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칼럼] 20세기의 전쟁과 전체주의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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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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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읽기 칼럼] 20세기의 전쟁과 전체주의 희생자
[ 전시국제법과 전쟁 범죄 ]
인류는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나 민족의 이해 충돌로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해 왔다. 그리하여 전쟁 방식을 국제적으로 약정한 룰의 제약하에 두고자 하는 지혜가 생겨났다. 그 룰을 전시국제법이라고 한다. 1906년 네덜란드에서 체결된 헤이그육전법규 (Hague 陸戰法規)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시국제법에서는 전투원 이외의 민간인을 살상하거나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를 학대하는 것은 전쟁 범죄로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이 룰은 완전히 깨졌다. 실제로는 전쟁에서 비무장한 사람들에 대한 살해나 학대를 전혀 하지 않은 국가는 없었다. 일본군도 전쟁 중에 침공한 지역에서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나 민간인에 대해 부당한 살해나 학대를 저질렀다.
[ 공습·원폭 투하와 시베리아 억류 ]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미국이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다수의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가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했다.
또한 소련은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만주에 침입하여 일본 민간인에 대한 약탈, 폭행, 살해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본 병사 포로를 포함한 약 60만 일본인을 시베리아로 연행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에 종사시켜 약 1할을 사망하게 했다.
[ 두 전체주의의 희생자 ]
나치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이는 나치스 독일이 국가로서 계획적으로 실행한 범죄로, 전쟁에 수반되는 살상은 아니었다. 또한 나치스는 자국의 장애인이나 환자를 주사 등으로 안락사시켰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한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에서는 부농박멸(富農撲滅)이라는 이름하에 다수의 농민이 처형되었고, 또 아사해야만 했다. 공산당 간부의 숙청도 거듭되었고, 후에는 정치범 수를 지역별로 할당하여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각국에 큰 피해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전쟁과는 다른 국가의 범죄로서 막대한 수의 희생자를 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전시국제법과 전쟁 범죄 ]
인류는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나 민족의 이해 충돌로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해 왔다. 그리하여 전쟁 방식을 국제적으로 약정한 룰의 제약하에 두고자 하는 지혜가 생겨났다. 그 룰을 전시국제법이라고 한다. 1906년 네덜란드에서 체결된 헤이그육전법규 (Hague 陸戰法規)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시국제법에서는 전투원 이외의 민간인을 살상하거나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를 학대하는 것은 전쟁 범죄로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이 룰은 완전히 깨졌다. 실제로는 전쟁에서 비무장한 사람들에 대한 살해나 학대를 전혀 하지 않은 국가는 없었다. 일본군도 전쟁 중에 침공한 지역에서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나 민간인에 대해 부당한 살해나 학대를 저질렀다.
[ 공습·원폭 투하와 시베리아 억류 ]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미국이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다수의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가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했다.
또한 소련은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만주에 침입하여 일본 민간인에 대한 약탈, 폭행, 살해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본 병사 포로를 포함한 약 60만 일본인을 시베리아로 연행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에 종사시켜 약 1할을 사망하게 했다.
[ 두 전체주의의 희생자 ]
나치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이는 나치스 독일이 국가로서 계획적으로 실행한 범죄로, 전쟁에 수반되는 살상은 아니었다. 또한 나치스는 자국의 장애인이나 환자를 주사 등으로 안락사시켰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한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에서는 부농박멸(富農撲滅)이라는 이름하에 다수의 농민이 처형되었고, 또 아사해야만 했다. 공산당 간부의 숙청도 거듭되었고, 후에는 정치범 수를 지역별로 할당하여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각국에 큰 피해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전쟁과는 다른 국가의 범죄로서 막대한 수의 희생자를 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읽기 칼럼] 도쿄재판에 대해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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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읽기 칼럼] 도쿄재판에 대해 생각하다
[ 국제법으로 본 도쿄재판 ]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전범(戰犯)으로 심판된 전쟁 중의 지도자들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 이하 7명이 교수형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는 「평화에 대한 죄」를 선고받았다. 이는 자위전쟁(自衛戰爭)이 아닌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죄로 삼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죄로 국가의 지도자를 벌하는 것은 그때 까지의 국제법 역사에는 없었다.
도쿄재판에서 유일한 국제법 전문가였던 인도의 펄 판사는, 이 재판은 국제법상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여 피고 전원에게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GHQ는 펄 판사의 의견서 공표를 금했고, 기타 일체의 재판에 대한 비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쿄재판에 대해서는 국제법상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견해나, 역으로 세계 평화를 향한 국제법의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었다고 하여 긍정하는 의견이 있어 오늘날에도 그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 전쟁에 대한 죄악감 ]
GHQ는 점령 직후부터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모든 것에 걸쳐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했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가를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은 도쿄재판과 나란히 일본인의 자국 전쟁에 대한 죄악감을 길렀고, 전후 일본인의 역사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79 점령 정책의 전환과 독립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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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79 점령 정책의 전환과 독립 회복
[ 국제연합과 냉전의 개시 ]
1945년 10월, 연합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에 서서, 새로운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 조직으로서 국제연합(국연)을 결성했다. 그러나 전쟁의 싹은 없어지지 않았다. 동유럽을 점령한 소련은 각국 공산당의 활동을 통해 서유럽에까지 공산주의의 영향을 끼치 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해 서유럽에 대규모 경제 원조를 하고, 1949 년에는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으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편 소련도 1949년에는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NATO에 대항해 1955년에 동구 여러 나라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결성했다.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어,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자 유주의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이 세력을 다투는 냉전 시대에 돌입했다.
