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2.구래의 궁방재정 (1) 1793-1852년

明禮宮(명례궁)은 왕실의 中宮殿에 속한 內帑으로서 궁중의 內燒廚房(주방)과 外燒廚房(주방)에 각종 食材料(식재료)를 공급함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궁방이었다. 소재지는 漢城府(한성부) 城內의 中部 皇華坊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壬辰倭亂 당시 義州에서 돌아온 宣祖가 머물렀던 慶運宮이 있었다. 이후 光海君이 昌德宮을 신축하여 이거하자 경운궁은 仁穆大妃의 거소가 되었다. 명례궁은 1623년경 인목대비의 내탕으로서 경운궁의 일부 시설로 설치되었다고 보인다.(*3) 이후 19세기말까지 명례궁은 주로 중궁전의 내탕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후일 1897년 俄館으로 播遷했던 高宗(고종) 황제가 景福宮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거하여 宮域을 확충하자 명례궁은 그 북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명례궁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에 관해 세밀한 기록을 남겼는데, 현재 奎章閣(규장각)에 1792- 1906년의 것이 전하고 있다. 『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은 매년 월별로 수입의 物目과 數量를 기록하고 집계한 장부이다. 『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은 같은 형식으로 기재된 지출에 관한 장부이다.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이란 장부도 전하는데, 명례궁의 창고에 보관된 각종 물목의 時在를 半年마다 조사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동기간 명례궁 재정의 구조와 추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의 <표1>은 받자책[捧上冊]에서 1793-1794년, 1853-1854년, 1892-1893년의 연평균 수입규모와 수입원을 조사한 것이다. 2개년의 연평균을 구한 것은 풍흉에 따른 생산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이다. 수입은 錢(전), 米, 豆, 木, 布 등 약 20여 종의 물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모두 兩(양) 단위의 錢(전)으로 환산하여 통합하였다. 환산에 필요한 각 물목의 전 표시 가격은 모두 받자책과 차하책[上下冊]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4)

1793-1794년 명례궁의 수입원은 크게 供上, 內下(내하), 奴貢, 宮房田(궁방전), 其他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다. 공상은 戶曹, 宣惠廳(선혜청), 均役廳과 같은 정부의 재정기관이 왕실을 받든다는 취지에서 행한 다양한 명분의 정기적 상납을 말한다. 內下(내하)는 왕이나 왕비가 궁방의 모자라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下賜한 것을 말한다. 奴貢은 1793년 당시 전국 32개 군현에 분포한 127구의 奴로부터 수취한 身貢 수입을 말한다. 婢貢은 이미 1774년에 폐지되고 노공만 남았는데, 그것마저 1801년에 폐지되었다. 宮房田(궁방전)은 명례궁에 속한 有土(유토), 無土(무토), 柴場, 草坪 등 토지로부터의 수입을 말한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왕실의 주요 수입원은 전국에 분포한 수만 구의 노비들이었다(宋洙煥 2000: 404-5). 17세기 이후 奴婢制가 쇠퇴하자 왕실은 대체 수입원으로서 전국 각처에 궁방전을 마련하였다. 유토는 궁방의 소유지를 말하며 지대로서 賭地(도지)가 수취되었다. 유토 궁방전이 확대되자 관료들은 “王者는 私藏을 가질 수 없다”는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을 내세워 그를 견제하였다. 이에 17세기말 유토의 증설은 중단되었으며, 그 대신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結稅(결세)만을 궁방에 이속하는 무토라는 궁방전이 생겨났다(李榮薰 1988: 139-87). 1793-1794년 당시 명례궁은 전국적으로 41처의 유토, 17처의 무토, 4처의 시장, 2처의 초평을 보유하였다. 마지막으로 其他는 명례궁에 속한 願刹로부터의 진상, 명례궁에 속한 洑ㆍ漁箭ㆍ主人 등으로부터의 수입, 다른 기관이나 인물로부터의 부정기적인 移轉, 다른 기관에 대여했다가 환수한 미곡 등을 묶은 것이다.

