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칼럼] 아시아 사람들을 분발시킨 일본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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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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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읽기 칼럼] 아시아 사람들을 분발시킨 일본의 행동
<아시아 사람들을 분발시킨 일본의 행동>
「일본군은 오랫동안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서구의 세력을 몰아내고, 도저히 백인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아시아 민족에게 경이로운 감동과 자신을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자신의 조국을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자』라고 하는 마음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우리는 말레이 반도를 진격해 가는 일본군에게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패하여 도망치는 영국군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느낀 적이 없는 흥분을 느꼈습니다.」
(말레이시아 독립운동가, 전 상원의원 라자 다트 논칙 씨의 저서에서)
<일본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인도네시아 사람들>
수백 년에 걸쳐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는 옛날부터 하나의 전설이 구전되고 있었다. 「이제 곧 북방에서 노란 사람들이 나타나 압제자를 추방하고 옥수수가 여물 무렵에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방될 것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노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대승리를 거둔 것을 알고, 「북방에서 오는 노란 사람들이란 일본인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어, 은근히 일본의 남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군을 패배시키고 진주(進駐)하자, 사람들은 길가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하였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추방해 준 해방군이었다. 일본은 3년 반의 점령 기간에 페타(PETA)라 부르는 군사 조직 훈련, 중등학교 설립, 공통어 설정 등 나중에 독립의 기초가 되는 많은 개혁을 행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가 되자 식량은 부족했고, 사람들은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헌병이 난폭한 행동을 하기에 이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어가 된 일본어 중에 「세이신(정신)」과 같은 단어뿐만 아니라 「로무샤(노무자)」「겐페이(헌병)」등이 있다는 데에도 복잡한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아시아 사람들을 분발시킨 일본의 행동>
「일본군은 오랫동안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서구의 세력을 몰아내고, 도저히 백인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아시아 민족에게 경이로운 감동과 자신을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자신의 조국을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자』라고 하는 마음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우리는 말레이 반도를 진격해 가는 일본군에게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패하여 도망치는 영국군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느낀 적이 없는 흥분을 느꼈습니다.」
(말레이시아 독립운동가, 전 상원의원 라자 다트 논칙 씨의 저서에서)
<일본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인도네시아 사람들>
수백 년에 걸쳐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는 옛날부터 하나의 전설이 구전되고 있었다. 「이제 곧 북방에서 노란 사람들이 나타나 압제자를 추방하고 옥수수가 여물 무렵에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방될 것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노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대승리를 거둔 것을 알고, 「북방에서 오는 노란 사람들이란 일본인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어, 은근히 일본의 남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군을 패배시키고 진주(進駐)하자, 사람들은 길가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하였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추방해 준 해방군이었다. 일본은 3년 반의 점령 기간에 페타(PETA)라 부르는 군사 조직 훈련, 중등학교 설립, 공통어 설정 등 나중에 독립의 기초가 되는 많은 개혁을 행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가 되자 식량은 부족했고, 사람들은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헌병이 난폭한 행동을 하기에 이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어가 된 일본어 중에 「세이신(정신)」과 같은 단어뿐만 아니라 「로무샤(노무자)」「겐페이(헌병)」등이 있다는 데에도 복잡한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76 전시하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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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6 전시하의 생활
[ 국민의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전선의 군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이나 교육, 문화 등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총력전의 시대가 되었다. 일본도 일중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 경제, 산업, 교통 등 모든 것을 정부가 통제하고 운용하는 총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국민 생활에서 순면·순모 제품이나 피혁, 고무 제품 등이 모습을 감추어 갔다. 정부는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으로 소비 절약과 저축 증강 등을 호소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전국(戰局)이 악화되자, 국내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징용이 행해졌고, 중학교 3학년 이상의 생도와 학생은 근로 동원, 미혼 여성은 여자 정신대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은 징병 유예가 취소되어 출정을 하게 되었다. (학도 출진[學徒出陣])
조선반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 후 일본식 성명을 갖게 하는 창씨개명 등이 이루어졌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이 강화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징병이나 징용이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어, 현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게 되었다. 또한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와 혹독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일을 했다.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이 부족하여, 절의 종 등 금속이라는 금속은 모두 전쟁을 위해 공출되었고, 생활 물자는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많은 국민들은 잘 일하고 잘 싸웠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바란 데서 온 행동이었다.
