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중국의 배일 운동(排日運動)과 협조 외교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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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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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69 중국의 배일 운동(排日運動)과 협조 외교의 좌절
[ 중국의 배일 운동 (排日運動) ]
청조 멸망 후의 중국에서는 각지에 사병을 둔 군벌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각지의 군벌과 싸우며 국내 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1928년 장제스는 베이징을 진압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중국 통일의 움직임은 일본이 권익을 갖는 만주에도 도달했다. 그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세 번에 걸쳐 산둥 지방에 출병했다.
중국의 국내 통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불평등 조약에 의해 중국에서 권익을 갖는 외국 세력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이는 열강의 지배에 대한 중국인의 민족적 반발이었지만, 폭력에 의해 혁명을 실현한 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도 받아 과격한 성격을 띠게 되었 다. 세력을 확대해 오는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일본인을 습격하 는 배일 운동이 활발해졌다.
[ 협조 외교의 답보 ]
정당 내각하에서 2기에 걸쳐 외무대신을 역임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는, 영미와 협조하여 조약을 지키면서 중국의 관세자주권 회복 요구를 지지하는 등 중국의 민족 감정에 동정적으로 대응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배일 운동은 진정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정책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 시데하라의 외교를 연약한 외교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 정세에 대한 미 외교관 맥머리(McMurry)의 견해>
인종 의식이 되살아난 중국인은 고의로 자국의 법적 의무를 경멸하고, 목적 실현을 위해서는 무턱대고 폭력에 호소하며 도발적인 처사를 했다. 그리고 힘에 호소하려 하면서 힘으로 반격을 당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지만, 적대자가 약한 모습을 보 이면 순식간에 거들먹거린다. チ중국에 호의적인 외교관들은 중국이 외국에 대한 적대와 배 반을 계속한다면 조만간에 한두 국가가 참다 못해 호된 보복을 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1935년의 메모에서 일부 요약)
[ 세계 공황과 높아지는 군부에 대한 기대 ]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 된 미국에서 1929년 주가가 대폭락하는 공황이 일어났다. 불황의 여파는 전세계에 미쳐 세계 공황이 일어났다. 대미 수출에 의존하는 일 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쇼와 공황) 농촌에서도 미국을 대상으 로 하는 생사(生絲) 수출액이 격감하여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1930년 런던에서 해군 보조함의 제한을 의제로 하는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런던군축회의) 이 회의에서 일본에 불리한 협정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일부 군인과 그에 동조하는 야 당 정치가는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은 폭한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후에 사망), 퇴진 위기에 몰렸다.
군인이 정치에 직접 참견을 하는 것은 군인칙유(軍人勅諭)(*1)에서 금지되고 있었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배일 운동의 위기에 처해진 만주 재주(在住) 일본인들의 궁상과 만주권익에 대한 위협에 대처할 수 없는 정당 정치에 대해 강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와는 달리, 군인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정책을 논하고 실행하려는 생각을 가진 장교 그룹이 형성되었다. 국민도 경제 불황으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정쟁(政爭)으로 나날 을 보내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당 정치에 실망하여 차츰 군부에 기대를 모으게 되었 다.
(*1) 1882(메이지 15)년에 내려진 천황의 말로, 군인의 마음가짐을 설명한 문장.
[ 중국의 배일 운동 (排日運動) ]
청조 멸망 후의 중국에서는 각지에 사병을 둔 군벌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각지의 군벌과 싸우며 국내 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1928년 장제스는 베이징을 진압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중국 통일의 움직임은 일본이 권익을 갖는 만주에도 도달했다. 그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세 번에 걸쳐 산둥 지방에 출병했다.
중국의 국내 통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불평등 조약에 의해 중국에서 권익을 갖는 외국 세력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이는 열강의 지배에 대한 중국인의 민족적 반발이었지만, 폭력에 의해 혁명을 실현한 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도 받아 과격한 성격을 띠게 되었 다. 세력을 확대해 오는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일본인을 습격하 는 배일 운동이 활발해졌다.
[ 협조 외교의 답보 ]
정당 내각하에서 2기에 걸쳐 외무대신을 역임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는, 영미와 협조하여 조약을 지키면서 중국의 관세자주권 회복 요구를 지지하는 등 중국의 민족 감정에 동정적으로 대응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배일 운동은 진정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정책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 시데하라의 외교를 연약한 외교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 정세에 대한 미 외교관 맥머리(McMurry)의 견해>
인종 의식이 되살아난 중국인은 고의로 자국의 법적 의무를 경멸하고, 목적 실현을 위해서는 무턱대고 폭력에 호소하며 도발적인 처사를 했다. 그리고 힘에 호소하려 하면서 힘으로 반격을 당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지만, 적대자가 약한 모습을 보 이면 순식간에 거들먹거린다. チ중국에 호의적인 외교관들은 중국이 외국에 대한 적대와 배 반을 계속한다면 조만간에 한두 국가가 참다 못해 호된 보복을 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1935년의 메모에서 일부 요약)
[ 세계 공황과 높아지는 군부에 대한 기대 ]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 된 미국에서 1929년 주가가 대폭락하는 공황이 일어났다. 불황의 여파는 전세계에 미쳐 세계 공황이 일어났다. 대미 수출에 의존하는 일 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쇼와 공황) 농촌에서도 미국을 대상으 로 하는 생사(生絲) 수출액이 격감하여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1930년 런던에서 해군 보조함의 제한을 의제로 하는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런던군축회의) 이 회의에서 일본에 불리한 협정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일부 군인과 그에 동조하는 야 당 정치가는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은 폭한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후에 사망), 퇴진 위기에 몰렸다.