<표1>明禮宮(명례궁)의 연평균 收入規模와 收入源의 推移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1

자료:『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3-91, 92, 55, 54, 6, 5)

1793-1794년 명례궁의 가장 큰 수입원은 궁방전으로서 46.4%의 비중이었다. 그 다음이 정부의 공상으로서 43.4%였다. 이렇게 왕실은 정부의 공상만으로 생활하지 못하고(않고) 私藏으로서 노비와 토지를 보유하였는데, 그로부터의 수입이 정부의 공상보다 컸다. 조선왕조의 왕실은 정부 위에 놓인 초월적 권위의 공적 존재만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노비와 토지 재산을 두고 民 또는 정부와 이해관계의 대립을 보인 사적 존재이기도 했다. 왕실재정의 공적 성격과 사적 성격은 조선왕조의 이념적 토대인 유교적 공의 명분에 규제되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궁방전 수입과 정부 공상이 비슷한 비중을 이루었던 18세기말 왕실재정의 실태로부터 조선왕조 왕실의 그 같은 역사적 특질을 읽을 수 있다.

수입규모는 이후 1853-1854년까지 19,697량에서 32,954량으로 67%나 증가하였다. 동기간 각종 물목의 가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실제의 市場(시장)價格은 약간 상승하였지만, 그 폭이 크지 않아 명례궁은 동기간 동일 가격으로 재정을 운영하였다. 다시 말해 67%나 수입규모의 실질적인 증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방전 수입의 비중은 9,145량에서 8,742량으로 감소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유토 궁방전에서의 농업생산이 증진되지 못하여 賭地(도지) 수입이 정체하거나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한반도의 중ㆍ남부에서 널리 관찰되는 水稻作 생산성의 정체 내지 쇠퇴 현상이(이영훈ㆍ박이택 2004: 261-2, 李榮薰 2007: 270-3) 명례궁의 궁방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궁방전을 대신하여 수입규모의 증가를 이끈 것은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였다. 호조와 선혜청은 1819년 정월부터 매월 150량씩, 도합 300량을 새롭게 공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몇 가지 새로운 공상이 행해져 공상의 비중은 43.4%에서 52.0%로 늘어났다. 왕실의 내하도 5.1%에서 9.1%로 늘었다. 3.7%에서 12.4%로 크게 늘어난 其他의 대부분도 실은 왕실의 내하였다고 보인다. 그 속에 典洞宅이 해마다 4,000량씩 명례궁에 이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동댁의 실체는 알 수 없는데, 왕실의 일부이거나 왕족이었다고 보인다. 이를 내하에 포함시키면 그 비중이 20%로 늘어난다.

동기간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가 늘어난 것은 지출의 증가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의 <표2>는 차하책에서 1793, 1853, 1893년의 연간 지출규모를 食料費(식료비), 資材費, 工業費, 賃料(임료), 其他의 용도로 분류하여 조사한 것이다. 年年의 지출은 수입과 달리 비탄력적이어서 2년간의 평균을 취하지 않았다. 식료비는 궁중에서 각종 음식을 만드는 內ㆍ外燒廚房(주방), 生果房, 生物房 등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지출이나 구입비를 말한다. 명례궁의 노비들이 시중에서 구입을 대행한 ‘貿易價’의 경우 그 구체적인 내역을 알 수 없지만, 모두 식료비에 포함시켰다. 자재비는 柴木ㆍ炭과 같은 燃料費, 궁중의 內人들을 위한 被服費, 주방에 쓰이는 각종 布木類와 紙類의 비용, 종이ㆍ붓과 같은 사무용품비, 燈油ㆍ柴油와 같은 照明費 등을 말한다. 공업비는 궁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染色ㆍ薰造ㆍ沈醬ㆍ園藝ㆍ馬飼育의 비용과 각종 器物ㆍ器皿의 구입 내지 수선비를 말한다. 임료는 명례궁에 속한 內人ㆍ次知ㆍ掌務ㆍ奴ㆍ婢ㆍ庫直ㆍ冶匠 등 제반 궁속에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보수, 지게군의 雇價를 비롯한 각종 운반비, 내ㆍ외소주방에 속한 熟手(숙수)의 工錢(공전), 궁속들의 여행비, 왕실의 왕족ㆍ나인ㆍ내관ㆍ守宮ㆍ원찰에 대한 증여 등을 포함한다.

