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베트남을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께 드리는 런 아저씨 이야기
일시13.09.08 13:04 | 최종 업데이트13.09.08 13:04
송필경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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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불구가 된 '런' 아저씨가 증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송필경

"저는 올해 62세입니다. 그 일은 15살 때 있었습니다. 새벽 5시 쯤 우리 마을 사방에서 폭격 소리가 들렸어요. 당시 워낙 폭격이 많아서 집집마다 땅굴을 판 방공호가 있었어요. 우리 식구들은 땅굴로 들어갔습니다. 점차 폭격 소리와 총소리가 우리 마을로 가까워오면서 엄청나게 커졌어요. 동시에 아기 울음소리, 여인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가 땅굴로 들려왔어요. 그러다가 총소리는 우리 마을을 지나면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오후 4시쯤 멀리 있는 마을에서 다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점차 우리 마을 쪽으로 다가 오기에 우리는 다시 땅굴에 들어갔어요. 땅굴로 다가오는 군인들이 '비씨, 비씨(VC, 베트콩의 약자)'하는 소리를 듣고 한국군인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 가족을 발견하고 땅굴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나갔더니 우리를 논두렁 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논두렁에는 우리 마을 25가구 가족들이 이미 끌려 나와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우리에게 조용히 엎드려 있으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를 빙 둘러 쌌어요. 좀 있다가 한 사람이 고함을 치자 총소리가 들려오고 수류탄이 날라 왔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안개가 낀 것처럼 포연이 자욱했어요. 자욱한 포연 사이로 머리가 깨져 뇌수가 흐르는 사람,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오고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의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어요.

그런 가운데 노인들은 자식을 찾고 엄마들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고 살아있는 아이들은 공포의 울음을 울어대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소리들이 포연 속을 채우고 있었어요. 그 때 내 발목 쪽에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순간적으로 일어나 세 걸음 정도 뛰어나갔을 때 수류탄이 터졌어요. 파편이 온 몸에 박히고 나는 기절을 했습니다.

한 밤에 깨어났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집으로 옮겼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는 하반신이 절단 되었고, 누이동생은 머리가 깨져 있었습니다. 누워 있는 데 밤 12시까지 여동생의 비명이 너무나 끔찍이 이어졌습니다.

얼마 있다가 비명이 멈추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동생을 거적에 둘둘 말아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우리 집에 되돌아 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도 거적에 둘둘 말려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기절했습니다. 깨어나니 나는 가족이 없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거두어 키워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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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아저씨가 47년전 베트남에서 한국군들이 양민들을 학살했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 송필경

베트남 중부 지방 대부분은 언제나 무성한 야자수를 빼면 우리나라 전라도와 매우 닮은 느낌이 듭니다. 나지막한 산 아래 펼쳐진 너른 논과 그 사이를 가로지른 실개천 그리고 드문드문한 마을이 정감 있고 평온하지요.

올해 3월 27일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진료지역인 푸 옌성(省) 뚜이 호아에서 버스로 4시간 걸려 빈딘성(省) 떠이손현(縣) 따이빈사(社)에 답사를 갔습니다. 이 지역 역시 우리 전라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베트남 주민의 증언과 자료에 따르면, 1966년 2월 중순 3일 동안, 우리나라의 면에 해당하는 따이빈사 15개 마을에서 1700여 명의 주민들이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마을에서는 한 시간 만에 380명 전원이 죽임을 당해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힙니다.

우리에게 '그 일'을 증언하신 런 아저씨는 온 몸에 파편이 박혀 기절한 다음 살아남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난 이후 47년간 누이와 어머니의 비명은 자신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파편 가운데 어떤 것은 살과 뼈 속에 파묻혔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핏줄 속에 맴돌며 통증을 멈추지 않게 하고 있어 런 아저씨는 그 일을 도저히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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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따이빈사 고자이 마을에 있는 모자이크 벽화. 한국군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모습을 그려 놓았다.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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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따이빈사 고자이 마을에 있는 모자이크 벽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윤간한 뒤 불태운 모습을 그려놓았다. ⓒ 송필경

따이빈사 고자이 마을에는 큰 위령비가 있고 그 뒤에는 모자이크로 만든 그림 벽면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한 '그 일'의 기억을 담아 놓았습니다.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총 쏘고 수류탄 던지고, 여자를 윤간한 후 불태우고...

47년 전 '그 일'을 증언하신 런 아저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다시 진료지 숙소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통곡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을 저미게 했습니다. 그 수많은 원혼의 파편은 내 몸 구석구석 감돌아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왜 죽임을 당했을까요?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토록 끔찍한 학살을 당해야 했는가요?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두려운 행위이며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야만입니다.

일제는 만주에서, 백두산에서 조선인들을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남한 민중들을 일제에게 배운 대로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서로가 상대방의 생명을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치른 우리의 베테랑들은 광주에서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명백한 잘못을 바라보게 할 때 후안무치한 미소를 짓는 일본을 닮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참회하며 무릎을 꿇은 독일을 닮도록 할 것입니까. 실로 우리가 스스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기억을 왜곡하고 죄악을 미화하는 일본의 역사관을 천박하다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요? 세계사 무대에서 정의와 도덕을 운운할 수 있는까요? 과거에 대해 애써 눈을 감는다면 미래에 밝은 빛을 볼 수 있을까요? 기성세대가 과거사를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 젊은이의 역사 윤리는 건강과 파멸의 경계선에서 그 방향을 달리할 것입니다.

한국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증오심을 평생 간직한 런 아저씨는 한국에서 이렇게 멀리 찾아 준 우리를 다정하게 맞아 주시고 마지막에 이렇게 신신당부 했지요.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발. 한국 사람들을 남조선 사람이니 북조선 사람이니 구별하지 하지 말고 그냥 조선 사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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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회원들은 지난 3월 27일 베트남 따이빈사 고자이마을에 있는 위령비를 찾아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 송필경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송필경 기자는 치과의사이며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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