중국에서는 일본의 패전 후, 그때까지 항일(抗日)로 손을 잡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國共內戰)을 재개했다. 1949년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 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도망을 갔다. 조선반도에서는 1948년, 남부에 미국이 지지하는 대한민국, 북부에 소련의 영향하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이 만들어져 대립했다. 이렇게 해서 냉전은 동아시아로 확대되었다.
[ 점령 정책의 전환 ]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의 경제 발전을 억제하는 정책을 전환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발전된 경제력을 갖는 자유주의 진영의 강력한 일원으로 키우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1950년 6월, 북조선은 남북 무력 통일을 목표로 소련의 지지하에 갑자기 한국을 침공했다. 한국군과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 주체의 국제연합군이 이를 반격했으나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여, 전쟁은 1953년에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전쟁, 역주: 한국전쟁) 일본에 주류하는 미군이 조선으로 출동한 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GHQ의 지령에 따라 경찰예비대(*2)를 설치했다. 또한 일본은 미군에 많은 물자를 공급하여 경제 는 활기를 회복하였다.
(*2) 후에 보안대, 이어 자위대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 조선전쟁
[ 독립 회복 ]
조선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기지 존속을 조건으로 일본의 독립을 서두르려고 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진영 48개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다. 또한 미국과 일미안전보장조약(일미안보조약)을 맺고 미군의 주류를 인정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여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다. (*3)
소련은 구나시리(國後), 에토로후도(擇捉島) 등 북방영토를 일본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소 간에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못하고, 1956년 10월에 일소공동선언으로 전쟁 상태를 종결시킨 후 국교를 회복했다. 이로써 소련의 반대가 없어져, 같은 해 12월 일본은 국제연 합에 가맹하여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3) 단, 오키나와는 계속해서 미국의 시정(施政)하에 놓였다.
[ 국제연합과 냉전의 개시 ]
1945년 10월, 연합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에 서서, 새로운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 조직으로서 국제연합(국연)을 결성했다. 그러나 전쟁의 싹은 없어지지 않았다. 동유럽을 점령한 소련은 각국 공산당의 활동을 통해 서유럽에까지 공산주의의 영향을 끼치 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해 서유럽에 대규모 경제 원조를 하고, 1949 년에는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으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편 소련도 1949년에는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NATO에 대항해 1955년에 동구 여러 나라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결성했다.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어,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자 유주의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이 세력을 다투는 냉전 시대에 돌입했다.
중국에서는 일본의 패전 후, 그때까지 항일(抗日)로 손을 잡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國共內戰)을 재개했다. 1949년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 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도망을 갔다. 조선반도에서는 1948년, 남부에 미국이 지지하는 대한민국, 북부에 소련의 영향하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이 만들어져 대립했다. 이렇게 해서 냉전은 동아시아로 확대되었다.
[ 점령 정책의 전환 ]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의 경제 발전을 억제하는 정책을 전환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발전된 경제력을 갖는 자유주의 진영의 강력한 일원으로 키우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1950년 6월, 북조선은 남북 무력 통일을 목표로 소련의 지지하에 갑자기 한국을 침공했다. 한국군과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 주체의 국제연합군이 이를 반격했으나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여, 전쟁은 1953년에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전쟁, 역주: 한국전쟁) 일본에 주류하는 미군이 조선으로 출동한 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GHQ의 지령에 따라 경찰예비대(*2)를 설치했다. 또한 일본은 미군에 많은 물자를 공급하여 경제 는 활기를 회복하였다.
(*2) 후에 보안대, 이어 자위대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 조선전쟁
[ 독립 회복 ]
조선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기지 존속을 조건으로 일본의 독립을 서두르려고 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진영 48개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다. 또한 미국과 일미안전보장조약(일미안보조약)을 맺고 미군의 주류를 인정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여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다. (*3)
소련은 구나시리(國後), 에토로후도(擇捉島) 등 북방영토를 일본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소 간에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못하고, 1956년 10월에 일소공동선언으로 전쟁 상태를 종결시킨 후 국교를 회복했다. 이로써 소련의 반대가 없어져, 같은 해 12월 일본은 국제연 합에 가맹하여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3) 단, 오키나와는 계속해서 미국의 시정(施政)하에 놓였다.
