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誘引事件多端(유인사건다단) 유곽업자는 창기를 지방에 전매. 경찰은 영업정지라도 시킬 방침 [동아일보 1939년 3월 9일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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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_1939년3월9일
誘引事件多端(유인사건다단)
 遊廓業者(유곽업자)는 娼妓(창기)를 地方(지방)에 轉賣(전매)
  警察(경찰)은 營業停止(영업정지)라도 시킬 方針(방침)

히세의 처녀유인마 하윤명(河允明)부처는 경찰의 준렬한 취조에 따라 속속 여죄가 백일하에 들어나고 잇는데 이번 사건이 한번 세상에 폭로되자 전기 하윤명에게서 처녀를 산 부내 유곽업자들은 3,4일 동안에 전부 다 곧으로 전매하야 그들의 손해를 미연에 방지케 잿바른 수속을 취하엿다 한다.

이로 말미아마 경찰의 호의로 그라을 구출할려든 게획은 당분간 꺽긴 세음인데 그들 업자들은 경찰에서의 호출이 잇자 곧 지방으로 급처분을 하엿다는데 이들은 이미정을 암고 이와같이 하엿으므로 경찰에서는 업자에게 엄중한 처벌을 하야 경우에 따라서는 영업정지처분까지 나릴지 모른다고 한다.

병목정(並木町) 58번지 박성삼(朴聖三)이가 경영하는 유곽에 하윤명의 꼬임으로 팔려와 잇는 경북 영일(迎日)출생 이칠성(李七星)의 딸 이복귀(李福貴)(1□)는 6일 600원에 병천군 서면 삼향리(明川郡西面三鄕里) 명월루(明月樓)에 전매한 것이 판명되었고 기타 15명 부내 유곽에 판 여자는 전부 다른 지방으로 막처분하엿고 오직 전남 순천군 낙안면 이곡리(順川郡樂安面李谷里)출생 서사헌정(西四軒町)180번지 반월루(半月樓)생기 권사순(權四順)(20)(藝名英子)만이 남아잇는데 그는 작년 써달 1000원에 하윤명이 만월루에 판것이하란다.

그리고 병목정(並木町) 61번지 유명루(遊明樓)에 팔려 잇는 경남 합천(陜川)출생 조학남(趙鶴南)(18)은 이틀전 500원을 받고 산동성 답경위안소(山東省畓鏡慰安所)에 판 것도 들어나 그들의 행방창기에도 여간 곤난이 아니리라는데 사건은 의외의 방면으로 벌어저 취조에 곤난을 느끼고 잇다한다.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39년 3월 9일 제3면


식민지기의 경제성장과 해방 후까지의 연속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1910~1945년간 한반도에는 경제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가.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보통의 한국인은 일제가 야만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토지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였다고 알고 있다. 예컨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하여 농지의 40%를 기만적으로 수탈했다. 총칼을 들이대고는 식량의 50%를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이러한 내용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교과서를 집필한 몇몇 무책임한 역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는 이미 13년 전부터 그러한 비판을 여러 차례 제기해 왔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러한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음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기 조선의 경제 성장
일제는 그의 통치행위와 관련하여 비교적 자세한 통계자료를 남겼다. 1910년대 이후 한반도는 근대적인 통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통계만으로 역사를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통계의 시대에 살면서 통계를 제쳐두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1988년 일본 히도츠바시 대학의 연구자들이 1911~1938년 한반도의 국내총지출을 비롯한 국민경제통계를 작성했다. 드디어 올해에는 한국에서 김낙년 교수가 중심이 된 경제사연구자들이 1910~1940년 한반도의 국민경제통계를 정비했다.<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0> 전자보다 질적으로 많이 개선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실질소득의 추이

▲주민의 1인당 실질소득의 추이 1911~1940 국가별 비교

제시된 그림은 이 새롭게 정비된 통계에서 구할 수 있는 1911~1940년 한반도 주민의 1인당 실질소득의 추이를 동기간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인도, 멕시코의 여러 나라와 비교한 것이다. 1911년의 1인당 소득을 공통으로 100으로 둔 소득지수의 비교이다. 이들 여러 나라의 1인당 소득에 대해선 앙구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세계경제: 역사통계>를 참조할 수 있다.

