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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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 |
지정번호 | 국보
제1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29) |
제작시기 | 조선 초기 |
소유자 | 국유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1]
보통 남대문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이름은 숭례문을 만들 때 부터 불린 이름이다. [2]
1396년
(태조
5년)에 창건되었다. [3]
1447년
(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판에 관해 이설이 많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4]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
화재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현재는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되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운 상태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2년
말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2013년 초에 완공된다고 발표하였다.
목차[숨기기] |
[편집] 역사
-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 (1479년)에 중수. [6]
-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7] 또한 이 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8] 이 사건으로 현 모양이 확립되었다.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9]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0]
-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11]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12]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13]
-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14]
-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15]
-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편집] 특징
숭례문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편집] 숭례문 현판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17]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이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해당 결실편을 현장에서 95%정도 확보함에 따라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리한 편액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이송 후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함과 동시에, 그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응급조사 및 자문결과를 기초로 과학적 상태조사(X선,
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부분의 접착복원 등 숭례문 현판의 정밀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며 처리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예정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
5월
말에 복원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18]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 [18],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18]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 [18]했으며, 최고라 일컬어지는
[18]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
[19]했고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18][19]하여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
[편집] 숭례문 방화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입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초기에는 왜 불을 일찍 끄지 못하였나가 주 초점이였다. 하지만 이는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은 물이 닿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계획을 밝히고 현재 복원작업을 진행중이며,
2008년
8월 15일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원현장을 공개했다 [20][21].
[편집] 복원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울타리(일제강점기에 설치됨)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다.
[22]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위에 옛 성곽자리를 표시했다
[23].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현재 막바지 공사중이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24]
[편집] 논란
[편집] 국보 1호 변경 논란
1996년
11월,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 (문화재위원 49명, 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25]
2005년
11월,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으며,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통과하여 철수한 문으로 지적되어 일제 강점기 때 보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6]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었다.
[편집] 변경 반대론
-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다.
- 문화재의 가치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 교체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
[편집] 변경 찬성론
- 남대문은 국보로서 대표성이 없다.
-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부족하다.
- 일제가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편집] 쓰레기집하장 강행 논란
2009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중구청에 따르면 서울특별시와 중구청은 집하장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문화재나 옛 성곽 유적이 나오지 않은 점을 확인하고 조만간 공사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사 보고서를
문화재청으로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숭례문 주변의 시설 공사 허가권을 가진 문화재청은 이미 발굴조사를 조건으로 집하장 건립을 허가한 상태다. 이에 중구청은
10월 17일
~ 10월 19일
무렵에 공사를 시작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보 1호가 불에 탄 것도 안타까운데 그 옆에 쓰레기장을 만들겠다니 정말 황당한 발상”이라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다. 일부 네티즌들은 “차라리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
옆에 쓰레기장을 지어라”며 비꼬았다. 이러한 네티즌들의 반응에 대해 중구청 관계자는 “문화재청도 남대문시장의 쓰레기를 처리할 합리적인 방안이란 점을 인정했다”며 “광장을 조성하면 시각적으로도 숭례문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대문시장
일부 상인들조차 “서울시와 중구가 이 땅을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뒤집었다”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커지게 되었다. [27]
[편집] 사진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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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숭례문 - 대한민국 문화재청
- 숭례문 - 민족문화대백과
- 600년 역사, 국보 1호 숭례문 - 국가지식포털 체험학습관
- 숭례문, 무엇이 달라졌나 - 숭례문 복원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연합뉴스 미디어랩)
[편집] 주석
- ↑ 네이버 옛날신문 빈도 참고
- ↑ “우리역사 잘못된 상식 바로잡기”, 《국민일보》, 2008년 10월 17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 ↑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 9월 24일
- ↑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숭례문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써 610년의 역사를 자랑하였다.”
- ↑ 이는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거한 것으로, 일각에서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설이 있음.
- ↑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성벽의 추억”, 2007년 1월 18일 작성. 2007년 8월 26일 확인.
- ↑ “8·15 56돌 / 왜색 여전한 숭례문-日帝돌담에 포위된 '국보1호'”, 《세계일보》, 2001년 8월 6일 작성.
- ↑ 최종호 (2008년 3월 3일). 문화재 재난예방과 박물관 재난대비. 박물관뉴스.
- ↑ “남대문에 덧씌운 '일제 잔재' 올가미를 벗기자”, 《오마이뉴스》, 2005년 11월 10일 작성.
- ↑ 남준기. “남대문 ‘국보1호’ 지정은 역사적 수치”, 《내일신문》, 2005년 11월 8일 작성.
- ↑ “「서울의 상징」 남대문이 1위/「가나아트」지 설문”, 《경향신문》, 1994년 11월 15일 작성.
- ↑ “'남대문 근접 감상' 계획 무산… 문화재委 "안전위협" 불허”, 《동아일보》, 2000년 2월 9일 작성.
- ↑ “숭례문 일제때 파괴될뻔 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 작성.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주장하였다.
- ↑ “숭례문 활짝 열렸다-99년 만에 중앙통로 개방...3일부터 출입”, 《경향신문》, 2006년 3월 1일 작성.
- ↑ “‘국보1호 원형’ 훼손 부재 재활용에 달렸다”, 《경향신문》, 2009년 2월 3일 작성.
- ↑ 전진식. “양녕이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 《한겨레》, 2008년 2월 12일 작성.
- ↑ 이광표. “숭례문 현판 왜 「세로쓰기」일까”, 《동아일보》, 1998년 4월 7일 작성.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문석. “복원된 숭례문 현판”, 《YTN》, 2009년 7월 3일 작성.
- ↑ 가 나 문화재청. “‘숭례문 현판’ 옛 모습 되찾다”, 《문화재청》, 2009년 7월 3일 작성.
- ↑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현장 공개관람 실시”, 《연합뉴스》, 2008년 8월 11일 작성.
- ↑ 한채호. “숭례문 복구현장 일반공개 시작”, 《노컷뉴스》, 2008년 8월 15일 작성.
- ↑ 숭례문 복구현장서 지하벙커 발견…철거 결정《SBS》2008.08.06 17:51
- ↑ “숭례문-옛 서울 성곽 자리 도로바닥 그림 형태로 되살려”, 《쿠키뉴스》, 2008년 8월 14일 작성.
- ↑ “숭례문, 화마가 남긴 상처 딛고 우뚝 서다”, 《연합뉴스》, 2013년 4월 1일 작성.
- ↑ “시민·학생 상반의견/국보 1호 어떻게 할것인가”, 《한국일보》, 1996년 11월 23일 작성.
- ↑ 김태식. “국보 1호 남대문 그 영광과 비애”, 《한겨레》, 2005년 11월 8일 작성.
- ↑ “숭례문 옆 지하 쓰레기집하장 ‘시끌’”, 《경향신문》, 2009년 10월 12일 작성. 2009년 10월 12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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