<표2>명례궁의 支出規模와 用途의 추이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2

자료:『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1-4, 15, 8)

1793년의 지출은 17,559량으로서 1793-1794년의 평균 수입 19,697량보다 적었다. 18세기말 명례궁 재정은 黑字(흑자) 기조였다. 반면 1853년의 지출은 38,208량으로서 1853-1854년의 평균 수입 32,954량을 초과하였다. 당초의 흑자 기조가 언제부터인가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그렇게 된 것은 표에서 보듯이 1793년에 비해 식료비와 임료의 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료가 3배나 크게 증가하였다. 차하책에 의하면 명례궁의 궁속은 1797년 63명에서 1834년 77명으로 증가하였다. 궁속의 수가 늘어난 것은 궁중에서 전개된 왕실의 일상생활이 보다 번거로워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료비의 증가가 말하듯이 궁중에서의 宴會(연회)와 祭祀가 보다 빈번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궁중에서 영위된 각종 공업의 비용이 4배나 증가한 것도 왕실의 살림살이가 커졌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1] 명례궁 年末 時在의 추이: 1793-1853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1

자료:『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4-33, 27, 34, 95, 36, 24, 88, 32, 84, 18, 40, 12)

[그림1]은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에서 1793-1853년간 5년마다 연말 시재가 어떠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1823년 缺). 연말 시재의 물목은 5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나 그 중 90% 이상을 차지하는 金, 銀(은), 錢(전), 米의 시재만을 錢(전)으로 환산, 통합한 것이다. 1793년 말 명례궁의 시재는 46,230량에 달할 정도로 풍족하였다. 쌀로 치면 7,705석에 달하는 규모이다. 18세기의 경제적 안정과 왕실재정의 儉素(검소)가 그 같은 대규모의 비축을 가능케 하였다.

이후 1809년까지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7,000량 전후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례궁 자신의 赤字(적자) 累積(누적)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정부기관으로의 移轉 때문인지는 추후 별도로 조사될 필요가 있다. 이후 純祖 연간(1801-1833)에 걸쳐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해마다 기복이 있긴 하나, 13,000량을 전후하는 수준에 안정되었다. 명례궁의 시재가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은 憲宗 연간(1834-1849)의 일이다. 그 결과 1848년 명례궁의 시재는 일시 558량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어쨌든 19세기에 들어 명례궁 재정은 왕실의 쓰임새가 커지면서 적자 기조에 빠졌으며, 그에 따라 18세기가 넘겨준 풍족한 在庫(재고)를 조금씩 消盡해 갔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2.구래의 궁방재정 (2) 1855-1894년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림2] 明禮宮(명례궁)으로의 內下(내하)의 추이: 1882-1894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2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1, 21, 20, 19, 18, 17, 16, 7, 43, 42, 6, 5, 4)

이 내하금이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그 해부터 錢(전) 형태의 내하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오전의 발행은 閔妃(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閔氏(민씨) 政權(정권)의 유력한 재정수단이자 민씨 일족의 致富(치부) 方策이었다. 당오전의 발행은 물가를 급하게 끌어올리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오전은 1885년부터 한동안 발행이 자제되다가 1889년부터 1894년 폐지되기까지 품목에 못 미치는 惡貨(악화)의 형태로 대량 발행되었다(吳斗煥 1991: 61-81). 그러한 당오전의 역사와 [그림2]의 추이는 연도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역시 내하의 수단이 다름 아닌 당오전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민비(명성황후)는 1892-1893년 명례궁 수입의 88.2%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간 명례궁의 지출은 <표2>에서 보듯이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례궁 재정은 거대한 적자 구조였다. 동시기 명례궁의 會計冊(회계책)은 이 적자가 ‘加用(가용)’, 곧 借入(차입)으로 매워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3]은 1855-1892년의 회계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米와 錢(전)의 연말 시재의 추이이다.