맨 위에서 서로 겹치면서 가장 급하게 성장하고 있는 두 지역이 한반도와 일본이다. 두 지역 모두 동기간 1인당 실질소득이 2배가량 증대하였다. 20세기 전반의 세계자본주의는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후발자본주의인 일본의 경제성장이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졌다. 한반도가 그 일본과 성장 궤적을 나란히 하고 있음은 다름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일부분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 어떤 지방은 성장하고 다른 어떤 지방은 쇠퇴하는 일이 있을 수 없듯이, 한반도는 일본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 일본만큼 성장한 것이다. 필자는 이 그래프에서 한반도 식민지기의 경제사를 거의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목적은 그들이 오끼나와와 홋카이도를 그렇게 하였듯이 일본제국의 일환으로 영구병합하기 위함이었다. 이 원대한, 무모하기도 했던,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한반도에다 일본과 동일한 경제제도를 이식시켰다. 1912년 일본의 민법을 한반도에도 시행하는 조선민사령이 공포됐다. 이를 통해 각종 물권 및 채권에 걸쳐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했다. 저작권 등 각종 형태의 무체재산권에서도 사유재산제도가 포괄적으로 성립했다. 뒤이어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자와 토지가격을 사정하는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됐다. 나아가 화폐, 은행, 신탁, 보험, 거래소 등 근대적 형태의 시장기구가 이식됐다. 도로, 철도, 항만, 통신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확충됐다. 1920년대에 이르러선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관세가 폐지됐다. 두 지역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통합됐다. 이러했기 때문에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식민지기 한반도에서 일본을 따라 일본만큼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일을 두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제발전에 따라 한반도의 산업구조는 고도화하였다. 새로운 추계에 의하면 1910~1940년에 걸쳐 1차산업의 비중은 71%에서 43%로 감소하고, 2차산업이 7%에서 29%로, 3차산업이 22%에서 28%로 성장했다. 1940년 한반도는 여전히 농업이 가장 우세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를 성취한 산업구조를 보유했다. 성장의 원동력은 1930년대 전반까지는 쌀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일본과의 무역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대량의 자본수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한반도에 군사 관련 공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의 분배 - 조선인과 일본인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되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논쟁거리이지만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가정에 입각하여 그 실태를 그럴듯하게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예컨대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의 소득수준이 일본 내의 일본인보다 2배 정도 높았다는 전제에서 한반도 내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소득 수준을 비교하면, 1910년 일본인의 소득수준은 조선인보다 5.25배나 높았는데 1940년까지 6.86배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동기간 조선인의 1인당 소득수준은 50%의 증가를 보였다. 같은 기간, 조선인의 소득수준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는 극단적인 가정 위의 시뮬레이션에서는 한반도 내 일본인의 소득수준이 일본 내 일본인의 그것보다 무려 5.6배나 높아지는 있을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요컨대 민족 간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지만 조선인의 실질소득은 증가하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분배 - 조선인과 조선인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 사이에서 얼마나 골고루 분배되었는지도 따져야 할 문제다. 임금소득의 추이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일부의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다수의 미숙련노동자와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에서는 개선이 없었다. 경지가 조금 뿐인 소농들의 실질소득에도 볼만한 개선은 없었다고 보인다. 경제성장의 혜택은 농촌부의 상층농과 지주, 그리고 도시부에서 근대부문에 종사한 상공업자와 화이트칼라에 집중됐다. 이러한 소득의 계층 간 불공평은 모든 나라의 자본주의 초기 역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하층 농민과 노동자의 실질소득이 증가하기 힘들었던 가장 중대한 원인은 갑작스런 인구증가였다. 식민지기에 걸쳐 인구는 53%나 증가하였다. 1930년대부터 일본과 만주로 빠져나간 인구를 포함하면 근 70%의 증가율이었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농촌에 점점 많아진 과잉인구를 흡수할 능력이 없었다. 한반도의 자본주의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다.

식민지기 경제성장이 남긴 것
이제 마지막으로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이 해방 후 한반도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를 따지도록 하자. 실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기에는 관련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성급하게도 정확하지 않은 주장들이 자주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핑계로 하면서 여기서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범위에 한해서 조심스럽게 평소의 생각을 펼쳐본다.

