拾栗大會(습률대회)를 開催(개최) ! [동아일보 1937년 9월 19일 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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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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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의 조선사회는 그 이전 이씨 왕조의 조선시대에 비해서 경제 성장, 치안, 교육 등에서 큰 진보가 있었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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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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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물리학과 졸/국제경제학 박사/SK Telecom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對北라디오 방송 ‘열린북한방송’/(사)열린북한 대표/새누리당 의원(現)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20년 전의 87년 민주화 운동이나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실감을 하질 못한다. 하물며 60년도 더 지난 친일문제에 객관적 기준을 판단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필자도 일제시대의 삶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친일파 기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친북파' 문제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싶어 이 글을 쓴다. 친북파 문제와 친일파 문제를 비교해 보면 친일파 선정의 객관적 기준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물론 일제시대 조선사회와 북한을 평면적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우선 일제 치하의 조선사회는 그 이전 이씨 왕조의 조선시대에 비해서 경제 성장, 치안, 교육 등에서 큰 진보가 있었다. 마치 영국 총독부 치하의 홍콩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북한은 경제 성장, 치안, 복지, 교육 거의 모든 분야에서 퇴보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모로 닮은 점도 있다. 일단 수령 숭배와 천황 숭배 체제가 닮았다. 북한의 수령 숭배는 천황 숭배보다도 훨씬 더 강도가 세지만 말이다. 또 일본 군국주의와 북한의 선군정치가 닮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과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는 한국 전쟁을 일으킨 것이 닮았다.
1.일제시대 조선 사람에게 일본은 '조국'이었을까?
아마 이런 차이점과 공통점 이외에 친북 청산과 친일 청산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핵심 논란 지점은 일제시대의 조선 사람들이 일본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느냐의 문제일 것 같다.
필자는 우리 조상들은 일본 제국을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중국의 조선족을 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현재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자신의 조국을 어디라고 생각할까? 한번 물어보라. 거의 100명의 99명 이상은 자신의 “조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자신의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은 구별된다. 중국의 조선족은 언제부터 자신의 조국이 중국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조선족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간혹 몇 사람은 자신의 조국이 북한 또는 한국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8년 직후부터 중국 땅에 살던 모든 조선족이 자신의 조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조국은 중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을 것이다. 특히 중국 건국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거의 100% 자신의 조국은 중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인들도 처음에는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도 이제는 중국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씨 조선의 백성이라는 것이 잘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시대의 대세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부터 자신은 왕씨 고려의 백성이 아니라 이씨 조선의 백성이라는 데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 순간이 지나갈 것이다.
평범한 민초들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일제시대 때도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조선족처럼 자기 민족은 조선인이지만 조국은 일본 대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을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조국이 일본이라는 데 대해 별 의심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이 다민족 국가인 것처럼 당시 일본 제국은 만주,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합병했기 때문에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조선인들이 일본은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높아졌다. 독립운동을 했던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이 독립을 포기하고 자치 노선을 걷게 되는 것도 한 증거이다. 즉 이들은 황국 신민으로 살아가되, 조선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조선인의 진로를 선택했다. 이런 현상은 현재의 티벳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1959년 중국에 강점된 티벳은 줄곧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1987년부터 티벳은 독립이 아니라 자치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즉 중국의 일부로 살 테니 자치권을 확대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달라이 라마의 노선은 일제시대 이광수, 최남선, 최린의 노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에 강점된 지 28년만에 독립에서 자치 노선으로 돌아선 것처럼 이광수, 최남선 등도 1895년 을사조약부터 치면 약 40년, 1910년 한일합방 때부터 치면 약 30년만에 독립에서 자치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현재 티벳 내부에서도 독립파, 자치파가 분열되어 있다. 티벳청년회의(Tibetan Youth Congress) 같은 단체는 여전히 독립을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혹 앞으로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했는데 미국이 대만을 지지해서 패배하는 상황이 온다면 현재의 중국이 소련처럼 해체될 가능성도 있다. 이 때 티벳이 독립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치파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이 승리할 것 같아 중국편을 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 달라이 라마는 이광수, 최남선이 친일파 낙인을 받았던 것처럼 친중파 낙인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티벳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달라이 라마에게 친중파 낙인을 찍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은 적어도 1930년대 후반이 되면 대부분 자신의 조국을 일본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있다.