[ 공습의 피해 ]
전쟁 말기에는 국민이 직접 전화에 노출되었다. 1944(쇼와 19)년 7월 일본의 위임통치령이었던 마리아나 제도의 하나인 사이판섬이 함락되고, 제공권을 쥐게 된 미군은 같은 해 말부터 폭격기 B29로 일본본토 공습을 개시하였다. 아이들은 위험을 피하여 부모 곁을 떠나 지방의 절 등으로 소개(疎開, 역주: 공습, 화재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람이나 건조물을 분산시킴)되었다. (학동소개[學童疎開]) 1945(쇼와 20)년 3월 10일에는 도쿄 대공습이 행해져, 하룻밤에 약 10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4월에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本島)에 상륙하여, 일본군 사망자 약 9만 4천 명, 일반 주민 사망자도 약 9만 4천 명을 내는 전투 끝에 2개월 반 후에 오키나와를 점령하였다.
[ 국민의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전선의 군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이나 교육, 문화 등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총력전의 시대가 되었다. 일본도 일중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 경제, 산업, 교통 등 모든 것을 정부가 통제하고 운용하는 총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국민 생활에서 순면·순모 제품이나 피혁, 고무 제품 등이 모습을 감추어 갔다. 정부는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으로 소비 절약과 저축 증강 등을 호소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전국(戰局)이 악화되자, 국내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징용이 행해졌고, 중학교 3학년 이상의 생도와 학생은 근로 동원, 미혼 여성은 여자 정신대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은 징병 유예가 취소되어 출정을 하게 되었다. (학도 출진[學徒出陣])
조선반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 후 일본식 성명을 갖게 하는 창씨개명 등이 이루어졌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이 강화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징병이나 징용이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어, 현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게 되었다. 또한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와 혹독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일을 했다.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이 부족하여, 절의 종 등 금속이라는 금속은 모두 전쟁을 위해 공출되었고, 생활 물자는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많은 국민들은 잘 일하고 잘 싸웠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바란 데서 온 행동이었다.
[ 공습의 피해 ]
전쟁 말기에는 국민이 직접 전화에 노출되었다. 1944(쇼와 19)년 7월 일본의 위임통치령이었던 마리아나 제도의 하나인 사이판섬이 함락되고, 제공권을 쥐게 된 미군은 같은 해 말부터 폭격기 B29로 일본본토 공습을 개시하였다. 아이들은 위험을 피하여 부모 곁을 떠나 지방의 절 등으로 소개(疎開, 역주: 공습, 화재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람이나 건조물을 분산시킴)되었다. (학동소개[學童疎開]) 1945(쇼와 20)년 3월 10일에는 도쿄 대공습이 행해져, 하룻밤에 약 10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4월에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本島)에 상륙하여, 일본군 사망자 약 9만 4천 명, 일반 주민 사망자도 약 9만 4천 명을 내는 전투 끝에 2개월 반 후에 오키나와를 점령하였다.
77 종전 외교(終戰外交)와 일본의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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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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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7 종전 외교(終戰外交)와 일본의 패전
[ 얄타부터 포츠담까지 ]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전쟁의 대세는 결정나고 있었다. 1945년 2월 소련령 크림 반도의 얄타에 미∙영∙소 3국의 수뇌가 모여 연합국측의 전후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얄타회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3개월 후에 일본에 대항해 참전하겠다고 회답하고, 그 대가로 일본의 남가라후토와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역주: 쿠릴 열도)를 요구함으로써 양자는 합의했다.