남한이 식민지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물적 자본이라기보다 인적 자본과 제도가 중심이었다. 식민지기에 남한은 농업이 중심 산업이었고 공업이라 해 봐야 면방직 등의 경공업이 중심이었다. 도시 주변에서 기계기구공업이 발전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원동기가 설치된 대장간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공업시설의 상당 부분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망실되거나 6ㆍ25전쟁 통에 파괴됐다. 반면에 남한은 식민지기에 이식된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한 시장경제의 기초 제도와 은행 등의 시장기구들을 잘 보존했다. 그 위에 미국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되자 자유기업주의가 경제행위의 기본 원리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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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일부분으로 포섭돼 일본과 성장 궤적을 나란히 하게 됐다.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위),  북한의 비날론 공장(좌)과 이승기 박사

또한 남한은 식민지기에 조선인 스스로가 축적한 기업가능력, 곧 인적 자본을 풍부히 계승했다. 북한이 사회주의화하자 대량의 상공업자들이 남으로 내려온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들은 남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한은 이러한 무형의 시장경제제도와 풍부한 인적 자본으로 1960년대 이후 유리한 국제시장의 환경이 조성되자 그에 적극 부응하면서 비약적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적 자본이 빈약하였기에 오히려 운신의 폭이 컸던 셈이다.

한편,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1946년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치한 모든 법령과 제도를 폐지했다. 그 통에 인류사에서 가장 값진 문명 요소라 할 수 있는 사유재산제도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대량의 인적 자본이 남한으로 쫓겨 왔음은 조금 전에 지적한 그대로다. 반면에 북한은 일제로부터 풍부한 공업시설을 인수했다. 이와 관련하여 1930년대 후반 이후, 특히 1940년대 전반에, 북한 지역에 일제가 실로 방대한 규모의 군사 관련 공업을 건설하였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1인당 발전량과 철도거리는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소련군의 조사에 의하면 1946년 북한에는 1천34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828개가 정상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 중심은 제철, 제련, 비철금속, 전기, 화학, 기계 등의 중공업이었다. 그 가운데 북한의 지배자들이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이 병기공장이었다. 1949년 북한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화약 등의 기초 화기를 자력으로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남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ㆍ25전쟁은 이 같은 남북한의 생산력 격차에 의해 유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제가 전쟁을 위해 북한에 건설한 군사공업을 계승하여 6ㆍ25전쟁을 도발하였다. 역사에서 이만한 아이러니를 어디 다른 데서 찾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자. 한국 과학사의 연구자들은 북한의 사회주의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자력갱생을 부르짖을 때 1959년 이승기 박사가 함흥의 질소비료 공장에서 인조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것이 큰 격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대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과학자였던 이승기 박사는 일본의 교오토대학 출신이다. 그가 비날론을 개발한 공장은 1929년 일제가 함흥에 건설한 당대 세계 5위의 질소비료공장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제의 인적 및 물적 유산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현대 북한의 경제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식민지기의 공업화와 경제발전은 여러 수준에서 해방 후 남한과 북한의 경제사를 깊숙이 규정하였다. 양자의 관계를 두고 손쉽게 단절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때때로 지나치게 정치적 발언이란 느낌을 받는다. 남한과 북한에 골고루 시선을 던지면서 제도와 물적 인적 자본과 기술의 여러 수준에서 연속과 단절의 실태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 둔다.
출처 : '인적 자본과 제도' 남긴 식민지기 경제성장

