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2- 대한국 국제 (국사 교과서 p112)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 만에 환궁한 후, 대한 제국을 수립하였다(1897).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대한국 국제>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 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군권을 침해하면 신민의 도리를 잃은자로 인정 한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를 정하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한다.
제8조 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 임면을 행하고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의 수여 ,혹은 체탈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참고자료--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발췌)
1868년 3월 메이지 천황(天皇)은 구게(公家)와 다이묘(大名)를 이끌고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대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個條의 御誓文)을 발하였다. 여기에서는 회의를 열어 여론을 바 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과 언론활동을 활성화하는 것 등이 제창되었다. 이에 따라, 일 본이 서양의 문명을 받아 들여 근대적인 입헌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길이 열렸다.

<5개조의 서문(五箇條의 御誓文)>
1. 널리 회의를 시행하여 나라의 모든 중요 사항은 공론(公論)으로서 결정할 것
2. 상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히 나라의 정치를 행할 것
3. 문무백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이 없도록 할 것
4. 구래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세상의 법도를 따를 것
5.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고 황도(皇道)의 기초를 진작시킬 것
출전 : 일본 역사교과서

-13- 국권의 상실 (국사 교과서 p113)

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전쟁, 1904).
대한 제국은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었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 제국을 보호국으로 하였다 (1905).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국제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자,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를 해산하였다(1907). 그리고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 제국을 합병하었다 (1910).

북한은 일제시절보다도 더 못산다 !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지난 해(2001년) 펴낸 安秉直(안병직) 편 「韓國經濟成長史(한국경제성장사)」에서 영남대학교 차명수교수가 쓴「제1장. 우리나라의 생활수준, 1700-2000」엔 재미 있는 대목이 있다.
<남한이 식민지 시대에 지펴진 근대적 경제성장의 불씨를 상당한 규모의 모닥불로 키워낸 데 비해 북한은 이 불씨를 비벼 끄고 飢餓(기아)와 질병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木村光彦(기무라 미츠히코)(1998:10)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하루 식량소비는 2차대전 발발 직전 756g에서 1984년 약800g정도까지 증가한 뒤 1996년에는 540g으로 하락했다. 식민지 시대의 쌀임금(임금을 쌀값으로 나눈 값으로서 생활수준을 보여준다)이 하루 2.5되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었는데 1인당 식량소비와 쌀임금 수준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1996년의 북한 하루 쌀 임금은 약1.8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 남한의 10분의 1정도, 조선시대에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19세기말의 수준과 비슷한 것이다. 남한과 식민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적 후퇴는 무엇보다도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인 私的(사적) 소유권과 市場(시장)을 파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정권은 시장을 파괴한 대신 1937년 전쟁체제로의 돌입과 함께 등장했던 통제경제체제를 계승해서 이를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포장했다(Kimura 1999)>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은 18세기초부터 계속해서 악화되어 1900년경에 최악의 바닥에 이르렀다고 한다. 車(차)교수는「조선 후기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농업생산성의 지속적 저하였으며 농업생산성 감퇴 원인은 수리시설의 퇴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水利시설의 쇠퇴는 지배 및 행정 체제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즉 조선조 末期(말기) 순조 현종 철종 고종 시대에 오면 행정력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방치할 뿐만 아니라 못 제방 등 水利시설을 제대로 손보지 않아 농산물의 생산이 격감했다는 뜻이다. 200년에 걸친 이런 下落의 끝은 일본에 의한 朝鮮倂合(조선병합)이었다. 생산력이 악화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니 강력한 군대도 유지할 수 없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1900년 무렵부터 생활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車(차)교수는 「일본에서 새로운 볍씨가 도입되고 우리나라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水利시설을 재건, 확충하면서 비로소 (생활수준의) 하강이 중단되고 상승으로의 反轉(반전)이 일어났다」고 썼다.
日帝(일제)에 의해 생활수준의 향상이 일어났다는 지적이다. 인정하기 싫은 현상이지만 이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19세기말 조선조 시절의 수준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이다. 1995년부터 약5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수백만 명이 북한에서 굶어죽었으니 19세기말보다 못한 생활수준이란 말이 맞다. 19세기말의 생활수준은 18세기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악일 것이다.