[그림3] 명례궁의 年末 時在의 추이: 1853-1892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3

자료 : 『明禮宮會計冊 (명례궁회계책)』
(奎章閣圖書 19004-12, 42, 13, 53, 14, 28, 15, 54, 19077-2)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863년 高宗(고종)의 시대가 열리면서 차입 구조로 들어섰다. 1873년에는 일시 차입 구조를 벗어났다가 1883년까지 조금씩 累積借入(누적차입)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보듯이 1884년 이후 가파르게 누적 차입이 증대하기 시작하여 1892년에는 66만 량의 거액에 달하였다. 동기간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일족의 집권은 확고하였다. 借入先(차입선)이 어딘지, 정부재정인지 市中(시중)의 商人(상인)인지는 회계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부재정이 매우 困乏(곤핍)했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명례궁은 1884년 이후 급속하게 지출규모를 팽창시키면서 당오전의 내하로 그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부족한 수입을 시중 상인들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6)

그 위기의 시대에 민비(명성황후)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나 過濫(과람)하게 명례궁의 재정을 확장하였던가. <표2>에 보듯이 1893년 명례궁은 354만 량 이상의 食料費(식료비)를 지출하였다. 총지출에서 식료비의 비중이 79.6%에 달하였다. 식료비가 그렇게 크게 늘어난 것은 무척 잦아진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 때문이었다. 차하책에 의하면 1893년 한 해에 모두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민비(명성황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神堂(신당)을 짓고 巫堂(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모두 성리학의 나라가 오랫동안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금지해 온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한 해에 도합 37회의 연회를 베풀었다. 왕의 誕日(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궁중의 後苑(후원)에서 임시로 내외의 賓客(빈객)을 맞아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베푼 연회들이었다. 1894년 2월의 받자책의 한 구절은 220만 량의 거액을 내하하면서 ‘誕日熟設條(탄일숙설조)’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풍족하게 열 용도라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면 빈객들을 대상으로 한 ‘賜饌(사찬)’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褓(보)에 싸서 지게꾼에 지워 빈객들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소주방, 생물방, 생과방에 소속된 熟手(숙수)들에게 工錢(공전)이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표2>에서 보듯이 식료비만이 아니라 공업비와 임료가 크게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93년의 차하책에서 고사ㆍ다례와 연회에 관련된 식재료, 공업비, 임료를 모두 합하니 당년의 총지출 444만 량의 절반을 넘는 247만 량이나 되었다.

민비(명성황후) 이전의 宮主(궁주)들이 이렇게 풍성한 연회를 베푼 적은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통치와 개항 이후 몇 차례의 政變(정변)을 겪는 과정에서 왕실의 살림살이를 유교적 公의 명분으로 규제하던 정치세력들이 모두 소거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왕실은 1884년 이후 千年王國(천년왕국)의 宴樂(연락)을 누렸다. 지극히 공적으로 취급되어 온 銅錢(동전)을 남발하여 연회로 낭비하는 일은 18세기의 근엄했던 朝廷(조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7) 그 좋았던 시절이 1894년의 淸日戰爭(청일전쟁)으로 끝이 났다. 왕실을 비호하던 淸帝國(청제국)이 조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지원으로 성립한 內閣(내각)은 왕실을 立憲君主制(립헌군주제)의 굴레로 묶으려는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시련의 계절이 왕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3.甲午更張(갑오경장)의 충격과 회복