식민지시대의 경제성장 [차명수 영남대 교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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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경제성장은 한국 경제사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 것일까? 장하준(2005)은Angus Maddison의 역사통계를 인용하면서, 식민지기의 1인당 생산 증가속도가 연 2%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해방 후 고도성장기 남한의 연 6% 이상의 경제성장에 비하면 매우초라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1960-1970년대는 거의 모든 나라가 어느 때보다도빠른 성장을 누리고 있던‘자본주의의 황금기’였을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한국의 경제성장은 예외적으로 빠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제대로 된 비교가 아니다. 학문적이고객관적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가 되기 전 한국의 경제성장실적과도 비교해 보아야 하고, 또 20세기 초반의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과도 비교해 보아야 한다. Maddison(2001: 265, 304, 330)에 의하면, 1913-50년 세계 전체의 1인당 생산 증가율은 한국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연 0.91%에 불과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서의 1인당 생산은 연 0.02%의 속도로 하락했다. Maddison(2001)을믿는다면 지난 20세기 후반에 남한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룩한 나라의 하나였던 것처럼, 세계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20세기 전반에 식민지 조선은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앞서 지적한 것처럼, 20세기 초에진행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이전에는 한국 역사에서 한번도 관찰된 적이 없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면 우선 조선 후기에서 오늘날까지에 이르는 한국 경제사 속에서 식민지기 경제성장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런 비교평가를 할 때 흔히 인용되는 것이 Maddison(1995: 204, 205)의 1911-92년의 식민지 조선과 남한의 1인당생산통계이다. 그러나 이 장기 시계열 중 식민지기에 관한 수치는 특히 신뢰하기 어렵다.따라서 이를 근거로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신뢰하기어렵다고 보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선 1911-38년의 1인당 생산은 溝口(1988)의 추계를 근거로 한 것인데, 그 추계는 (제12장에서 지적했듯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는 전쟁과혼란 속에서 통계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조사된 통계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Maddison(1995)이 제시한 이 통계 암흑기의 1인당 생산은 단편적 수량 데이터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으로 추계(estimate)라기보다는“guestimate”혹은“통제된 추측(controlled conjecture)”에 불과하다. 셋째, Maddison은 1911-38년의 1인당생산을 backward projection을 통해 1990년의 국제 평균가격(Geary-Kharmis dollar)으로 표시했는데, 한 세기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쳐 backward projection을 하는 경우 교역조건의 변화와 산업구조의 변화에 기인한 바이어스가 발생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Maddison(1995)에 따르면, Geary-Kharmis 달러로 환산했을 때 1인당 생산은 식민지 타이완보다 조선에서 더 높은데, 袁堂軍∙深尾京司∙馬德斌(2003)이 계산한 두 지역의 물가지수를 이용해 두 지역의 명목 1인당 생산을 각각 나누어 보면 타이완의 생활수준이 현저히 높다. 이는 backward projection에 따른 바이어스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는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backward projection이 아니라) 1940-53년 물가 데이터를 근거로식민지 조선과 1953년 이후 남한의 1인당 생산을 비교하겠다. 그리고 1941-52년은 충분한 자료가 없으므로 무리한 추계는 시도하지 않겠다.

조선은행(1950년 한국은행으로 개명)은 해방 후에도 계속 1936년부터 연결되는 물가시계열을 작성하고『경제연감』등에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1936년에 비해 1953년에는도매물가 수준이 23,925배, 소매물가 수준이 30,220배, 명목임금 수준이 23,731배가 되었다. 도매물가와 소매물가 증가율의 이런 차이가 생겨난 것은 소매물가에는 중간투입재가격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최종소비재 가격만 반영되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가격 통제와 전후 통제 해제에 따른 급속한 인플레이션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소매보다는 도매물가지수가 GDP 디플레이터에 가깝지만, 도매물가지수에는 서비스상품 가격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서비스산업은 매우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므로 서비스 가격은 명목임금의 추이를 따라 변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명목임금 변화율은 도매물가 변화율과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도매물가지수를 디플레이터로 사용해서 1953년 이후의 1인당 생산을 1935년 가격으로 변환했다.다음으로 이렇게 도출된 1953-59년 평균 1인당 소득과 (1990년 미국 달러로 표시된)Maddison(2001)의 1953-59년 평균 1인당 소득 사이의 비율을 적용해서 1935년 㞛으로표시된 1인당 소득을 1990년 미국 달러로 환산했다.

그림 13-3은 이렇게 계산한 1911-2003년의 1인당 생산의 추이를 보여준다. 여기서우선 눈에 띄는 것은 1953년 남한의 1인당 소득은 1940년에 비해 30% 정도 하락해서1920년대 중엽의 수준으로 되돌아 갔다는 사실이다. Angus Maddison의 숫자도 해방 후남한의 1인당 소득이 해방 전에 비해 하락했음을 보여 주는데, 장하준(2005)과 허수열(2005)은 이것이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이 일본인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인당 소득이 감소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펼 수는 없다.왜냐하면 1941-52년에는 해방뿐 아니라 남북분단, 한국전쟁과 같은 커다란 정치적 충격이 발생했고, 이것이 생활수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기간 동안의1인당 생산을 추계할 수 없고, 따라서 생활수준 하락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기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Maddison의 숫자가 보이는 것처럼 대부분의 하락이 일본인이 돌아가 버린 1945년에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식민지기 경제성장이 일본인들만을 위한것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1945년에는 해방뿐 아니라 남북분단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분단으로 지역간 분업 관련이 단절되었는데, 이것이 생산을 위축시켰을 것이다. 또 1944년이전의 1인당 생산은 남북 전체에 관한 것이고, 1945년 이후의 1인당 생산은 남한만에관한 것이므로 이 둘은 직접 비교 가능한 숫자가 아니다. 1930년대 공업화가 주로 북한지역에서 일어나면서 북한의 1인당 생산이 남한보다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해방 후 북한으로부터 남한으로의 인구유출로 두 지역 사이의 1인당 생산 갭은 더 커졌을것이다.