2. 친북 청산과 친일 청산의 기준은?
이제 친북 청산과 친일 청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교해보자.
만약 현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북한이 한국으로 흡수통일되면 지금의 친일파 논쟁처럼 친김정일파 또는 친북파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어쨌든 현 김정일 체제에 충성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탄압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과거사 청산 문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편의상 '친북파 청산 문제'라고 하자. 그럼 이 청산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먼저 수령을 찬양한 사람, 즉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한 사람은 친북파로 단죄해야 할까? 이건 아닌 것 같다. 북한 사람들 중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이 사람들 중에 적극적으로 찬양한 사람과 마지 못해 찬양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아마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60년 이상 지나면 일부 후세 사람들이 당시의 신문 자료를 보면서 자신의 필명으로 김일성 부자를 찬양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찬양한 사람이라고 핏대를 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수령제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현실을 동시대 사람들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천황제 시대는 다를까? 현재 북한 수령숭배 문화의 뿌리는 일제 천황숭배 문화라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대동소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천황을 찬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듯하다.
그 다음, 북한의 침략 전쟁, 즉 6.25 남침을 독려하거나 미화, 선전한 사람들을 단죄해야 할까? 물론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등 지도부들은 전범으로 역사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미화, 선전한 언론인, 문학예술인 등도 친북 협력자로 단죄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침략 전쟁을 선전한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인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적극적으로 미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북한을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 전쟁에서 조국을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일제시대 조선 사람들도 민족은 조선족이지만 조국은 일본이었다면 조국이 참가하는 전쟁에 조국을 응원하는 것은 정상참작의 사유가 되지 않을까? 마치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조선족이 중국인으로 대거 전쟁에 참가했듯이 말이다.
일제시대 때 고위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단죄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북한에 있는 고위직도 어떤 사람들은 인민들의 경제생활 향상을 위해 무척 노력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도 있다. 때문에 혹시 미래에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더라도 북한의 고위직 모두를 도매금으로 친북파로 단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북한이든, 일제시대 조선이든 그 국가를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한 사람은 자신의 입신양명 또는 국민에 봉사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통치기구의 고위직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3. 친일파 청산 기준은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이 글의 주제인 친일파 청산의 기준으로 돌아와 천황 찬양과 일본의 침략 전쟁 미화, 그리고 일제통치 기구 내의 고위직 여부가 친일파 선정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면 과연 친일파 선정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북한 같은 경우에 단죄해야 할 대상은 분명하다. 다음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명백히 심판되어야 할 것이다.
1)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戰犯)
2) 북한을 통치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한 직접 당사자들.
일제시대 친일청산 기준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크게 두 부류로 친일 인사들을 선정했다고 한다.
1) 조약체결 등 매국행위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
2)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 식민 지배의 하수인 노릇을 했거나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문화예술인 등.
여기서 을사조약 등 한일합방 과정의 조약 체결을 주도한 사람과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친일파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주도한 전범에 속하는 자도 친일파로 단죄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 통치기구의 일원이었다고 해서 친북파로 단죄할 수 없듯이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단죄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또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천황을 찬양했거나 일본의 전쟁을 미화, 선전한 문화예술인들까지 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발표된 4,776명의 명단 중 90% 이상은 빠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서도 정의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정의의 기준은 엄격해야 한다. 특히 자신들이 살아보지 않은 먼 과거를 평가할 때는 더욱 그렇다. 현재의 친일사전 편찬 작업이 '역사 마녀사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친일파 선정 기준에 대한 좀 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출처 : [하태경 칼럼] ‘친북파 청산’기준 세우면‘친일파 청산’보인다 (DailyNK 2008-05-08)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 조선잡기' 일본 낭인이 본 1893년 조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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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탐기 '조선잡기' 완역 한반도를 무대로 청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 기운이 한창 무르익던 1894년 7월1일, 일본에서는 조선잡기(朝鮮雜記)라는 책이 나왔다. 작자는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필명을 쓴 혼마 규스케(本間久介.1869-1919). 천우협(天佑俠)이라는 우익단체 회원이자 나중에 그 기관지 니로쿠신보(二六新報) 특파원을 역임하게 되는 혼마는 1893년 처음으로 조선을 찾았다.
