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 동학 농민 운동 (국사 교과서 p110)

1860년대에 등장한 동학은“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사상에 기초한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 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지만, 조선 관군과 일본군과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9-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국사 교과서 p110-111, p233)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

일본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각한 개화파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개혁, 1894).

갑오개혁에서는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 또, 조혼이나 과부의 재혼 금지, 인신 매매, 고문, 연좌제(*1) 같은 악습도 없앴다. 아울러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만들었으며,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사법 제도의 기틀도 마련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2)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민왕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민왕후 시해 사건, 1895).
이 사건 후 개화파 김홍집 내각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려 한 개혁이었다.


읽기자료 〈갑오개혁 때 추진된 사회 개혁〉
ㆍ문벌에 따른 차별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고, 귀천의 구별 없이 인재를 뽑아 등용한다.
ㆍ지금까지 내려온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차별을 폐지한다.
ㆍ공·사노비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ㆍ연좌법을 모두 폐지하여 죄인 자신 외에는 처벌하지 않는다.
ㆍ남녀의 조혼을 엄금하여,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에 혼인을 허락한다.
ㆍ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자유에 맡긴다. 〈일성록, 갑오년(1894) 6월 28일조〉

(*1) 연좌제(緣坐制)
친척이나 인척의 범죄 때문에 죄 없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는 제도.

(*2) 삼국 간섭
한반도와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사건

-10- 아관 파천 (국사 교과서 p111, p176-177)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양반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김홍집 내각의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아관 파천, 1896), 친러파가 정권을 잡자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다. 세상이 뒤바뀐 날 아침, 김홍집은 고종을 만나 뵈러 광화문을 걷다가 친일파로 지목되어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김홍집은 여러 차례 내각을 맡으면서 관제를 바꾸고, 법률과 사회 제도를 고쳤다. 또 양력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는 등 우리 나라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아관 파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는 러시아 인을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광산 채굴권이나 삼림 벌채권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운산 금광 등 광산 채굴권과 철도, 전기 등의 이권을 차지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도 여러 이권을 차지하였다. 일본은 남북을 연결할 철도 부설에 주력하였는데, 결국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를 부설 하였다.

-11- 독립 협회 (국사 교과서 p112)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창간하여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 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읽기자료 〈독립 신문〉관민 공동회의 헌의 6 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그런데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 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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