그림 13-3에 의하면, 남한에서 식민지 시대 말기의 생활수준이 회복되는 것은 1960년대 중엽이 되어서이다. 이후 남한에서는 고도성장이 일어나 1998년에는 1911년에 비해19배 정도의 1인당 소득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반면, 북한의 1인당 생산은 식민지기말기의 수준에서 한동안 정체하다가 1990대 들어 급격히 하락해서 오늘날 193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1911년의 1인당 생산추계를 이용해서 조선 후기의 1인당 생산수준이 어느 정도였을지추측해 볼 수 있다.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19세기에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졌으며,20세기 들어와 생활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연구들에 따르면, 1900년에는 1800년에 비해 마지기당 지주가 거둬 들인 소작료의 양이 반 이하의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이러한 각 계층의 소득감소는 1800년경의 1인당 생산 수준이 1911년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의미한다. 19세기의 경제후퇴 속도를 아주 느리게 잡아서 만일 1800년의1인당 생산이 1910년의 2배라고 한다면, 1800년의 1인당 생산은 1960년대 중엽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

이번에는 식민지의 1인당 생산 수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았을 때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또 1인당 생산 증가속도는 얼마나 빠른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우선1911-38년의 한국 1인당 생산은 1990년 미국 물가로 평균 893달러였다. 이는 1998년방글라데시의 835달러, 아이티의 816달러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의 1인당 생산은1911년 626달러였는데 1998년에는 12,152달러가 되어 한 세기 동안 20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림 13-4는 1911-2004년 한국의 1인당 생산과 미국 및 일본의 1인당 생산의 비율이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식민지 지배가 시작될 당시 한국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일본의 절반도 되지 못했고 미국 생활수준의 10분의 1을 좀 넘는 정도였다. 식민지기에 한국의 1인당 생산 증가속도는 일본에 비해 느렸고, 그래서 한국의 1인당 생산의 일본의 1인당 생산에 대한 비율은 서서히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 식민지기 조선의 1인당 생산 증가속도는 미국에 비해서 빨랐고,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생활수준 격차는 서서히 좁혀져 갔다. 한국전쟁을 거친 뒤 한국와 일본 및 미국 사이의 생활수준은 다시 크게벌어졌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의 생활수준 격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좁아져 오늘날 남한은 미국의 약 절반 정도의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해방 후 일본과의 격차는 계속 벌어져 1970년경 5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좁아져서 현재 남한의 1인당 생산은 일본의 3분의 2에 도달해 있다. 이런 소득수준의 수렴과 발산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흥미로운 탐구과제로 남아 있다.
출처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제13장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차명수 영남대 교수]