명례궁 재정은 1894-1895년의 甲午更張(갑오경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우선 無土(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갑오경장은 宮房田(궁방전)과 衙門屯土(아문둔토)에 부여해 온 免稅(면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甲午陞總/갑오승총). 그에 따라 民有地(민유지)로서 해당 結稅(결세)를 궁방에 상납하던 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또한 무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有土(유토)의 일부도 함께 폐지되었다. 유토 가운데는 무토와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다.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아주 낮은 수준의 賭地(도지)를 궁방에 바쳐 온 유토였다. 이런 부류의 유토를 갑오경장 당시에 第2種有土(제2종유토)라 하였다(李榮薰 1988: 135-6). 실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12처의 제2종유토가 명례궁의 수취 대상에서 이탈하였다. 18세기말 이래의 일이었다. 그 같은 추세의 연장에서 갑오경장으로 무토가 폐지되자 13처의 제2종유토가 더불어 폐지되었다. 전술하였듯이 18세기말 명례궁의 유토는 전국적으로 41처에 분포하였다. 그러했던 유토가 갑오경장 이후는 22처에 불과하게 되었다.(*8) 궁방전의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감소하였다.

갑오경장이 명례궁 재정에 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當五錢(당오전)의 폐지였다. 그에 따라 1892 -1893년 총수입의 88.2%나 차지했던 王室(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95년에는 궁주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乙未事變/을미사변). 명례궁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성립한 내각은 日本貨幣(일본화폐)와 동일 稱量(칭량)의 新式貨幣(신식화폐)를 발행하였다. 신식화폐 1元은 舊 常平通寶(구 상평통보) 5兩(양)에 해당하였다. 명례궁의 차하책은 1895년 정월부터 지출 수단을 구 상평통보에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제반 물가가 일률적으로 1/5로 切下(절하)되었다. 그런데 화폐의 단위만큼은 이후에도 여전히 구래의 兩(양)을 고집하고 있었다. 명례궁의 받자책은 1895년 8월까지 구 상평통보로 수입을 기재하다가 이후 신식화폐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화폐의 단위는 여전히 구래의 兩(양)으로 표기되었다.

[그림4] 1894-1904년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의 추이이다. 1894년의 수입과 지출은 구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1/5로 절하하였다. 동기간 화폐의 단위는 받자책과 차하책에서 여전히 兩(양)이었지만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元으로 표기하였다.

[그림4]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4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3-4, 41, 40, 39, 38, 37, 36, 35, 34, 33, 32)
(奎章閣圖書 19001-68, 73, 67, 57, 6, 64, 16, 61, 63, 9, 74)

명례궁의 수입은 갑오경장의 충격을 받아 1894년 69만여 元에서 1896년까지 10만여 원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1897년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을 맞아 1899년까지 48만여 원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수준에서 1902년까지 정체하였다. 연후 1903-1904년에 148만여 원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 같은 각 연도의 수입에 있어서 80% 또는 90% 이상은 內下(내하)였다. 1903년에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내하가 전년의 33만여 원에서 127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받자책은 그 중의 100만 원에 대해 ‘未下條(미하조)’라고 용도를 밝혔다. 즉 각종 재화를 구입하고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들을 상환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이 1894년 이후 지출은 언제나 수입을 초과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변함없이 借入(차입)에 의해 꾸려졌다.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1903, 1904년에 대량의 내하가 이루어져 흑자재정으로 돌아섰지만, 누적되어 온 차입이 얼마나 상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1903년의 흑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지출이 증가하여 거의 收支(수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표3>명례궁의 수입 내역과 지출 용도: 1903-1904  (단위: 元)

황실재정_표3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33, 32),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1-9)

1903-1904년의 수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제시하면 <표3>과 같다. 兩(양)年의 평균 수입 151만여 원은 거의 대부분 내하로 이루어졌다. 내하의 비중이 무려 96.3%나 되었다. 2.0%의 供上은 宮內府(궁내부)로부터의 지급을 말하는데, 갑오승총으로 폐지된 무토의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1897년부터 행해진 지급과 역대 국왕의 肖像(초상)을 모신 眞殿(진전)에서의 享需(향수)를 충당하기 위한 지급 등을 말한다. 宮房田(궁방전)은 전술한대로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그 비중이 1.6%에 불과하였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食料費(식료비)가 77.7%의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점에서 1893년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 원인을 살피면 景孝殿(경효전)에서 행해진 78회의 上食(상식)과 茶禮(차례)가 가장 중요하였다. 경효전은 1895년에 시해된 閔妃(민비/명성황후)의 魂殿(혼전)이다. 민비(명성황후)는 1893년에는 살아 있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그 외에 1903년 한 해에 황제에게 進御床(진어상)이 28회나 바쳐졌다. 그 중의 9회에는 賜饌床(사찬상)까지 베풀어졌다. 1902년 나이 50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황제는 尊體(존체)를 보전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내탕으로 하여금 珍羞盛饌(진수성찬)의 床(상)을 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1903년은 그의 즉위 40주년이었다. 정부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며, 명례궁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식재료에 이어 인건비가 16.6%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명례궁에 속한 궁속들이 11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5] 명례궁의 실질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5

