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세계의 기적∙고도경제성장
[ 고도경제성장 ]
일본의 경제는 1960년 경부터 거의 10년간 연평균 10%라고 하는, 세계역사에서도 거의 찾을 수 없는 기적이라 불려지는 성장을 지속하였다. (고도경제성장) 1968년에는 국민총생산(GNP)이 자유주의 진영에서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위가 되었다. 소니와 혼다, 도요타 등의 세계적인 기업이 성장하였다. 중소공장의 현장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과 발명의 축적도 산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속도로망과 신칸센(新幹線)이 정비되고, 서민 생활에도 전화제품(電化製品, 역주: 전기제품)과 자동차가 보급되었다. 농촌도 풍요로워지고, 쌀은 과잉 생산이 되어 경지 면적을 줄이는 정책이 취해질 정도가 되었다. 세계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도 향상되어, 1964(쇼와 39)년에는 도쿄올림픽이, 1970년에는 오사카(大阪)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러한 것들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 고도성장 후의 사회와 경제 ]
1960년대 후반부터 공장의 연기와 배수(排水)와 같은 산업폐기물에 의한 공해가 문제가 되었다. 미나마타병(水俣病)이나 욧카이치(四日市) 천식 등의 공해병,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의한 대기오염, 가정에서 쓰는 세제에 의한 하천의 오염 등의 해결이 요구되었다. 이에 대해 1971년 환경청이 설치되고 공해방지 대책이 취해져서 상황은 개선되어 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중동의 산유국이 석유 수출을 규제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석유에 에너지원을 의존하는 일본 경제는 두 번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위기) 그러나 이로 인해 전기제품의 소비 전력을 극도로 줄이는 등의 에너지 절약 기술이 발달하여 일본 경제는 오히려 강해지고 그 후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 외교 관계의 진전 ]
1965년, 일본은 한국과 일한기본조약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하고 유상 2억 달러, 무상 3억 달러의 경제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의 시정하에 있던 오키나와에서는 조국 복귀 운동이 활발해졌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은 비핵 3원칙(*1)을 표명하고 핵병기 없이 기지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동의를 미국으로부터 얻어내, 1972(쇼와 47)년 5월 오키나와 본토 복귀가 실현되었다.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에 대한 견제로 중화인 민공화국에 접근하여 양국 관계는 정상화를 향했다. 그에 이어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방중(訪中)하여 일중공동성명에 조인함으로써 양국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대만의 중화민국과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 후 1978년에는 일중평화 우호조약이 맺어졌다.
(*1) 핵병기를 「보유하지 않고」「만들지 않고」「반입하지 않고」의 3가지. 사진: 일중 국교 정상화 오른쪽부터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82 공산주의 붕괴 후의 세계와 일본의 역할
[ 베를린 장벽의 붕괴 ]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퇴한 뒤 소련은 군사력을 증강시켜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1979년 말에는 아프가니스탄을 군사침공하였다. 미국은 1981년에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해 소련에 대한 대규모의 군비확장(군확[軍擴]) 경쟁을 시작하였다. 소련은 이 경쟁에 견디지 못하고 점차 경제를 파탄시켜 갔다.
1985년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정권이 탄생하여 시장경제의 도입과 정보공개에 의한 소련 사회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 국내는 오히려 혼란해져 동구에서도 자유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은 허물어지고 이듬해 서독은 동독을 통합하였다.
[ 미∙소 냉전의 종결 ]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 확대 경쟁을 단념하고, 1989년 미∙소의 수뇌는 냉전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소련 공산당은 활동을 정지하고, 1991년에는 새롭게 독립국가공동체(CIS)가 결성되어 소련은 붕괴하였다. 또한 동구 나라들에서도 잇달아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어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해체되었다.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에 의해 약 70년간에 걸친 공산주의의 역사에서의 실험은 결착을 보았다. 이 체제는 사람들에게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 못하고, 언론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인 권리 또한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다.
[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
1989년 1월 7일, 쇼와천황이 붕어(崩御)하셨다. 60여년에 걸친 격동의 쇼와시대는 막을 내렸다. 황태자 아키히토친왕(明仁親王)이 즉위하고 새로운 연호는 헤이세이(平成)로 정해졌다.
