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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홍신 |
[편집자 주] 이 글은 (사)한국작가회의 회보에 ‘만리장성과 동북공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회보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만 볼 수 있는 소식지여서, 일간문예뉴스 [문학in]에 실어 여러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종이 한 장을 주고 세계지도를 그리라고 하면 한국인 어느 누구인들 한반도를 정중앙에 그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나 자존심에 대해서는 스스로 구석, 변방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구석콤플렉스, 변방 콤플렉스의 원천은 우리의 역사인식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선생님의 가르침은 ‘우리민족은 착하고 예의범절을 중시해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쳐들어 간적이 없는 순결한 백성’이란 내용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서기 732년, 발해 개국황제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당시 세계 최강국가인 당나라를 쳐들어가 지금의 북경 근처인 마도산까지 함락하고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중국 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를 비롯한 당나라의 사서에 낱낱 명기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수군장수 장문휴가 바닷길로 당나라 요충지인 산동반도를 침공하여 자사 위준을 죽이고 항복을 받았다. 턱밑에 벼린 창검을 들이밀고 옆구리에 궁시가 박힌 형상의 당 현종 이융기는 다급한 나머지 인질로 와있던 신라왕손 태복경 김사란에게 국서를 주어 신라 성덕왕 김흥광에게 황급히 원군을 간청했다.
“발해가 쳐들어와 당나라가 위급지경이 되었으니 짐을 도와주면 기이한 상을 드리겠소.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용맹하다 하니 그를 장수로 삼아주시오.”
나라를 창업한지 불과 34년 만에 최강대국 당나라를 육로와 해로로 동시에 공격한 발해의 당당한 웅지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서기 727년에 발간한 『단기고사』서문의 첫 문장에 잘 나타난다.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 당 장군 소정방과 설인귀가 몹시 원망스러운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국서고를 부수고 『단기고사』와 『고구려·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장편 역사소설 『대발해』전 10권을 쓰는 동안 전율할 만큼 가슴이 뻥 뚫린 것은 우리 민족을 예로부터 동이(東夷)라 했으며 그 ‘이(夷)’가 ‘오랑캐’라는 것에 대한 앙금이 확 풀렸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는 늙어서 예악을 즐기는 군자(君子)의 나라,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夷)’자의 모양은 큰활을 뜻하고 큰 활을 잘 쏘는 사람이 군자인 까닭은 이렇다. 멀리 있는 짐승과 큰짐승을 잡아 백성을 잘 먹이고 먼 곳의 적을 내쫓아 백성을 지켜주는 자가 지도자이자 군자인 것이다.
중국의 한자는 글자 하나에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기 때문에 중국에 유리한 대로 뜻풀이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새 글자를 만들어 중국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전통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국운을 걸다시피 하면서 동북공정을 강행하며 만리장성을 고구려가 축성한 천리장성과 발해가 만든 성곽까지 연결하는 깊은 속사정을 살펴봐야 한다.
중국은 예부터 중국문명의 시원은 황하문명이고 요하문명은 동이문명의 시원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런 중국이 역사교과서를 대대적으로 손질할 수밖에 없는 증거물이 발굴되었다. 중국의 상징이자 황하문명의 핵이라던 한자의 원형인 골각문자가 요하에서 발굴된 것이다. 더구나 양심적인 학자들이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골각문자도 본디 동이족의 문자였다고 공개하여 중국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도 자랑하던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와 장강하류의 하모도문화가 요하문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중국은 요하에서 발현한 예·맥족을 비롯한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를 모두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조작했고 근래에는 치우천황까지 중국의 선조로 둔갑시켰다.
중국은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한자를 내세우는데, 여러 학설 중에 가장 유력한 학설은 삼황오제 중 한사람인 태호 복희 씨와 함께 헌원 씨의 사관인 창힐이 한자를 창제했다는 설이다.
복희씨는 환웅천황 5대손 태우의 아들이고 창힐은 치우의 후예였으니 그리도 자랑하던 한자를 우리 선조들이 창제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중국은 요하문명과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역사로 조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치밀한 동북공정에 막대한 예산과 공력을 쏟을 수밖에 없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역사에 대한 연구를 다양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근자에는 발해역사를 들추지 않는다.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발해자료와 연구업적이 뛰어난 북한은 1991년 1월에 발간한 조선유적유물도감 전 20권에 김일성 위원장이 직접 서명을 했다. 여러해 전에 평양에 가서 발해역사서적을 구입하려고 애썼으나 구할 수 없었다.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친지를 통해 겨우 몇 권을 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은 중국의 억지주장이나 역사조작,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려도 말 한마디 못하고 주눅이 들었을까.
중국이 오로지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과 중국은 위대하고 변방은 어리석고 못났다는 화이사관이 중화민족의 철학이다. 한국은 그 논리에 기가 죽어서 스스로 변방 콤플렉스에 젖어버렸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옹색한 역사인식은 우리민족의 열등감을 확장시킨 것이다.
한국은 북한 때문에 아직도 섬나라 같은 구석의식이 잠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쟁의 공포가 누적되어 중국의 눈치 보기에 익숙해졌다. 또한 중국의 비위를 건들면 한국경제가 휘청인다는 자멸의식도 도사리고 있다.
중국은 만리장성의 길이를 6,300km라고 공식 발표한 지 불과 10년도 안 돼 무려 2만 1196.18km라고 공표했다. 중국은 10리가 5km이기 때문에 이제 만리장성은 4만리장성으로 불러야한다. 그것도 고구려와 발해의 성곽을 모두 포함하는 역사상 최악의 조작극을 벌였는데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정부 발표를 동북공정차원에서 만리장성을 늘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했다. 차라리 하던 대로 기죽은 채 입을 닫을 노릇이지.
빼앗긴 땅에 조상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의 역사로 둔갑하고 있는 위급한 지경에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는 자들의 정신세계는 도대체 어찌 생긴 걸까.
우리가 중국과 주고받던 국서에 ‘하자’는 뜻의 ‘할 위(爲)’자를 후세에 중국이 우리에게 보낸 건 <하라>고 번역하고 우리가 중국으로 보낸 건 <하옵소서>로 번역한 그 속없는 무리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중국의 망나니짓은 그렇다 손쳐도 그걸 저토록 잘 거드는 자들의 조상님들은 과연 누구시온지.
작가 김홍신은 1947년 3월 19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논산에서 자랐다. 1976년 <현대문학>에 ‘본전댁’ 등이 추천 완료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건국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마쳤다. 1990년대 초부터 정계에 나아가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 받음.
주요작품집으로 <해방영장>(1980), <인간시장>(1981~1989) <수녀와 늑대>(1983), <난장판>(1982), <또 다른 늪>(1983), <우리들의 고해성사>(1984), <걸신>(1985), <내륙풍>(1987), <갈등 그리고 또 갈등>(1987), <벌거숭이들>(1989), <대발해>(2007) 등이 있으며, 콩트집으로는 <도둑놈과 도둑님>(1980), <요즘 윗분들>(1987) 등이 있다. 지금 건국대 석좌교수·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선거연수원장.
문학in 글꾼(m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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