식민지시대의 경제성장 [차명수 영남대 교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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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수탈과 착취’했던 제로 섬 게임의 시대였고,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점점 더 못 살게 되고 일본 사람들은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휴전선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상식이 되어 있다. 그렇게 된 중요한 한 이유는 남북한 정부가 각각 검정한 역사 교과서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국민계정 추계는 이런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였다. 1941-45년의 전쟁기간에대해서는 1인당 생산을 추계할 수 없지만,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새로운 총생산 및 인구추계는 식민지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11-40년 동안에 1인당 생산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인당 생산 증가의 이면에서 일본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극단적 소득분배의 불평등화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의 소득이 일본 사람들의 소득보다는 느리게 증가했지만, 조선인들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향상되었다. 식민지기에는 전체 자산에서 일본인 소유 자산의 비중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권력이 조선인의 자산을 수탈해서 일본인들에게 분배하거나 조선인들이 가난해져서 자산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넘긴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유입된 일본 자본이 한국에 새로운 생산설비를 건설하고 자본스톡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필자는 이런 사실들이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 역사 교과서가 입을 모아 가르치고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런데최근의 경제사 연구는 18, 19세기에 인구는 정체했으며 생활수준은 하락했을 가능성이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인구가 매년 1.33%, 1인당 생산이 2.37%의속도로 증가했던 것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이는 남북한 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 후기는 정체, 식민지기는 발전의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193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상당 규모의 자본이 북한지역에서 축적되었는데, 해방 후남한은 북한지역의 자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1950년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 남아 있던 자본마저 상당 부분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허수열(2005)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남한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보려는 것은 무리이며, 두 시기는단절된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식민지 과거와 최근 반 세기는 공장이나 철도처럼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끊기 어려운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사망력 변천은 결국 해방 후 남한의출산력 변천을 가져오고, 이는 부양률을 하락시켰다. 그 결과 저축률과 투자율 상승이 급속히 상승하고 빠른 자본축적이 진행되면서 고도성장이 진행되었다.

둘째, Acemoglou,Johnson & Robinson(2001)은 유럽 국가들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는 식민지기의 제도가 독립 후에도 유지 존속되어 독립 후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요한 한 이유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근대적 엘리트들이 독립 이후에 자신들의 모태가 된 식민지기의 제도를 유지시킬 강한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남한 경제발전의 토대가 된 근대적 시장경제 체제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것이었다(Cha2000). 그리고 식민지기에 출현한 장교, 관리, 판사, 검사, 경찰들은 해방 후 남한의 시장경제 체제를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려는 북한군과 빨치산의 노력을 저지한 핵심적세력이 되었다.

셋째, 식민지기에는 근대교육이 보급되고 근대적 행정 사법 기구, 공장에 취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인적 자본이 축적되었다. 식민지기의 문맹률 감소, 취학률 증가, 조선인 기술자∙기능공∙숙련공 증가가 이를 보여주는 지표인데(古㼓 1996; 안병직1993), 인적 자본스톡의 크기와 증가속도를 측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식민지 시대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일어났다는 말은 식민지 통치가 근대적 경제성장을가져왔다는 말과는 다르다. 맬더스적 정체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이행은 한국합병이전, 갑오개혁 이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1898년부터였다. 지대와 임금의 하락이 멈추고 상승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이우연 2001; 차명수 2001). 실질 논가격 하락추세가 상승 추세로 반전된 것은 이보다 더 빠른 1880년대였다(차명수∙이헌창 2004:161, 그림 7-A).

그러나 이는 내재적 발전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밖으로부터의 근대문명의 충격과 이에 자극을 받은 위로부터의 개혁의 결과였다. 우선, 청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이 급증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조선에 대한 토지 투자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가지고 온 일본품종 벼가 1890년대 후반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이는 1900년경 이후의 지대와 임금의 하락 추세를 상승 추세로 반전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오두환 985: 337-38). 둘째,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놓인 조선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증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보건위생 개선정책을 실시했다(신동원 1996).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기전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맬더스의 덫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빨라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선진 생산기술의 전파를 가로막는 장벽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1910년 합병은 이 장벽들을 거의 완전히 무너뜨렸다. 식민지 지배와 함께 외국인(특히 일본인)들의 대조선 투자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political risk)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자본유입이 증가했을 것이다. 또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자본이동뿐 아니라 노동력 이동도 급격히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술자와 숙련 노동자들의 조선유입, 조선인노동자들의 일본 이민을 통해 기술전파 속도는 더욱 빨라졌을 것이다. 식민지기 무역은완전한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던 개항기에 비해서는 보호무역주의적이었지만, 1950,1960, 1970년대의 남한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무역주의적이었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도입하고, 근대적 재정통화제도를 확립했다.아울러 조선총독부는 철도, 도로, 항만, 교통, 통신 설비를 확충해 나갔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원배분을 효율화하고 기술습득 및 개발을 자극함으로써경제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세율인상을 통한 세수확대, 일본 자본시장에서의 자본도입을 통해 공공투자를 늘려 나갔는데, 이는 총 투자율을 올림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했을것이다. 일본정부가 제공한 보충금 등의 경상 이전과 사업공채의 발행은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총독부의 재정 상황을 호전시켜 공공투자 확대를 도왔을 것이다.
출처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제13장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차명수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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