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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충남 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한 1980년 당시까지만 해도 논산훈련소 담장을 넘으면 이른바 '담요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훈련병이었던 기자가 '담요부대'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소 조교나 기간병들은 자신들이 '담요부대'와 조우해 '격전'을 치른 '무용담'을 곧잘 얘기하곤 했다.

'담요부대'는 훈련소 담장 밖에서 담요 한 장을 '무기' 삼아 훈련병들을 상대하는 창녀들의 속칭. 이런 이동식 사창 형태의 담요 부대원 이야기는 미담이나 신화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군이 직접 위안부대를 설치해 운용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한국군의 한국전쟁 기간 '위안부' 운용 사실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굵은 선내)
지난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는 발굴기사의 첫 회분이 보도된 이후 독자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군의 어두운 치부를 공개하고 반성하자는 것. 둘째, 구(舊)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제도와는 다른 공창(公娼)이므로 불법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공창이건 사창이건 군이 전시(戰時)에 사기진작을 위해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것이다. 이 2회분 기사는 주로 그 두 번째 반응과 직결된 답변을 담고 있다.

이 발굴기획 기사의 첫 회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군이 1951년 무렵부터 1954년까지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혹은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식기록인 <후방전사(後方戰史)>(인사편)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후방전사>에 실린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는 1952년도에 4개 소대로 편성된 위안대 89명이 연간 20만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한 것이다. 또 채명신·차규헌·김희오 등 예비역 장군들도 한국전쟁 기간에 경험한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군부의 치부이지만 사실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한국군 위안부 제도는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흔적에도 불구하고 두 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군 위안부는 위안부 동원방식이나 규모 등에서도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비교가 안되지만, 무엇보다도 후자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국가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 같은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위안대는 설치 동기나 운영 방식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내 비슷한 모습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지어 위안부를 기다리는 군인들과 전투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하는 군의관의 모습 등은 일본군 종군위안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 군표(일본군) 대신에 티켓(한국군)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된 점도 외형상으로 비슷한 모양새이다. 일본 우익은 이를 내세워 군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것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표는 일본의 주요 은행들이 언제든지 돈으로 교환해주는 일종의 '유가증권'이었다. 또 공창제가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한 경우라면 위안소의 경우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군이 관리·운영의 주체라는 점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당시 국군이 설치해 운영한 이 '특수위안대', 즉 고정식 위안소의 성격이 사실상의 공창이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군의 공식기록에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 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順命)하여 단기 4287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후방전사> 148∼149쪽)고 되어 있다. 군 스스로가 '특수위안대'를 공창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檀紀)를 서기(西紀)로 환산하면, 위안소를 '일제히 폐쇄'한 시점은 1954년 3월이다. 그런데 1947년 11월11일 미 군정청이 공포한 공창폐지령(법률 제7호)이 발효된 시점은 1948년 2월부터이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위안소 설치 시점은 1951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군은 공창폐지령에도 불구하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약 3년간 불법으로 공창을 설치·운영한 범법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결국 군이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해 위안소를 폐쇄했다'는 기록은 얼핏 보면 사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군은 정부의 공창폐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공창을 3년 동안이나 불법으로 운영했으면서도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해 폐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군 위안소를 설치·운영하는 범법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국군의 '위안대' 운용 사실을 처음 제기한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는 <후방전사>와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련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렇게 주장한다.


"'특수위안대', 즉 군 위안소는 육군에 의해 설치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체계상 군 위안대의 설치 및 관리문제에 대해 위로는 유엔군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래로는 특수위안대 부대장의 책임 하에 총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군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1950년 7월 한국 정부가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방전사>도 밝히고 있듯이, 위안소 운영은 전선이 아닌 후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 위안대 설치는 작전지휘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유엔군의 최종 승인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와 육군의 수뇌부는 이와 같은 불법행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국방부에 합동참모회의가 설치된 시점은 '특수위안대'를 폐쇄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54년 2월이므로 합참은 위안부 설치·운영의 계선 상에서 제외된다).