[ 국제 사회에서의 일본의 역할 ]
1990년 8월, 이라크군이 갑자기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이듬해 1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군과 싸워 쿠웨이트에서 그들을 철퇴시켰다(만안전쟁[灣岸戰爭]). 이 전쟁에서 일본은 헌법을 이유로 군사 행동에는 참가하지 않고, 거액의 재정 원조로 크게 공헌했 지만, 국제 사회는 그것을 평가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국제 공헌 방법에 대해 심 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로 세계 규모의 전쟁 위험은 사라졌지만, 일부에 공산주의 국가가 남아 있고, 또 민족이나 종교 대립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 분쟁도 없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한 가운데,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일본이 자국의 안전을 확실히 확보하면서 금후 세계 평화와 번영에 어떻게 공헌해 가야 할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 북조선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사람들 (2002. 10. 15) 2002년 9월, 방조(訪朝)한 일본 수상에게 북조선(북한)은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 후 납치 피해자 일부는 귀국했지만, 여전히 납치된 것으로 생각되는 다수 일본인의 소식이 불명이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Supremacy" by Theodore Lothrop Stoddard 미국 역사학자
Now four hundred years of unbroken triumph naturally bred in the white race an instinctive belief that its expansion would continue indefinitely, leading automatically to ever higher and more splendid destinies.
Before the Russo-Japanese War of 1904 the thought that white expansion could be stayed, much less reversed, never entered the head of one white man in a thousand.
(p.153)
1900 was, indeed, the high-water mark of the white tide which had been flooding for four hundred years.
At that moment the white man stood on the pinnacle of his prestige and power.
Pass four short years, and the flash of the Japanese guns across the murky waters of Port Arthur harbor revealed to a startled world the beginning of the ebb.
출전 : "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supremacy" p.149, p.153
독도가 고대부터 한국 땅이라는 논리적 근거. 역사서와 고지도 등을 통한 역사적 사실.
"조선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부분 | 큰 섬이 울릉도이고 오른쪽 우산(于山)이라 쓰인 섬이 독도이다."
독도가 고대부터 한국 땅이라는 논리적 근거
1. 역사서에 우산도가 한국땅이라고 쓰여져 있다.
2.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다.
1145년 <삼국사기> 三國史記 권4 [→원문 전문보기(PDF)]
十三年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為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欝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飡異斯夫 為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来 可以討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 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13년 여름 6월,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계락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1145년 <삼국사기> 三國史記 권44 列傳(열전) 4 異斯夫傳(이사부전) [→원문 전문보기(PDF)]
至十三年 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謨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孟獸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신라 지증왕13년(512년)에 이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 등 신라의 군사들은 우산국 사람들의 위세를 목우사자(木偶獅子: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를 이용하여 꺽음으로서 결국 우산국 사람들로부터 항복받기에 이르렀다.」
1417년 <태종실록> 太宗實錄 권33, 태종 17년 2월 5일(壬戌)조
按撫使金麟雨 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 男女幷八十六 麟雨之往還也 再逢颶風 僅得其生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 수우피(水牛皮) 생저(生苧) 면자(綿子) 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1451년 <고려사지리지> 高麗史 권58 地理3, 東界 蔚珍縣條
有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울릉도가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했고, 무릉, 우릉이라고도 한다.」
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일설에는 우산 무릉은 원래 두개의 섬으로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권153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稱于山國.
(우산무릉이도 재현정동해중 이도상거불원 풍일청명 즉가망견. 시라시칭우산국)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에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于山島 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岌嶪撑空 南峯稍卑 風日淸明則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歷歷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說于山鬱陵 本一島
「우산도 울릉도 무릉,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봉우리가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날씨가 맑으면 봉우리 꼭대기 나무와 산 아래 모래들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바람이 좋으면 이틀이면 가히 닿을 수 있다.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 섬이라고 한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팔도총도(八道總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붙어있다.
1603년 <천하여지도 (天下輿地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붙어있다.
1673년 <조선팔도도고금총람도 (朝鮮八道古今摠覽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북쪽에 붙어있다.
1699년 <여지도 (輿地圖)> 강원도도(江原道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남쪽에 붙어있다.
1736년 <여지도 (輿地圖)> 울릉도도(鬱陵島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쪽에 붙어있다.
1736년 <여지도 (輿地圖)> 울릉우산양도 (鬱陵干山兩島) ・・ 우산도 = 울릉도
1737년 <광여도 (廣輿圖)> ・・ 우산도 = 울릉도
1750년대 <대동총도 (大東總圖)> ・・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붙어있다.
1776년 <해동여지도 (海東輿地圖)>
1822년 <조선도 (朝鮮圖)>
1834년 <청구도 (靑邱圖)>
1861년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図)>
1872년 <청구도 (靑邱圖)>
1898년 <조선지도 (朝鮮地圖)>
1899년 <대한전도 (大韓全圖)>
현재의 지도 <죽도>
<죽도>
<죽도>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섬 · 대나무섬 · 댓섬 이라고도 불리는 섬
<울릉도와 죽도>
<울릉도와 죽도>
<독도>
<독도>
<독도>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 1898년 조선지도 (朝鮮地圖)
<울릉도(鬱陵島)와 죽도와 독도> 구글 지도 (Google Maps) 마우스를 이용해 독도를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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