자료: [그림4]와 동일.

주지하듯이 대한제국기에 典圜局(전환국)이 다량의 백동화를 발행하여 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차하책이 전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은 1894-1904년에 평균 3.4배나 상승하였다. 동기간의 연도별 物價指數(물가지수)를 작성하여(*9) 각 연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을 제시하면 [그림5]와 같다. 여기서 보듯이 1904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명례궁 재정은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絶頂期(절정기)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명례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도 왕실의 내하가 이루어졌고 그 금액이 1903 -1904년에는 145만여 원의 거액에 달했지만 재정의 실질규모는 절정기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 사이 公的規範(공적규범)에서 이탈한 황실의 살림살이가 虛禮(허례)와 浪費(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當五錢(당오전)에 이어 그 허례와 낭비를 지탱한 내하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4.內藏院(내장원) 재정과의 관계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의 전제권력이 성립하는 1899년을 전후하여 정부재정에 속한 여러 公的財源(공적재원)을 궁내부 산하의 內藏院(내장원)으로 편입시켰다. 예컨대 1898년 내장원은 紅蔘專賣(홍삼전매)를 실시하고 蔘稅(삼세)를 징수하였다. 鑛稅(광세)도 내장원에 속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구래의 衙門屯土(아문둔토)와 牧場土(목장토)가, 1900년에는 구래의 驛土(역토)가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1901년에는 漁稅(어세)와 鹽稅(염세)가 내장원으로 넘어갔다. 그 외에 내장원은 沿江稅나 庖肆稅(포사세)와 같은 여러 명목의 잡세를 신설하거나 增徵(증징)하였다. 그 결과 내장원 재정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內藏院會計冊(내장원내장원회계책)』에 따르면, 1897-1900년 내장원의 연평균 수입은 20만 兩(양)에 불과하였는데, 1901-1902년에 200만 량, 1903년에 589만 량, 1904년에 3,004만 량으로 증가하였다(李潤相 1996a: 161-2). 특히 1904년의 급속한 팽창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 1903-1904년 내장원의 수입은 공적인 정부재정 수입의 43-69%에나 달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金載昊 1997: 118).

기존의 연구는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대한제국기 황실재정 가운데 내장원 재정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 그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내장원의 수입과 지출을 일일이 기록한 위의 회계책에서 쓰이는 화폐의 단위는 구 常平通寶(상평통보)의 兩(양)이다. 그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고 여겨진다. 갑오경장에 의해 新貨幣(신화페)가 발행되었지만, 그 유통 범위는 전국적이지 않았다. 신화폐 白銅貨(백동화)는 주로 서울, 경기, 황해, 평안에서 유통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구 상평통보가 지배적 통화를 이루었다. 내장원은 상평통보 지역에 대해서도 각종 세를 수취하였기 때문에 수입의 상당 부분은 상평통보의 형태였다. 회계책에 의하면 내장원은 1903년까지 錢(전), 銀貨(은화), 紙幣(지폐), 木(나무), 布(천)를 수입과 지출의 수단으로 하였다. 전은 상평통보, 은화는 신화폐의 本位貨(본위화)(1元), 지폐는 일본 第一銀行券(제일은행권)을 말하였다. 여기에 빠진 신화폐 白銅貨(백동화)와 赤銅貨(적동화)가 내장원에서 쓰이는 것은 후술하듯이 1904년부터인데, 그것도 그리 큰 비중은 아니었다. 내장원이 끝까지 상평통보를 會計單位(회계단위)로 삼은 이유를 당장에 다 밝히기는 힘들지만, 역시 총수입 가운데 그것의 비중이 컸고, 황실재정의 여러 기구 가운데 舊貨幣(구화폐)를 취급하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제국에서의 현금 환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
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