80 미∙소 냉전하의 일본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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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80 미∙소 냉전하의 일본과 세계
[ 냉전의 진행 ]
일본이 독립을 회복하고 부흥에 힘을 기울이는 사이, 미국과 소련 양 진영의 냉전은 격화되어 갔다. 양국은 원자폭탄보다 큰 파괴력을 가진 수소폭탄의 개발에 성공하고, 핵폭탄을 탑재한 대륙간탄도탄(ICBM)을 배치하여 상대국을 직접 파괴할 수 있는 공격력을 갖추었다.
동서로 분단된 독일에서는 1961년 동독 주민들의 서쪽으로의 탈주를 저지하기 위해,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벽을 구축하였다. (베를린장벽) 1962년에는 소련이 미국과 지근거리에 있는 쿠바에 핵미사일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에 의해 미국과 소련 간에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지만, 미국의 강경한 자세에 소련은 미사일을 철거하였다. (쿠바위기)
1965년 미국은 인도 차이나 반도의 공산주의화를 경계하여 남 베트남을 지지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파견하고, 중국이나 소련이 지원하는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의 반정부세력과 싸웠다. (베트남전쟁) 그러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1973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2년 후에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군사력으로 병합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후, 1956년에 흐루시초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정책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체제의 재건을 꾀하였다. 소련은 쿠바위기 후, 1979년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까지의 기간은 서쪽의 긴장완화정책에 동조하면서 군비증강에 전념하였다.
[ 경제 부흥과 일미안보조약 개정 ]
일본에서는 조선특수(朝鮮特需) 이후 장기적인 호경기를 누렸다. 경제는 전쟁[역주: 제2차 세계대전] 전 수준으로 복귀하여, 1956(쇼와 31)년에는 「이제는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57년에 수상이 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이러한 일본의 부흥을 배경으로 일미안보조약의 개정을 목표로 하여 1960(쇼와 35)년 1월 신조약을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일미 양국은 보다 대등한 관계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안보조약의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960년 5월 자민당(*1)이 신안보조약의 국회 승인을 강행 체결하자, 국회 주변을 데모대가 연일 둘러싸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안보투쟁) 기시는 신안보조약 성립 후에 사직하였다.
기시 수상의 다음에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안보를 둘러싼 대중 소동의 재연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이 결당 시에 내걸었던 자주헌법제정이나 방위력 강화라는 과제에는 손을 대지 않고, 10년 안에 소득을 2배로 올린다는 소득배증정책을 내걸었다.
(*1) 정식 명칭은 자유민주당. 1955년 이래 여당으로서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 냉전의 진행 ]
일본이 독립을 회복하고 부흥에 힘을 기울이는 사이, 미국과 소련 양 진영의 냉전은 격화되어 갔다. 양국은 원자폭탄보다 큰 파괴력을 가진 수소폭탄의 개발에 성공하고, 핵폭탄을 탑재한 대륙간탄도탄(ICBM)을 배치하여 상대국을 직접 파괴할 수 있는 공격력을 갖추었다.
동서로 분단된 독일에서는 1961년 동독 주민들의 서쪽으로의 탈주를 저지하기 위해,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벽을 구축하였다. (베를린장벽) 1962년에는 소련이 미국과 지근거리에 있는 쿠바에 핵미사일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에 의해 미국과 소련 간에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지만, 미국의 강경한 자세에 소련은 미사일을 철거하였다. (쿠바위기)
1965년 미국은 인도 차이나 반도의 공산주의화를 경계하여 남 베트남을 지지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파견하고, 중국이나 소련이 지원하는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의 반정부세력과 싸웠다. (베트남전쟁) 그러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1973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2년 후에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군사력으로 병합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후, 1956년에 흐루시초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정책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체제의 재건을 꾀하였다. 소련은 쿠바위기 후, 1979년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까지의 기간은 서쪽의 긴장완화정책에 동조하면서 군비증강에 전념하였다.
[ 경제 부흥과 일미안보조약 개정 ]
일본에서는 조선특수(朝鮮特需) 이후 장기적인 호경기를 누렸다. 경제는 전쟁[역주: 제2차 세계대전] 전 수준으로 복귀하여, 1956(쇼와 31)년에는 「이제는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57년에 수상이 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이러한 일본의 부흥을 배경으로 일미안보조약의 개정을 목표로 하여 1960(쇼와 35)년 1월 신조약을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일미 양국은 보다 대등한 관계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안보조약의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960년 5월 자민당(*1)이 신안보조약의 국회 승인을 강행 체결하자, 국회 주변을 데모대가 연일 둘러싸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안보투쟁) 기시는 신안보조약 성립 후에 사직하였다.
기시 수상의 다음에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안보를 둘러싼 대중 소동의 재연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이 결당 시에 내걸었던 자주헌법제정이나 방위력 강화라는 과제에는 손을 대지 않고, 10년 안에 소득을 2배로 올린다는 소득배증정책을 내걸었다.
(*1) 정식 명칭은 자유민주당. 1955년 이래 여당으로서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