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을 대파한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만주지역에 대한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를 병력 진입의 구실로 삼은 뒤,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한편 1920년 2월,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잠시 머무르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소비에트 적군과 적백내전의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서둘러 무기를 팔고자 하였다. 이 때 독립군은 독립선언 이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여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게 되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으로부터 사들인 무기인 200정의 권총, 기관총, 탄약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하였다.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대한독립군 또한 봉천성의 경계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도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뒤,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하여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다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와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오후 늦게부터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 명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자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 부대의 일부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 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곧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하여 역습을 감행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뀐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엿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가서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명을 내었다[1]. 일본측 통계와 한국측 통계가 다른데, 한국측에서는 김승학이 나중에 소문만 듣고 낸것이다. 참고로 그는 전투 지역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상하이에서 살고 있었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하여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 김훈, 백종렬, 한건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 등이었다.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 광복단, 의민단, 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러시아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 자유시 참변에 휘말려 대규모의 피해를 입는다. 아래에 설명한 논쟁 때문에 전과는 차치하고서라도, 독립군은 이 전투 이후 1920년대에 제대로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으며, 만주사변으로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여한 1930년대 이후에도 외국군에 크게 의존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 독립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인 셈.
인터넷 청산리 전투 ¶
과거 인조이재팬시절, 인조이재팬을 순식간에 배틀 아레나로 만든 분기점이 있었으니 '청산리 전투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의 기존 사관을 공격했는데, 해당 대외비 문서에는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의 총포를 노획'이라 되어있고 그만한 인원이 죽었는데도 모든 전사자들을 올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으며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카토우 연대장이 멀쩡하게 살았었음을 들어 한국측을 공격했다.
또한 3000여 명이나 죽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던적, 결과가 부풀려졌다고 말한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 나왔다는점,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다고 하는 점,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의 기존 사관을 공격했는데, 해당 대외비 문서에는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의 총포를 노획'이라 되어있고 그만한 인원이 죽었는데도 모든 전사자들을 올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으며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카토우 연대장이 멀쩡하게 살았었음을 들어 한국측을 공격했다.
또한 3000여 명이나 죽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던적, 결과가 부풀려졌다고 말한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 나왔다는점,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다고 하는 점,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의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고있던 한국인까지 합세했는데, 그들은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인 점[2],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계속해서 줄어드는점, 그리고 청산리 전투의 전과라고 되어있는 일본군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진이 실은 청산리 전투 당시의 사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한국인들을 공격하며, 독립전쟁의 사기 고취를 위해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당시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또한 기존의 사관으로 일본인들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이 시기 서울대학교의 이태진 교수가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대패했다는 소문까지 퍼져 나가며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국내 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국내의 일빠들도 이에 물타기에 들어갔고, 한동안 한국 역사 사이트는 이에 대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고람거사'는 기존에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것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측의 승리로 여겨질 뻔 했으나, 다음날 일본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고람거사는 일본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일본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이었는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와 '사망자'를 혼동한 데서 나온 해프닝이었다.[3]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의 패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패배한 사례로써, 한국 인터넷 역사계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청산리 대첩 건은 한일 인터넷 역사대결에서 명백하게 당한 패배였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에 대해 언급하면 이를 금기로 다루거나 패배감에 젖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람거사'는 기존에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것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측의 승리로 여겨질 뻔 했으나, 다음날 일본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고람거사는 일본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일본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이었는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와 '사망자'를 혼동한 데서 나온 해프닝이었다.[3]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의 패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패배한 사례로써, 한국 인터넷 역사계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청산리 대첩 건은 한일 인터넷 역사대결에서 명백하게 당한 패배였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에 대해 언급하면 이를 금기로 다루거나 패배감에 젖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 역사 사이트에 단순한 회의가 아닌 쇄신의 필요성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전의 교과서를 기본으로 하는 사관과 엄격한 사료 비판을 통한 논쟁에 대한 경험 부재가 인조이재팬에서 벌어지는 연이은 참패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왔고, 10 ~ 20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는 달리 일본측은 30 ~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 또한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 갤러리가 붕괴하고 이후의 역사 사이트들은 분화, 군소화되면서 이러한 논쟁의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못했으며 때문에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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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에는 독립군측 사상자가 사망 60, 부상 90으로, 일본측 사상자가 3,300여 명에 일본측 통계에 따른 사망자가 81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2] 위에도 표기된 박은식의 3300명 설이 근거도 출처도 없다고 깠다. 단, 이는 일본측의 사료도 마찬가지였고, 이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다.
[3] 당시 고람거사는 일본 국회도서관의 자료를 직접 요청했다면서 의기양양했지만 패배 이후 실제론 학교 선배의 논문에 인용된 내용을 보고 주장했다는 점을 실토했다.
[4] 양측 피해 상황을 따지기 전에 일단 감안할 것. 독립군이 피해가 크지 않았다면 왜 퇴각했겠느냐는 주장이 있지만,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만주에 대한 토벌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번 이겼다고 계속 싸우는 건 말이 안 되는 처사였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남의 나라 땅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토벌 작전을 치르는 무리수까지 둔 것은 당시 독립군이 일본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뿌리 뽑아야 할 존재였음을 짐작케 한다. 3.1 운동이 벌어지고 한국인의 민족 의식이 높아진 시기였고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이 반토막 이하로 와해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제강점기 중 독립군의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때가 이 시기였던 것도 확실하고.
[5] 신용하 교수는 논문에서 패전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청산리 전투가 부풀려졌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양쪽 모두 수치가 들쑥날쑥한 상태라 어느 쪽을 신뢰하기가 힘든 상황이나, 일본군 자료에서도 사상자가 어느 정도 확인되고 독립군에서도 수천 명까지 수치를 발표하면서 홍보한 것을 볼 때 일본군도 소규모나마 피해가 나오지 않았나 추정해볼 수 있고, 비정규군과 정규군의 전면 전투에서 사실상 비정규군이 전과를 내는 것 자체가 힘듦을 감안해볼 때 청산리 전투가 가치가 없는 전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후퇴하는 상황이었고, 어느 정도 체계를 유지한 채 러시아 근처까지 퇴각하는 데 성공한 것을 볼 때 일본군 입장에서 성공한 전투라고만 보기도 힘들다. 물론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아예 토막나 버리면서 별 소용이 없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