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독도를 넣을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Category :
【 독도 】
Tag :
한국도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 승전국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국가"로 간주되어 참여를 거부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아무 역할도 없었던 나라라는 것이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는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초청받지 못했다.
미국이 준비한 대일 강화 조약 문안 중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제2조 a항) 는 내용이 있었다. 주미 대사 양유찬이 이끌었던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쓰시마(대마도)까지 보탤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독도와 파랑도를 넣을 것을 다시 요구했다가 또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은 두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구를 제출했던 일등서기관 한표욱은 위치의 질문에 "일본해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he b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ungdo.)
독도의 위치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다케시마'란 이름만 댔으면 바로 확인됐을 것이다. 그런데 전설의 섬 파랑도와 함께 "그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요구하는 쪽에서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는데 요구받는 쪽에서 알뜰히 찾아줄 리가 없다. 독도 표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에서 이런 경위를 밝힌 다음 762~763쪽에 이런 논평을 붙였다.
한국 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년 7월 19일)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 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 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 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 협의(1951년 7월 19일)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1951년 7월 한미 간의 협의 내용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가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 주장하고 싶은 방향에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미워하기만 하기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원문 : "독도는 일본 땅" 근거는 이승만이 제공했다! 김기협 역사학자
미국이 준비한 대일 강화 조약 문안 중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제2조 a항) 는 내용이 있었다. 주미 대사 양유찬이 이끌었던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쓰시마(대마도)까지 보탤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독도와 파랑도를 넣을 것을 다시 요구했다가 또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은 두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구를 제출했던 일등서기관 한표욱은 위치의 질문에 "일본해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he b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ungdo.)
독도의 위치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다케시마'란 이름만 댔으면 바로 확인됐을 것이다. 그런데 전설의 섬 파랑도와 함께 "그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요구하는 쪽에서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는데 요구받는 쪽에서 알뜰히 찾아줄 리가 없다. 독도 표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에서 이런 경위를 밝힌 다음 762~763쪽에 이런 논평을 붙였다.
한국 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년 7월 19일)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 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 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 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 협의(1951년 7월 19일)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1951년 7월 한미 간의 협의 내용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가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 주장하고 싶은 방향에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미워하기만 하기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원문 : "독도는 일본 땅" 근거는 이승만이 제공했다! 김기협 역사학자
'독도는 한국 땅' 뒤집는 옛 문서 발견.
Category :
【 독도 】
Tag :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한국의 주장을 뒤집는 고지도들이 발견됐다고 교도통신이 22일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독도가 한국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한국 고지도들이 발견돼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전했다.
이 지도들은 한국에서 독도 문제를 연구하는 미국인 게리 리버스씨(51)가 발견, 일본 산잉신문(山陰中央新報社)에 투고했다. 그가 전달한 지도 가운데는 일본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지도도 있어 전문가들이 주목하고 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이 미국인은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1905년 이전의 한국 문서나 지도에 독도 표기가 없으며 독도의 옛날 이름이 고문헌이나 고지도에 '우산도(于山島)'로 기록돼 있다는 한국의 주장에 주목했다. 제보자는 이를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옛날 지도 3장을 증거 자료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 연대 미상의 한 지도에는 울릉도 동쪽에 그려져 있는 작은 섬을 이른바 '우산도'라고 적힌 글 밑에 '해장죽전(海長竹田)'이란 말이 쓰여 있다. 제보자는 '해장(海長)'은 대나무 종류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우산도'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불모의 바위 덩어리인 독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1834년 제작된 지도에 표시된 거리를 판단하는 눈금에 주목했다. '우산도'를 나타내는 '우산(于山)'은 울릉도에서 4㎞ 떨어진 섬으로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 부속섬 죽서(竹嶼)는 것이 그의 주장.
일본의 한 독도 전문가는 "한국 거주자만이 조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라며 "특히 '해장죽전'이라고 적힌 지도는 '우산'이 독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증거"라고 평했다. 제보자는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을 계기로 한국 내 반일 감정이 높아졌던 일에 의문을 품고 이 문제를 연구했다고 말했다.
출처 : 뉴시스 2007년 2월 22일
이 지도들은 한국에서 독도 문제를 연구하는 미국인 게리 리버스씨(51)가 발견, 일본 산잉신문(山陰中央新報社)에 투고했다. 그가 전달한 지도 가운데는 일본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지도도 있어 전문가들이 주목하고 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이 미국인은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1905년 이전의 한국 문서나 지도에 독도 표기가 없으며 독도의 옛날 이름이 고문헌이나 고지도에 '우산도(于山島)'로 기록돼 있다는 한국의 주장에 주목했다. 제보자는 이를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옛날 지도 3장을 증거 자료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 연대 미상의 한 지도에는 울릉도 동쪽에 그려져 있는 작은 섬을 이른바 '우산도'라고 적힌 글 밑에 '해장죽전(海長竹田)'이란 말이 쓰여 있다. 제보자는 '해장(海長)'은 대나무 종류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우산도'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불모의 바위 덩어리인 독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1834년 제작된 지도에 표시된 거리를 판단하는 눈금에 주목했다. '우산도'를 나타내는 '우산(于山)'은 울릉도에서 4㎞ 떨어진 섬으로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 부속섬 죽서(竹嶼)는 것이 그의 주장.
일본의 한 독도 전문가는 "한국 거주자만이 조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라며 "특히 '해장죽전'이라고 적힌 지도는 '우산'이 독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증거"라고 평했다. 제보자는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을 계기로 한국 내 반일 감정이 높아졌던 일에 의문을 품고 이 문제를 연구했다고 말했다.
