 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 광주 |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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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칠하던 페인트가 눈으로 뚝뚝 떨어졌지요. 닦으려고 잠시 작업을 멈추면 감시 반장의 구둣발이 날아왔습니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4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204호 법정. 양금덕 할머니(82)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다.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할머니는 69년 만에 근로정신대 첫 법정증언을 위해 다른 피해자 5명과 증인석에 섰다.
양 할머니는 법정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1944년 미쓰비시 중공업의 실상을 털어놨다. 전남 나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14살 소녀는 그해 5월 “중학교도 다닐 수 있게 해주고 교사만큼의 월급도 준다”는 교장과 일본 헌병의 말에 손을 들었다. 친구 10명과 여수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들어갔다.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4일 광주지방법원 204호 법정에서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진술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강현석 기자
▲ 적금한 돈 보내준단 말 믿고 귀국
68년 세월 지났지만 감감무소식
“위안부 출신” 오해에 가족 고통
하지만 당시 전투기를 만들던 그곳은 소녀의 상상과 거리가 먼 ‘죽음의 공장’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시간의 강제노역이 계속됐다. 먹을 것은 썩은 감자와 보리를 조금 섞은 밥. 된장국과 매실 장아찌 2알, 단무지 2조각이 번갈아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소녀들은 일본인이 먹고 버린 잔반을 몰래 주워 먹었다. 책은 구경도 못했고, 밤마다 울려대는 공습경보에 반공호로 대피하다 보면 날이 밝기 일쑤였다. 10월에는 공장이 지진으로 무너져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친구 2명이 숨지기도 했다.
양 할머니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지만 ‘월급은 적금해 두고 있다’는 회사의 말은 믿었다”면서 “해방이 되자 ‘집에 돌아가 있으면 주소를 아니까 적금한 돈을 보내주겠다’는 말을 믿고 귀국했다. 그랬던 것이 68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양 할머니가 눈물을 보이자 진술을 기다리던 이동련 할머니(83)가 갑자기 구토 증세를 호소했다. 평소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법정에 나온 이 할머니는 “긴장을 해서 그런지 토할 것 같다”고 했다. 진술은 듣던 광주지역 고등학교 역사모임 ‘역사행동’ 민희진양(송원여고 2년)은 “할머니들께 힘이 돼드리고 싶다”며 울먹였다.
귀국 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돌아왔더니 다들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한 줄 알더라. ‘저 처녀는 위안부로 갔다왔다’는 말에 가족·형제들이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정부에 대한 서운함도 역력했다. 할머니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우리가 못 받은 돈을 정부가 대신 받아 도로를 놓고, 공장을 짓는 데 써서 나라를 발전시켰으니 이제 정부가 돌려줘야 한다. 딸이 이제 대통령이 됐으니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1시간 동안 5번씩이나 눈물을 훔치며 아픈 과거를 들춰낸 양 할머니는 광주지법 민사12부 이종광 재판장을 향해 “판사님 우리 사정을 알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일본으로부터 사죄를 받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릅니다”라는 말로 진술을 마쳤다.
재판부는 양 할머니 이외에도 이 할머니와, 박해옥(83)·김성주(84) 할머니, 김중곤 할아버지(88)의 증언도 들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대신해 나온 변호인은 별다른 반대신문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각각 2억원씩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선고공판은 11월1일 오후 2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