4월에 루스벨트가 급사하고 부대통령인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승격되었다. 연합군이 독일을 침공하자, 히틀러는 자살하고 베를린은 폐허가 되었으며 5월에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7월,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미·영·소 3국의 수뇌가 모여, 26일 일본에 대한 전쟁 종결 조건을 제시한 포츠담선언을 미·영·중 3국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 원폭 투하와 소련의 침공 ]
일본 정부 내에서는 오키나와(沖繩)를 점령당한 6월 무렵부터 전쟁 종결을 둘러싼 최고지도자 회의가 몇 번에 걸쳐 열렸다. 일본 정부는 대일참전을 조용히 결심하고 있던 소련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연합국과의 강화 중개를 요청했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자,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수상이나 주요 각료는 조건부 항복 요구임에 착목하여 그것을 수락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육군은 반대하고, 본토결전(本土決戰)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정부는 한동안 소련의 중개 답신을 기다리기로 했 다. 그러는 동안 8월 6일, 미국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원폭)을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 정부도 종전을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8일 소련은 일소중 립조약을 깨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다음날인 9일 만주를 침공해 왔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도 원폭을 투하했다.
<일본을 파멸에서 구한 미국의 외교관>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키고자 했다. 일체 항복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그 방법으로는, 상대국은 항복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전쟁은 일본 전국토가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루스벨트가 급사하자, 국무차관의 지위에 있던 조셉 그루는 전쟁의 종결 조건을 일본측에 제시하는 안(案)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루는 일미 개전까지 10년 동안 주일대사를 역임한 친일가로, 사랑하는 일본의 국토를 파멸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루 등의 노력도 있어서 발표된 포츠담선언에 의해 일본은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 성단(聖斷)을 내리다 ]
9일 심야, 쇼와(昭和) 천황 임석(臨席)하에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렸다. 포츠담선언의 즉시 수락에 대해 의견은 찬반 동수였다. 10일 오전 2시, 스즈키(鈴木) 수상이 천황의 앞에 나가 성단을 삼가 청하였다. 천황은 포츠담선언의 즉시 수락에 의한 일본의 항복을 결단했다. 8월 15일 정오, 라디오의 옥음(玉音, 역주: 천황의 말씀) 방송으로 국민은 오랜 전쟁의 종언과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되었다. 메이지 이후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체험하는 패전이었다.
일본의 항복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대전 전체의 전사자는 2,200만 명, 부상자는 3,4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단 후 쇼와 천황의 발언>
「...이와 같은 상태로 본토결전에 임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몹시 걱정스럽다. 어쩌면 일본 민족은 모두 죽어 버려야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국민이 살아 남아서, 그 사람들이 앞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이외에 이 일본을 자손에게 물려줄 방법 은 없다고 생각한다. チチ여러분 모두는 이런 경우, 나를 걱정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해서 전쟁을 즉시 종결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 서기관장의 증언에서)
[ 얄타부터 포츠담까지 ]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전쟁의 대세는 결정나고 있었다. 1945년 2월 소련령 크림 반도의 얄타에 미∙영∙소 3국의 수뇌가 모여 연합국측의 전후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얄타회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3개월 후에 일본에 대항해 참전하겠다고 회답하고, 그 대가로 일본의 남가라후토와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역주: 쿠릴 열도)를 요구함으로써 양자는 합의했다.
4월에 루스벨트가 급사하고 부대통령인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승격되었다. 연합군이 독일을 침공하자, 히틀러는 자살하고 베를린은 폐허가 되었으며 5월에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7월,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미·영·소 3국의 수뇌가 모여, 26일 일본에 대한 전쟁 종결 조건을 제시한 포츠담선언을 미·영·중 3국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 원폭 투하와 소련의 침공 ]
일본 정부 내에서는 오키나와(沖繩)를 점령당한 6월 무렵부터 전쟁 종결을 둘러싼 최고지도자 회의가 몇 번에 걸쳐 열렸다. 일본 정부는 대일참전을 조용히 결심하고 있던 소련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연합국과의 강화 중개를 요청했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자,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수상이나 주요 각료는 조건부 항복 요구임에 착목하여 그것을 수락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육군은 반대하고, 본토결전(本土決戰)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정부는 한동안 소련의 중개 답신을 기다리기로 했 다. 그러는 동안 8월 6일, 미국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원폭)을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 정부도 종전을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8일 소련은 일소중 립조약을 깨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다음날인 9일 만주를 침공해 왔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도 원폭을 투하했다.
