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함석헌이 덕일소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용천군에는 11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지역 유지들이 신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립학교들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제의 조선병탄 이후 제정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대부분이 폐교되고 말았다.
함석헌이 네 살 적에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여덟 살 때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2천만 겨레에게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안겨주었다. 소년들에게도 그랬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함석헌은 1912년 이용엽 등 친구 4명과 안중근의 ‘단지동맹’ 대신 잉크로 손도장을 찍은 문서를 만들어 하나씩 나눠 갖고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하였다.
안중근 의사처럼 왜놈들을 물리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어른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심단은 곧 해체되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으로 갈라서 ‘전쟁놀이’를 하던 철부지 아이들의 행동 치고는 유다른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민심이기도 했다.
이 일은 함석헌의 끈질기고 치열한 저항사의 첫 번째 사건으로 꼽아도 될 것이다. 일심단은 해체되고 말았지만, 함석헌의 단심(丹心)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이요 어린애다운 한 웃음거리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이 내 속에 남긴 무엇이 있다. 새파란 잉크를 일부러 불에 쪼여서 내 엄지손가락 인을 찍었던 그 모양이 지금도 눈 앞에 또렷 또렷이 보인다. 이놈의 손가락, 열두 살 때 한맘 바쳐 나라 위해 죽겠다고 내 손으로 인을 찍었던 내 손가락, 일제시대엔 일본 형사가 제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고, 공산시대엔 소련 군인이 또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은 이 손가락, 이 운명의 손가락, 그냥 둘까 잘라 버릴까? 글을 쓰다 말고 이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주석 6)
함석헌이 열 살 때 나라가 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개국 이래 처음으로 국권이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들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대한이라 하면 안 된다. 조선이라 해야 한다. 태극기는 떼어버려야 한다. 일장기 그리기를 배워라. 이제 우리나라 임금이란 것은 없다. 일본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우리를 제 맘대로 한다. 나는 그 ‘흑노망향가(黑老望鄕歌)’란 노래를 들은 일이 있다.
온 세상이 다 재미 없고
늘 슬플 뿐일세
내 늘 원은
내 집에 보내주오.
(주석 7)
열 살 짜리 소년에게도 망국 - 국치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남달리 영민하고 집안이 일찍부터 민족주의사상에 접했던 까닭이었다. 비교적 일찍 개화의 물결을 탄 용천 지역의 정신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2년 뒤의 일심단 사건은 국치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함일형-필자)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하나님…”부르짓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주석 8)
주석
6> 함석헌, <나라는 망하고>, <사상계> 1959년 3월호.
7> 앞과 같음.
8> 앞과 같음.
메세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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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6)
함석헌이 열 살 때 나라가 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개국 이래 처음으로 국권이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들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대한이라 하면 안 된다. 조선이라 해야 한다. 태극기는 떼어버려야 한다. 일장기 그리기를 배워라. 이제 우리나라 임금이란 것은 없다. 일본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우리를 제 맘대로 한다. 나는 그 ‘흑노망향가(黑老望鄕歌)’란 노래를 들은 일이 있다.
온 세상이 다 재미 없고
늘 슬플 뿐일세
내 늘 원은
내 집에 보내주오.
(주석 7)
열 살 짜리 소년에게도 망국 - 국치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남달리 영민하고 집안이 일찍부터 민족주의사상에 접했던 까닭이었다. 비교적 일찍 개화의 물결을 탄 용천 지역의 정신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2년 뒤의 일심단 사건은 국치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함일형-필자)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하나님…”부르짓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주석 8)
주석
6> 함석헌, <나라는 망하고>, <사상계> 1959년 3월호.
7> 앞과 같음.
8> 앞과 같음.
메세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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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7)
열 살 짜리 소년에게도 망국 - 국치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남달리 영민하고 집안이 일찍부터 민족주의사상에 접했던 까닭이었다. 비교적 일찍 개화의 물결을 탄 용천 지역의 정신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2년 뒤의 일심단 사건은 국치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함일형-필자)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하나님…”부르짓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주석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