출처 : 뉴시스 2007년 2월 22일
독도는 왜 일본땅인가?
Category :
【 독도 】
Tag :
먼저 독도와 관련해서 최근에 나온 신문기사를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동아일보 2006년 1월 18일자 기사입니다.
------------------------------------------------------------------
1952년 이승만 평화선 선포: 1952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뒤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다. 바로 이날 바다 건너, 전화(戰火)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톤.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동아일보 여규병 기자 2006.1.18]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1951년 9월 8일에 조약참가국 49개국이 모두 서명을 마치고 1952년 4월 28일부터 발효에 들어간, 태평양전쟁을 마무리지은 대규모의 국제조약입니다. 일본은 이 조약이 발효에 들어간 날부터 다시 독립국이 되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미군이 통치하는 점령지역이었을 뿐 국가로서의 기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시 전쟁중이었고, 부산에 임시정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진행되던 중 내내 미국을 상대로 해서 한국도 조약당사국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한국도 전승국이라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이런 생떼 어거지 주장을 받아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조선)인들은 대동아전쟁 중 일본인들보다도 (물론 당시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국적을 갖고 있었던 일본인입니다만, 여기에서 일본인은 내지의 원래 일본인만을 지칭합니다) 더 열심히 싸웠던 '일본령 조선'이라는 것을 연합국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승국이 되겠습니까. 한국은 일본과 같은 패전국이었을 뿐입니다.
연합국들에 의해 조약당사자로 참가해달라는 생떼도 안먹히고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도 끼워달라는 생떼도 안먹히고 그래서 결국 1952년 4월 28일이면 일본은 다시 자주국가가 되고 독도는 일본령으로 편입될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승만은 향후 진행될 국교협상에 더 많은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독도를 강제점령하고 일본 어부 4천여명을 부산으로 납치했던 것입니다. 위 기사를 보면 이것이 저의 독단적인 창작소설이 아니라 널리 인정된 역사적인 사실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선은 1965년 한일국교협상이 타결됨으로 인해 실효되었고 따라서 당연히 독도도 다시 일본에 반환했어야 하는데 박정희는 여전히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 이후 아직까지도 한국은 독도를 강점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강점이 아니라 평화적인 조약에 의해 합병된 것이기때문이죠. 그리고 한일합병에는 조선인들의 총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도강점이라는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엄연히 국제적인 조약으로 인정된 인접국의 영토를 강제로 점령한 뒤 돌려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네이버에서 독도 이렇게 한번 쳐 보십시오. 지식in 에 보면 독도에 관한 여러가지 질문과 답변이 있습니다. 질문은 대체로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는? 뭐 이런 것이지만 논리적인 답변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답니다." 이런 식이죠. 독도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비이성 몰합리 군중심리가 지배하는 전형적인 파쇼국가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독도문제를 둘러싼 여러가지 사인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출전 : 독도는 왜 일본땅인가?
동아일보 2006년 1월 18일자 기사입니다.
------------------------------------------------------------------
1952년 이승만 평화선 선포: 1952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뒤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다. 바로 이날 바다 건너, 전화(戰火)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톤.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동아일보 여규병 기자 2006.1.18]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1951년 9월 8일에 조약참가국 49개국이 모두 서명을 마치고 1952년 4월 28일부터 발효에 들어간, 태평양전쟁을 마무리지은 대규모의 국제조약입니다. 일본은 이 조약이 발효에 들어간 날부터 다시 독립국이 되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미군이 통치하는 점령지역이었을 뿐 국가로서의 기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시 전쟁중이었고, 부산에 임시정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진행되던 중 내내 미국을 상대로 해서 한국도 조약당사국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한국도 전승국이라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이런 생떼 어거지 주장을 받아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조선)인들은 대동아전쟁 중 일본인들보다도 (물론 당시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국적을 갖고 있었던 일본인입니다만, 여기에서 일본인은 내지의 원래 일본인만을 지칭합니다) 더 열심히 싸웠던 '일본령 조선'이라는 것을 연합국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승국이 되겠습니까. 한국은 일본과 같은 패전국이었을 뿐입니다.
연합국들에 의해 조약당사자로 참가해달라는 생떼도 안먹히고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도 끼워달라는 생떼도 안먹히고 그래서 결국 1952년 4월 28일이면 일본은 다시 자주국가가 되고 독도는 일본령으로 편입될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승만은 향후 진행될 국교협상에 더 많은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독도를 강제점령하고 일본 어부 4천여명을 부산으로 납치했던 것입니다. 위 기사를 보면 이것이 저의 독단적인 창작소설이 아니라 널리 인정된 역사적인 사실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선은 1965년 한일국교협상이 타결됨으로 인해 실효되었고 따라서 당연히 독도도 다시 일본에 반환했어야 하는데 박정희는 여전히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 이후 아직까지도 한국은 독도를 강점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강점이 아니라 평화적인 조약에 의해 합병된 것이기때문이죠. 그리고 한일합병에는 조선인들의 총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도강점이라는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엄연히 국제적인 조약으로 인정된 인접국의 영토를 강제로 점령한 뒤 돌려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네이버에서 독도 이렇게 한번 쳐 보십시오. 지식in 에 보면 독도에 관한 여러가지 질문과 답변이 있습니다. 질문은 대체로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는? 뭐 이런 것이지만 논리적인 답변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답니다." 이런 식이죠. 독도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비이성 몰합리 군중심리가 지배하는 전형적인 파쇼국가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독도문제를 둘러싼 여러가지 사인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출전 : 독도는 왜 일본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