<일본을 파멸에서 구한 미국의 외교관>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키고자 했다. 일체 항복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그 방법으로는, 상대국은 항복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전쟁은 일본 전국토가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루스벨트가 급사하자, 국무차관의 지위에 있던 조셉 그루는 전쟁의 종결 조건을 일본측에 제시하는 안(案)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루는 일미 개전까지 10년 동안 주일대사를 역임한 친일가로, 사랑하는 일본의 국토를 파멸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루 등의 노력도 있어서 발표된 포츠담선언에 의해 일본은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 성단(聖斷)을 내리다 ]
9일 심야, 쇼와(昭和) 천황 임석(臨席)하에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렸다. 포츠담선언의 즉시 수락에 대해 의견은 찬반 동수였다. 10일 오전 2시, 스즈키(鈴木) 수상이 천황의 앞에 나가 성단을 삼가 청하였다. 천황은 포츠담선언의 즉시 수락에 의한 일본의 항복을 결단했다. 8월 15일 정오, 라디오의 옥음(玉音, 역주: 천황의 말씀) 방송으로 국민은 오랜 전쟁의 종언과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되었다. 메이지 이후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체험하는 패전이었다.
일본의 항복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대전 전체의 전사자는 2,200만 명, 부상자는 3,4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단 후 쇼와 천황의 발언>
「...이와 같은 상태로 본토결전에 임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몹시 걱정스럽다. 어쩌면 일본 민족은 모두 죽어 버려야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국민이 살아 남아서, 그 사람들이 앞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이외에 이 일본을 자손에게 물려줄 방법 은 없다고 생각한다. チチ여러분 모두는 이런 경우, 나를 걱정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해서 전쟁을 즉시 종결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 서기관장의 증언에서)
78 점령하의 일본과 일본국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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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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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본의 부흥과 국제 사회 78 점령하의 일본과 일본국 헌법
[ 점령의 개시 ]
1945년 8월 말, 미군을 주체로 하는 연합국군에 의한 일본 점령이 시작되었다. (*1) 미국의 점령 목적은 일본이 다시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국가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존속됐지만, 그 후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군림하고 그 지령을 일본 정부가 실행했다.
포츠담선언에 근거하여 육해군은 해산되었다. 외지에 있던 군대는 무장해제되고, 일본으로 복원(復員)하기 시작했다.
1946년부터는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전쟁 중의 지도적인 군인이나 정치가가 「평화에 대한 죄」를 범한 전쟁범죄자(전범)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GHQ는 전시 중에 공직에 있었던 자 등 각계의 지도자 약 20만 명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GHQ는 일본 정부에 대해 부인(婦人) 참정권 부여, 노동조합법 제정, 교육 제도 개혁 등의 5대 개혁 지령을 발했다. 민주화라 불린 이들 개혁 중 몇 가지는 이미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있던 것과 합치하여 바로 실행되어 갔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는 전쟁 중에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해서 재벌이 해체되고, 농촌에서는 농지 개혁(*2)이 추진되었다.
(*1) 단,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에서는 미군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2) 지주가 갖는 일정 비율 이상의 소작지를 국가가 강제적으로 사들여 소작농에게 싸게 주어 자작농을 늘렸다.
[ 일본국 헌법 ]
GHQ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일본측에서는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역주: 다이쇼 시대에 뚜렷해진 민주주의∙자유주의적 풍조)의 경험이 있어서 헌법에 다소의 수정을 가하는 것만으로 민주화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GHQ는 1946년 2월, 겨우 일주일 만에 직접 작성한 헌법 초안을 일본 정부에 제시하고, 헌법의 근본적인 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는 GHQ가 제시한 헌법 초안의 내용(*3)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거부할 경우 천황의 지위가 위협받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GHQ의 초안을 바탕으로 정부는 헌법 안을 만들었고 제국의회의 심의를 거쳐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시행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은 세습 천황을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정했다. 또한 국민 주권을 주장하고 국회를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하였으며, 의원내각제를 명기함과 동시에 기본적 인 인권에 관한 규정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 방기 와 그것을 위한 전력을 갖지 않기로 정했다.