요컨대 내장원은 명례궁이 1895년부터 신화폐를 재정수단으로 채택했음과 대조적으로 1906년까지 구화폐를 고집하였다. 단순히 會計單位(회계단위)로만 구화폐가 활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 현물로서 구화폐가 수입되고 지출되었다. 회계책에 의하면 1903년 1월 ‘常平錢(상평전)’ 5,000량을, 2월에도 ‘상평전’ 6,519량을 인천에서 운반해 왔다. 내장원은 錢(전)을 보관하기 위해 1903년 6회에 걸쳐 2,800坐(좌)의 ‘錢櫃(전궤)’를 제작하거나 宣惠廳(선혜청)에서 빌려 왔다.10) 전을 封裹(봉과)하기 위한 613斤의 종이가 11회에 걸쳐 구입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내장원은 1903년 6회에 걸쳐 ‘상평전’ 5,600량을 황제에 內入(내입)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모두 내장원 재정에서 구화폐가 현물로 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명례궁과 내장원의 재정규모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내장원의 兩(양) 단위 수입액 또는 지출액을 1/5로 切下(절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식으로 앞서 소개한 내장원의 수입액과 [그림4]에 제시된 명례궁의 수입액을 비교한 결과, 1896-1900년 내장원의 수입 규모는 명례궁의 2-3%에 불과하였다. 1901-1903년은 17-26%이다. 수입이 3,004만 량으로 급팽창한 1904년은 명례궁의 3.2배이다. 요컨대 1903년까지 내장원 재정의 규모는 명례궁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명례궁 이외에 그보다 더 컸을 內需司(내수사)나 비슷한 규모의 壽進宮(수진궁)ㆍ龍洞宮(용동궁)과 같은 궁방들이 있었다. 이에 1904년조차도 그 수가 15에 달하는 궁방들의 총수입은 내장원을 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중심은 내장원이었다는 종래의 이해는 이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재정을 뒷받침한 內下(내하)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살피도록 하자. 내장원이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장원이 취급한 화폐가 상평통보로서 명례궁이 사용한 백동화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 재정규모가 1903년까지 명례궁의 26% 이하여서 명례궁 수입의 80-90%를 차지한 내하를 공급할 능력이 전혀 못되었기 때문이다. 수입이 명례궁보다 3.2배 많아진 1904년의 경우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동년 내장원이 황제에게 ‘內入(내입)’한 금액은 1,031만 량, 곧 260만 원이었다(李潤相 1996a: 195). 그 중의 146만여 원이 명례궁으로 지급된 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명례궁의 차하책이 제공하는 몇 가지 정보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1904년 명례궁은 134만 4,100원의 내하금을 ‘推來(추래)’하는 데 6,720元 50錢(전)의 운반비를 지출하였다. 1원당 운반비는 0.5錢(전)이다. 이 운반비는 1901년 이래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말해 명례궁으로의 내하금은 1901년 이래 동일한 장소에서 출발하였다. 참고로 1899년의 1원당 운반비를 조사하면 10배나 많은 5전이다. 그 때는 훨씬 먼 곳에서 내하금이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제 仁川에 있던 典圜局(전환국)이 1900년 漢城府(한성부)의 龍山(용산)으로 옮겨온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운반비가 1/10로 싸진 것을 그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04년 명례궁에 들어온 대량의 내하금은 그 출발지가 1901년 이래의 龍山典圜局(용산전환국)이었다. 巡檢(순검)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게꾼들이 白銅貨(백동화)의 櫃(궤)를 운반하는 행렬을 상상해보라. 그것만큼 대한제국의 실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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