▲ 정일권 전 육군 참모총장.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특수위안대'를 군에 설치한 불법행위의 핵심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점의 역대 육군 참모총장은 △5대 정일권 중장(1950. 6∼1951. 6) △6대 이종찬 중장(1951. 6∼1952. 7) △7대 백선엽 대장(1952. 7∼1954. 2) △8대 정일권 대장(1954. 2∼1956. 6) 등이다. 1951년으로 추정되는 설치 시점으로 보면 정일권·이종찬 두 총장 중 한 사람이다.

1948년 창군 당시의 군 수뇌부 인맥이 대부분 일본군·관동군 출신이었지만, 두 총장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다. 한국전쟁 시절에 위안부 제도를 목격한 김희오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의 "과거 일본 군대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 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증언은 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김귀옥 박사도 "군 위안부 창설의 기획자가 분명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자이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자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힌다.

군 관계자들은 이종찬 총장이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군의 정치적 중립을 역설한 '참 군인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온 점에 비추어 일단 정일권 총장 쪽에 군 위안대 설치·운영 가능성의 비중을 크게 둔다. 한편 당시 국방부장관 중에서는 제2대 신성모 장관(1949. 3∼1951. 5)과 제3대 이기붕 장관(1951. 5∼1952. 3) 중 한 사람이 설치를 승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일까. 그런데 기존의 자료 어디에도 위안부 정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귀옥 박사에 따르면, 다만 몇몇 문헌에서는 적지 않은 귀환 일제 군 위안부들이 한국전쟁 당시 성(性) 매매업으로 흘러들어 갔으리라는 경험적 진술에 따른 추정만 있을 뿐이다. 1996년부터 속초에서 월남민 연구를 하면서부터 처음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온 김 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위안부의 정체와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뉜다.

김 박사가 우선 주목한 것은,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모집 형태를 쏙 빼 닮은 형태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북파공작원과 위안부의 '불행한 만남'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박사가 밝힌 이 첫 번째 유형은 납치와 강간에 의해 '위안부'가 된 사례이다.

문아무개(69)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 앞 바다에 있는 섬에서 다른 여맹원 3명과 함께 모여 있다가 당시 원산 앞 바다의 여도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던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그중 한 명(이아무개 하사관)에게 겁탈 당한 후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케이스.

문 씨는 결국 1953년 7월 정전이 될 때까지 여도에서 이하사관의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 함께 납치된 다른 여성들도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인근 양도에서도 있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문씨를 납치한 북파공작원 최아무개 씨는 "부대 내에 위안부를 데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가 '일본군'과는 다르지 않느냐, 우리와는 정이 통하지 않느냐며 납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설명을 흐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본대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취사생활을 해야 했던 북파공작원 부대원들이 '위안부'를 고용한 케이스. 김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북파공작원 1은 군 위안부들은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었다고 일축했다. 북파공작원 2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북파공작원 1이나 2가 있던 원산 앞 섬에 위안부로 온 여성은 '그 섬에 와 군인들 밥하고 빨래해주면 한 밑천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왔다고 공작원 2는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군 노무자'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 위안부가 된 것은 거절할 수 없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납치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나 거절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 간호원 2명. 당시 체포된 북한 여성의 일부는 강간당하거나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1950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아무개(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협력한 것 때문에 국군에게 체포된 이 씨는 다른 여자 의대생 3명과 함께 인계된 부대의 장교 4명에게 '배정'되었다. 이 씨는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한 장교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3명은 그때 이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사실상의 군 '위안부' 노릇을 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일부 등장한다. 1951년 8월 육군 소위(종합31기)로 임관해 1984년 8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2000년)가 그것이다.