(*3) 교전권(交戰權) 부인(후의 9조) 등이 쓰여 있어, 당시의 지도자는 국가로서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5대 개혁 지령> (1945년 10월)
1 부인(婦人) 해방
2 노동조합 결성
3 교육의 자유주의화
4 압정적(壓政的) 모든 제도의 철폐
5 경제의 민주화
<경제 개혁> 재벌 해체, 농지 개혁, 노동조합법, 노동기준법, 독점금지법
<교육 개혁>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 (6·3·3·4제와 의무교육 9년제의 도입)
<정치 개혁> 신선거법, 천황의 인간 선언, 공직 추방, 일본국 헌법 (국민 주권∙기본적 인권 존중∙평화주의의 3대 원칙)
[ 점령의 개시 ]
1945년 8월 말, 미군을 주체로 하는 연합국군에 의한 일본 점령이 시작되었다. (*1) 미국의 점령 목적은 일본이 다시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국가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존속됐지만, 그 후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군림하고 그 지령을 일본 정부가 실행했다.
포츠담선언에 근거하여 육해군은 해산되었다. 외지에 있던 군대는 무장해제되고, 일본으로 복원(復員)하기 시작했다.
1946년부터는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전쟁 중의 지도적인 군인이나 정치가가 「평화에 대한 죄」를 범한 전쟁범죄자(전범)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GHQ는 전시 중에 공직에 있었던 자 등 각계의 지도자 약 20만 명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GHQ는 일본 정부에 대해 부인(婦人) 참정권 부여, 노동조합법 제정, 교육 제도 개혁 등의 5대 개혁 지령을 발했다. 민주화라 불린 이들 개혁 중 몇 가지는 이미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있던 것과 합치하여 바로 실행되어 갔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는 전쟁 중에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해서 재벌이 해체되고, 농촌에서는 농지 개혁(*2)이 추진되었다.
(*1) 단,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에서는 미군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2) 지주가 갖는 일정 비율 이상의 소작지를 국가가 강제적으로 사들여 소작농에게 싸게 주어 자작농을 늘렸다.
[ 일본국 헌법 ]
GHQ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일본측에서는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역주: 다이쇼 시대에 뚜렷해진 민주주의∙자유주의적 풍조)의 경험이 있어서 헌법에 다소의 수정을 가하는 것만으로 민주화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GHQ는 1946년 2월, 겨우 일주일 만에 직접 작성한 헌법 초안을 일본 정부에 제시하고, 헌법의 근본적인 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는 GHQ가 제시한 헌법 초안의 내용(*3)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거부할 경우 천황의 지위가 위협받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GHQ의 초안을 바탕으로 정부는 헌법 안을 만들었고 제국의회의 심의를 거쳐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시행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은 세습 천황을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정했다. 또한 국민 주권을 주장하고 국회를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하였으며, 의원내각제를 명기함과 동시에 기본적 인 인권에 관한 규정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 방기 와 그것을 위한 전력을 갖지 않기로 정했다.
(*3) 교전권(交戰權) 부인(후의 9조) 등이 쓰여 있어, 당시의 지도자는 국가로서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5대 개혁 지령> (1945년 10월)
1 부인(婦人) 해방
2 노동조합 결성
3 교육의 자유주의화
4 압정적(壓政的) 모든 제도의 철폐
5 경제의 민주화
<경제 개혁> 재벌 해체, 농지 개혁, 노동조합법, 노동기준법, 독점금지법
<교육 개혁>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 (6·3·3·4제와 의무교육 9년제의 도입)
<정치 개혁> 신선거법, 천황의 인간 선언, 공직 추방, 일본국 헌법 (국민 주권∙기본적 인권 존중∙평화주의의 3대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