부산에 체재하다가 경성으로 옮겨 남대문 인근 약방을 거점으로 매약 행상을 가장하면서 경기도, 황해도와 경기도 및 충청도 일대를 정탐한 뒤 도쿄로 돌아가 그 여행담을 1894년 4월17일자부터 6월16일자까지 니로쿠신보에 연재했다. 조선잡기는 바로 이 연재물을 154편으로 정리한 단행본이었다.
그는 왜 하필 이 때 조선을 찾았을까? 1893년 봄에 동학농민군 봉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혼마 스스로는 말한다. 즉, 조선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서 조선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이면서 한국근대사 전공인 최혜주 박사는 당시 조선의 사정과 풍속 전반을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 조선잡기를 통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이룬 문명국 일본이 타자의 시선으로 '미개화'된 조선을 바라보는 '야만과 문명'의 교차점을 읽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증상들이 조선잡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최 박사는 조선잡기 전편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은 "순진함, 무사태평과 함께 불결, 나태, 부패"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혼마에게 '기이한 풍속'으로 다가간 것 중 하나가 조혼. 이르면 12-13세밖에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20살 안팎인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조선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서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는 분석을 곁들이기도 한다.
화폐로는 동전인 공방전(孔方錢) 외에는 통화가 없는 조선인들에게 지폐를 보여주었으나 그 효용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모습을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혼마는 조선의 목욕 문화를 전하면서 조선의 불결함을 부각하기도 한다. 겨울철에 황해도 해주로 갔다가 한달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못해 객사 주인의 안내로 찾은 목욕탕 풍경을 조선잡기는 지옥에 견주었다.
목욕탕이란 곳에서 만난 10명 가량 되는 조선인을 "모두 살이 없어 말라, 이 세상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묘사와 함께 흥미롭게도 당시 조선의 목욕탕이 "옥상에다가 불을 피우고 집 아래에서 열을 뽑는" 방식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혼마는 일본이 어떻게 해야 조선에 대한 청국의 야심을 꺾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에 일본인이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산에는 청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지만 다른 지역, 예컨대 경성에는 일본인이 턱없이 모자란다고 지적하면서 "거류지 인민의 많고 적음은 무엇보다 그 세력의 강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가 하면, "만약 하루아침에 풍운의 변이 이곳(경성)에서 일어난다면 누가 한강을 끼고 한산을 옆에 두어 이 하늘이 준 형승(形勝)을 차지하겠는가"라고 강개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색 짙은 언설 외에도 조선잡기는 불과 1세기 전 조선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대목이 많다. 양산 대신 우산을 쓰고 의기양양해 하는 조선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갓도 벗지 않은 채 싸우는 장면, 서당에서 아이들이 소리 내면서 책을 읽는 풍경, 소금을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 남색(男色)과 창기에 관한 증언도 보인다.
이 조선잡기가 최 박사에 의해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조선잡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처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출처 : [일본 낭인이 본 1893년 조선의 풍경]
원본 : '조선잡기(朝鮮雜記)'
부산에 체재하다가 경성으로 옮겨 남대문 인근 약방을 거점으로 매약 행상을 가장하면서 경기도, 황해도와 경기도 및 충청도 일대를 정탐한 뒤 도쿄로 돌아가 그 여행담을 1894년 4월17일자부터 6월16일자까지 니로쿠신보에 연재했다. 조선잡기는 바로 이 연재물을 154편으로 정리한 단행본이었다.
그는 왜 하필 이 때 조선을 찾았을까? 1893년 봄에 동학농민군 봉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혼마 스스로는 말한다. 즉, 조선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서 조선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이면서 한국근대사 전공인 최혜주 박사는 당시 조선의 사정과 풍속 전반을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 조선잡기를 통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이룬 문명국 일본이 타자의 시선으로 '미개화'된 조선을 바라보는 '야만과 문명'의 교차점을 읽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증상들이 조선잡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최 박사는 조선잡기 전편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은 "순진함, 무사태평과 함께 불결, 나태, 부패"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혼마에게 '기이한 풍속'으로 다가간 것 중 하나가 조혼. 이르면 12-13세밖에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20살 안팎인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조선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서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는 분석을 곁들이기도 한다.
