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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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서울대 교수
근대적 제도의 정비가 일단락 된 이후부터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는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를 제외하고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다. 이는 매우 장기지속적인 경제성장이었다. 또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산액(農産額)의 경우 80%에서 43%로 하락하였으나 공산액(工産額)의 경우에는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국내총생산에 있어 광공업의 비중은 1911년의 4.5%에서 1938년의 18.7%로 증가하였으며, 공장수에 있어서는 같은 기간 동안에 110개에서 6,590개로 늘어났다. 또한 공장노동자의 숫자는 1931년부터 1943년 사이 86,000여 명에서 36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전체 노동자 숫자는 1943년까지 17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경제성장의 동력은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 및 일본과의 수출입이었다. 따라서 공업화의 전형적인 패턴은 일본인 자본과 한국인 노동력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공장수를 보면 1918년에는 965개였다가 1939년까지 4,185개로 증가하였음에 반해, 일본인 공장수는 같은 기간 동안 929개에서 2,768개로 늘어났을 따름이다. 한국인 자본가의 대부분이 비교적 큰 규모의 일본인·조선인 합작회사에 투자·참여하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원문 :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
일제강점기 통계자료 2 of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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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통계청 일차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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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일람
"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 [이영훈 서울대교수]
“1910년 이후는 근대적 통계 자료가 있으나 그 이전은 직접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기 당 소작료 자료, 쌀값 상승을 보여주는 간접적 자료 등을 통해 대체적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 큰 추세로는 18세기를 거치며 1인당 소득이 서서히 떨어지다가 19세기 후반 급격히 감소했다. 1750년을 정점으로 농촌의 장시(場市) 숫자, 인구, 쌀 생산성 등이 일제히 떨어졌고,쌀값이 오르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경제침체의 강한 추세를 발견할 수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의 경제적 변화는.
“침체 일로의 조선 경제가 1900년을 전후해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근대적 시장제도의 정착, 소유권 제도의 정비, 근대적 기업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신탁, 통신, 운수의 발달 등이 뚜렷하다. 식민지 시대를 걸쳐 총 80억 달러의 자본이 유입됐고, 일본인들의 농장과 공장이 생기면서 한반도 지역 단위의 GDP가 상승하고 1인당 GDP와 생활물자 소비량 등이 크게 늘었다. 1920ㆍ30년대 GDP는 연 평균 4% 정도 상승했다.”
-----식민지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나.
“그렇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었다. 19세기 내내 인구가 감소하다가 20세기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인구는 위생이나 전염병 등과도 관련이 있어직접적 경제 자료는 아니나 당시의 경제상황을 추정하게 하는 자료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구는 그 이전의 1,700만명에서 3,000만명(해외 이주300만명 제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한 것이다.”
원문 : [한국일보 2004.04.22] 일제, 조선 근대화에 주력
1930년대 동물원의 모습. 동물원도 일제시대에 즈음해 도입됐다. 서울시민의 최대 나들이 장소였다.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가 창경궁 안에 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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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사진 모음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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