생활수준뿐 아니라 인권탄압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역사의 어느 왕이 김일성 김정일처럼 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가두어놓고 유태인 학살 같은 인간도륙을 강행했던가. 어느 왕이 주민들의 국내 여행을 제한했던가. 어느 왕이 수백만 명을 굶겨죽이면서 자신과 그 측근들은 곰발바닥요리를 먹고 한 병에 수천 달러 하는 최고급 꼬냑을 마시며 즐겼던가. 어느 왕이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 공갈을 일삼았던가.
생활수준이 역사상 최악이었다는 것은 지배층의 능력도 최악이고 그들의 인간성도 최악이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로 북한주민들은 심하게 말하면 난쟁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북한주민들의 키는 남한사람들보다 평균 7-10cm가 작고 몸무게는 15-20kg이 가볍다고 한다. 한 탈북 청년은 「누가 나를 난쟁이로 만들었습니까」라고 항변했다.
인간도륙에다가 인간변종까지 일으킨 김정일을 부를 때 나는 평소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守舊反動(수구반동) 세력」이라고 못박곤 한다. 이는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의해 실증된 셈이다. 인류가 풍요와 자유를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북한을 우리 민족사상 가장 가난했던 19세기말보다 더 낙후된 상황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놓은 者(자), 그가 바로 守舊(수구)반동인 것이다.
이 자에게 굴종한 자, 이 자에게 약점이 잡혀 국가이익과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자, 이 자에게 군자금을 대준 자, 이 자를 진보니 민족주의 세력이니 하면서 편든 자들은 지금부터 반드시 그 代價(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가 권력자이든 교수이든 언론인이
든 상관해선 안된다.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가 아니라 그가 어느 자리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오직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했느냐의 여부를 기준하여 심판할 것이다. 親(친)김정일은 親日(친일)보다도 몇배 더한 범죄이다. 親(친)김정일 인사들의 言動(언동)을 정리하여 단죄받도록 하는 일은 나치 戰犯者(전범자)를 단죄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잔인한 자를 동정한 자는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전 : 日帝통치가 100년째 이어지고 있는 곳

“일본의 한국 통치에 관한 세밀한 보고서”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인정할 수 없는 도발적 주장 담아
보통의 한국인들이 읽는다면, 동의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많은 책이다. 그러나 1900년을 전후해서 극동의 식민통치를 연구했던 미국의 행정학자가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본 일본의 식민정책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책의 첫 장부터 한국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한 끝에 필자는 이전의 왕조시대 및 같은 민족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던 그 어느 때보다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지금 한국의 통치가 훨씬 더 잘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가?’라고 분노하는 사람들이라면 찬찬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이런 책이 ‘그들이 본 우리’라는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자유로워진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펴는 책을 소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통념과 다른 소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에 체류한 경험이 있고 한국뿐 아니라 영국이나 포르투갈이 주도하던 식민통치를 비교했던 학자라면 넓은 시각에서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읽으면 된다.

저자는 우리들의 상식이나 역사 지식과 달리 1920년을 전후해 “한국 국민의 전반적인 생활여건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함으로써 한국이 눈에 띄게 번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악랄한 일제 치하에 대해 우리가 배운 역사적 사실에 미뤄보면 저자의 주장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과연 우리가 배운 진실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초가 되는 행정조직에서부터 예산제도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어떻게 주관하고 도입했는지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18년 한국의 보통학교 수는 466개였다. 이 숫자는 1922년이 되면 890개로 늘어나고 정부지출 역시 183만5000엔에서 1330만9000엔으로 8배나 늘어난다. 1918년을 기준으로 교육비 가운데 10%를 한국인들이 부담하고 나머지는 정부보조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물론 정부보조금이 어디서에서 어떻게 염출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총독부가 ‘최소 세 개 면당 학교 하나씩’을 기준으로 학교 증설을 추진한 점이 인상적이다.

외국인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통치
이런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가 가혹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가혹한 일제 치하라는 주장과 동시에 이 같은 통계자료에도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감옥행정에 대한 자료 역시 흥미를 끄는데 구한국 정부의 감옥을 이렇게 평한다.

조선시대 감옥

조선시대 감옥

“구한국 정부에서 감옥은 대다수 동양 국가들의 감옥과 마찬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끔찍하다. 위생 설비가 부족했고 수감자에 대한 극심한 학대는 흔한 일이었으며 초만원 상태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편 일제 치하에 들어간 이후의 감옥 상황을 두고 저자는 “매년 감옥이 늘어나고 여건이 개선된 결과 적어도 대형화된 감옥은 다른 나라의 감옥에 필적할 만했고, 미국 내 대부분의 감옥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일본의 초기 통치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조선 말엽과 같은 부패와 무능이 지속되는 한 한국인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없었을 거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이라면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조선은 스스로 자신을 탈바꿈시켜서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소수 의견을 내기는 힘들 것이며, 아마도 소수 의견이 있다면 저자의 견해와 동일할 것이다.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만, 외국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봤을까 하는 관점에서 추천할 만한 책이다.
출전 : [매경이코노미 제1503호(09.04.29일자) 기사]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