화폐로는 동전인 공방전(孔方錢) 외에는 통화가 없는 조선인들에게 지폐를 보여주었으나 그 효용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모습을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혼마는 조선의 목욕 문화를 전하면서 조선의 불결함을 부각하기도 한다. 겨울철에 황해도 해주로 갔다가 한달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못해 객사 주인의 안내로 찾은 목욕탕 풍경을 조선잡기는 지옥에 견주었다.
목욕탕이란 곳에서 만난 10명 가량 되는 조선인을 "모두 살이 없어 말라, 이 세상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묘사와 함께 흥미롭게도 당시 조선의 목욕탕이 "옥상에다가 불을 피우고 집 아래에서 열을 뽑는" 방식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혼마는 일본이 어떻게 해야 조선에 대한 청국의 야심을 꺾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에 일본인이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산에는 청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지만 다른 지역, 예컨대 경성에는 일본인이 턱없이 모자란다고 지적하면서 "거류지 인민의 많고 적음은 무엇보다 그 세력의 강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가 하면, "만약 하루아침에 풍운의 변이 이곳(경성)에서 일어난다면 누가 한강을 끼고 한산을 옆에 두어 이 하늘이 준 형승(形勝)을 차지하겠는가"라고 강개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색 짙은 언설 외에도 조선잡기는 불과 1세기 전 조선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대목이 많다. 양산 대신 우산을 쓰고 의기양양해 하는 조선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갓도 벗지 않은 채 싸우는 장면, 서당에서 아이들이 소리 내면서 책을 읽는 풍경, 소금을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 남색(男色)과 창기에 관한 증언도 보인다.
이 조선잡기가 최 박사에 의해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조선잡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처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출처 : [일본 낭인이 본 1893년 조선의 풍경]
원본 : '조선잡기(朝鮮雜記)'
해방후 입대해도 광복군?…건국훈장까지 받아 (임시정부에 보고된 인원은 339명…훈장받은 '광복군'은 56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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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광복군의 복무사실 확인서. 입대일이 광복 후인 1945년 8월 19일로 명시돼있다.
(자료 제공 =고진화 의원실)
지난 1963년 광복군 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A씨. 그러나 국가보훈처가 지난 1991년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했을 때 A씨는 본인 스스로 자신의 광복군 입대일을 1945년 8월 21일이라고 써냈다. A씨와 같은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던 B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B씨는 스스로 써낸 확인서에서 광복 일주일전 중국에서 탈출, 광복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에야 광복군에 입대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 심사기준은 최소 광복 6개월전 광복군에 입대한 사람에 한해 훈장을 주도록 하고 있다. 해방을 전후해 개인 영달이나 보상을 노리고 입대한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이 보훈처로부터 입수한 당사자들의 '광복군 복무사실 확인서'에 따르면, 최소 15명 이상이 광복을 전후해 광복군에 입대했다고 스스로 작성했다.
이미 15년전인 1991년 본인들 스스로 서훈 자격 위배 사실을 밝힌 셈이지만, 보훈처는 40년이 넘게 이들의 서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명확한 사료가 없는 상황에서 본인들 주장만으로 서훈을 조정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에서다. 보훈처 관계자는 CBS와의 통화에서 "당시 인(人)보증으로 훈장받은 사람들인데, 근거가 있어서 준 것 아니겠느냐"며 "딱히 명확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본인들 주장만으로 다시 등급을 바꿀 수 없어 그냥 존치했다"고 해명했다.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가 의정원에 보고한 광복군 총 인원은 339명. 그렇다면 지금까지 광복군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몇 명일까. 보훈처 관계자는 "지금까지 광복군 활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564명"이라고 밝혔다. 보훈처는 또 관련 법규에 따라 독립유공자 포상기록을 보존 관리해야 하지만, 관계자는 "1963년 서훈 당시의 심사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배보다 배꼽이 크게, 훈장만 눈덩이처럼 늘어난 까닭이다.
출처 : 임시정부에 보고된 인원은 339명…훈장받은 '광복군'은 56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