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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대원수 히로히토 - 히로히토 일왕이 1938년 도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백마를 타고 들어서고 있다. 히로히토는 메이지헌법에 따라 군 통수권을 지닌 대원수였다.
이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이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차기 총리 1순위로 꼽히는 민주당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정조회장은 "덴노(天皇·일왕)는 국가원수"라고 주장했다. 일본 패전 이후 미 점령 당국의 통치 필요에 따라 살아남은 '천황제'는 일본의 보수화 내지 극우화를 부추기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일본은 종전(終戰) 67년간 진심으로 자신들이 전쟁 중 저지른 악행(惡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반면 독일은 2차대전 패전 후 전범들의 책임을 철저히 물었다. 독일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 악행에 대해 사과했고, 최근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잡일을 했던 사람의 후손들까지 이 사과의 대열에 동참했다.
오는 29일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경술국치 102년째 되는 날이다. 일왕의 전쟁 책임을 짚어보면서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이 독일과 다른 길을 걷게된 과정을 규명해 본다.
"짐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짐의 육해군 장병에게 전력을 다해 교전에 임하고…."
1941년 12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칙을 내보냈다. 식민지 조선에는 징병과 징용, 일본군위안부의 출현을 알리고, 수천만 명의 아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태평양전쟁 개전 조칙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75년 인터뷰에서 "전쟁 개시 때는 이미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고 나는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본 헌법의 조항에 합치된다고 믿는다", "전쟁 종결 당시 내 스스로의 뜻에 따라 결정했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부인하면서, 전쟁을 끝낸 평화주의자로 행세한 것이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군(軍) 통수권을 행사하는 대원수(11조)이자, 대신의 보필을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권력자(55조)였다. 선전포고 또한 헌법상 일왕에 속한 권한이었다. 해군 시종무관 조 에이이치로(城英一郞)는 개전 조칙을 발표하고 진주만을 공격한 이날 히로히토 일왕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정리한 일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하게 배알을 받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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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 일본은 최근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있다.
전쟁을 끝낸 평화주의자 히로히토의 이미지도 사실과 다르다. 패색이 짙던 1945년 2월 14일 히로히토는 전쟁 종결을 위해 직접 나설 것을 권한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의 제안을 "(전쟁 종결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히로히토는 같은 날 "이 전쟁은 최선을 다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지만 그때까지 국민이 이렇게 버텨줄지, 그것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로히토 일왕은 1931년 9월 중국 침략의 서막을 연 만주사변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내각의 동의 없이 군사 행동에 나선 관동군을 제지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 주의하라"는 말만 했다. 히로히토는 다음 달 요충지인 랴오닝성 진저우(錦州) 폭격을 재가했다. 1차대전 후 처음 실시된 도시 폭격이었다. 히로히토를 섬긴 나라 시종무관장은 히로히토가 "진저우 부근에서 장학량의 군대가 재조직될 경우 사건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혹시 필요하다면 나는 사건이 확대되는 데 동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포로 학대와 독가스 사용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히로히토 평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햄튼대 교수는 히로히토가 일본이 1929년 전쟁포로 학대를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조인했음을 알면서도 대량 학살과 포로 학대를 방지하도록 군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37년 9월 11일자로 참모총장을 통해 화학병기 특수부대를 상해에 배치하는 명령을 내렸다. 1938년에 접어들자 중국과 몽골 주요 전투지역에서 대규모로 독가스가 사용됐다. 허버트 빅스는 "독가스는 중일전쟁 기간 내내 히로히토·대본영·통수부가 철저히 관리했던 무기"라며 "통상 일왕의 재가가 내려진 다음 참모총장 지시가 발령돼, 대본영 육군부를 통해 현지군에게 보내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