1951년 8월 임관하자마자 동부전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에 배속되어 향로봉 전투에 참가했던 김희오 장군이 당시에 이끈 소대원들은 대부분 수도사단이 함경도에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 철수작전시에 대동(帶同) 월남한 주로 함흥-원산지역 고교 출신의 현지 입대 청소년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군은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여고생들도 '특수 목적'으로 대동 월남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여성 납치해 '위안부'로 이용하기도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 전선을 빠져 나온 수도사단은 1951년 11월~1952년 4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당시 남원에 위치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주력부대로 8사단 등과 합동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소대장 시절 토벌작전 도중에 지리산의 전투지역 지휘소에서 목격한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대장 천막 속에서 분명코 전투복을 착용한 소녀 한 명이 나와서 기지개를 펴고 체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임하사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대대장께서 북진 당시 함흥 여고생을 애첩으로 동반, 철수하여 작전기간 중 순천에 모셨다가 최근 OP로 동반하였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대대장실에서 세숫물 대령 지시가 있었는지 당번병이 반합으로 물을 데워 가져가고 있었다."


▲ 한국전쟁 직전에 당시 38선 이남인 옹진반도를 방문해 여학생들의 영접을 받은 유엔 현장시찰단.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미군과 한국군의 일부 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일부 여학생들을 '특수목적'으로 대동 월남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장군은 당시 행군할 때 솜이불 침구와 여자 화장품 상자가 전투 소대원의 대열 속에서 배낭 위에 덤으로 얹혀 가는 슬픈 현실을 목도하고 분노했지만,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납치는 사실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앞서의 이아무개 씨와 국군 출신으로 인민군 해방전사가 된 비전향장기수 양정호 씨나 다른 국군 출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엔군과 국군은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동안 상당수의 민간 여성들을 겁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귀옥 박사는 이렇게 추정한다.


"특히 좌익 부역혐의가 있는 젊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실제 및 가상적에 대한 통제 및 순치 방식의 하나였다. 비공식적으로 1950년에도 군 위안부나 위안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군의 풍기 문란을 우려하여 1951년 이후 군 위안대를 공식 창설했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비정기적으로 군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민간인 강간과 납치에 의해 이미 '위안부' 생활을 경험한 여성들의 상당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창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군 위안부'라는 공창으로 편입되는 악순환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유형은 사창가에서 사들여온 가난한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여성들에 대한 '위안'의 대가는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지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전시 하에 특별위안대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도 전방의 부대들은 필요시 군 위안부를 채용할 수 있었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귀옥 박사는 군 당국이 밝힌 위안대 폐지 시점에 대해서도 다음과 문제를 제기한다.


"군부대가 공식 운영했던 공창으로서의 위안대는 1954년 3월에 소멸했는지 모르지만, 북파공작원의 증언에서는 사실상의 위안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 위안대는 사창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군부대가 공식적인 '후생비'의 명목으로 지출하고 북파공작원에 대한 포상의 형태로 존재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김귀옥 박사는 "현재로선 한국전쟁 당시 공식·비공식적 위안부 규모를 알 길이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전쟁 직전 사창의 규모를 능가할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고 말한다.

▲ 한국전쟁 기간 후방에서 진행된 '쥐잡기 작전'(공비토벌작전)에서 생포된 여성 게릴라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47년 11월 미 군정청이 공창폐지령을 발표하기 직전인 1947년 10월20일 현재 공창의 규모는 2124명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공창폐지령이 발효된 후인 1948년 10월말이 되면 사창은 5만여 명으로 급증한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성 매매를 하는 여성은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공창이 폐지되면서 사창은 급증한 것이다.

일부 여성학자들은 이처럼 성 매매 여성이 늘어난 데는 생활고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수천 명의 위안부들이 해방 이후 고국에 들어와 생계를 잇지 못해 창기로 전락'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민간 여성들이 납치와 강제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던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 박사의 지적이다.

"만일 한 발 양보하여 군 위안부가 과거 공·사창 출신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전전(戰前) 5만여 명의 공·사창이 전후 30여만 명으로 늘어난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설명되지 않는다. 군 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되었으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확실히 규명할 수는 없더라도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군부 책임을 맡았던 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정부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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