군인이 정치에 직접 참견을 하는 것은 군인칙유(軍人勅諭)(*1)에서 금지되고 있었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배일 운동의 위기에 처해진 만주 재주(在住) 일본인들의 궁상과 만주권익에 대한 위협에 대처할 수 없는 정당 정치에 대해 강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와는 달리, 군인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정책을 논하고 실행하려는 생각을 가진 장교 그룹이 형성되었다. 국민도 경제 불황으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정쟁(政爭)으로 나날 을 보내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당 정치에 실망하여 차츰 군부에 기대를 모으게 되었 다.
(*1) 1882(메이지 15)년에 내려진 천황의 말로, 군인의 마음가짐을 설명한 문장.
70 만주사변 (滿州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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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0 만주사변 (滿州事變)
[ 사변 전야의 만주 ]
일노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 남부의 관동주를 조차하고,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만철, 滿鐵) 영업권을 양도받았다. 쇼와 초기의 만주에는 이미 2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을 보호하고 관동주 및 만철을 경비하기 위해 육군 부대(관동군)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관동군이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폭발물로 죽이는 등 만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하자, 중국인의 배일 운동도 거세져서 열차 방해나 일본인에 대한 박해 등이 빈발했다. 더구나 일본에게는 북으로는 소련의 위협이 있었고, 남으로부터는 국민당의 힘도 미쳐 왔다. 그러한 가운데 관동군의 일부 장교는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령하여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만주사변에서 만주국 건국으로 ]
1931년 관동군은 봉천(奉天, 현재의 심양[瀋陽]) 교외의 류타오후(柳條湖)에서 만철의 선로를 폭파하고, 그것이 중국측의 소행이라 하며 만철 연안 도시를 점령했다. 정부와 중앙 군부는 불확대 방침을 취했지만, 관동군은 전 만주의 주요부를 점령하였으며, 정부도 이를 추인(追認)했다. (만주사변)
만주에서 일본인이 당하던 불법 행위의 피해를 해결 못하는 정부의 외교 방침에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국민들 가운데는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고, 육군에는 거액의 지원금이 몰렸다. 1932년 3월, 관동군은 만주국 건국을 실현하고, 후에 청조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를 만주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 만주사변을 세계는 어떻게 보았는가 ]
1932년 5월 15일, 만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던 정우회(政友會)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 毅) 수상은 해군 청년 장교 일단에게 암살되었다. (5·15사건) 이로써 8년간 계속되어온 정당 내각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그 후 한동안은 군인이나 관료 출신자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비난했다. 국제연맹은 만주에 영국의 리튼경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의 안전과 권익이 위협받고 있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일본군의 철병(撤兵)과 만주의 국제 관리를 권고했다. 이미 만주국을 승인한 일본 정부는 1933년 이 권고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그 후 중국과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중국인 등의 인구 유입도 현저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주국의 실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으며, 항일 운동도 일어났다.
[ 사변 전야의 만주 ]
일노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 남부의 관동주를 조차하고,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만철, 滿鐵) 영업권을 양도받았다. 쇼와 초기의 만주에는 이미 2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을 보호하고 관동주 및 만철을 경비하기 위해 육군 부대(관동군)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관동군이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폭발물로 죽이는 등 만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하자, 중국인의 배일 운동도 거세져서 열차 방해나 일본인에 대한 박해 등이 빈발했다. 더구나 일본에게는 북으로는 소련의 위협이 있었고, 남으로부터는 국민당의 힘도 미쳐 왔다. 그러한 가운데 관동군의 일부 장교는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령하여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만주사변에서 만주국 건국으로 ]
1931년 관동군은 봉천(奉天, 현재의 심양[瀋陽]) 교외의 류타오후(柳條湖)에서 만철의 선로를 폭파하고, 그것이 중국측의 소행이라 하며 만철 연안 도시를 점령했다. 정부와 중앙 군부는 불확대 방침을 취했지만, 관동군은 전 만주의 주요부를 점령하였으며, 정부도 이를 추인(追認)했다. (만주사변)
만주에서 일본인이 당하던 불법 행위의 피해를 해결 못하는 정부의 외교 방침에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국민들 가운데는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고, 육군에는 거액의 지원금이 몰렸다. 1932년 3월, 관동군은 만주국 건국을 실현하고, 후에 청조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를 만주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 만주사변을 세계는 어떻게 보았는가 ]
1932년 5월 15일, 만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던 정우회(政友會)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 毅) 수상은 해군 청년 장교 일단에게 암살되었다. (5·15사건) 이로써 8년간 계속되어온 정당 내각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그 후 한동안은 군인이나 관료 출신자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비난했다. 국제연맹은 만주에 영국의 리튼경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의 안전과 권익이 위협받고 있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일본군의 철병(撤兵)과 만주의 국제 관리를 권고했다. 이미 만주국을 승인한 일본 정부는 1933년 이 권고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그 후 중국과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중국인 등의 인구 유입도 현저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주국의 실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으며, 항일 운동도 일어났다.
71 중일전쟁 (日中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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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1 일중전쟁(日中戰爭)
[ 2∙26사건 ]
1936년 2월 26일 아침, 육군 청년장교 일파가 1400 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상 관저와 경시청 등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대신 등을 살해하고 도쿄의 나가타정(永田町) 주변을 점거하였다.
사건의 수모자들은 정당∙재벌∙중신(重臣)을 타도하고 천황을 받드는 군부 정권의 수립을 노렸다. 하지만 쇼와천황은 중신을 살해한 반란분자를 용서하지 않는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반란은 3일 동안 진압되어 수모자는 엄형(嚴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후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 밖에 될 수 없다는 제도가 부활하고 육해군이 지지하지 않는 내각의 성립은 곤란해 졌다.
[ 시안사건(西安事件) ]
중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과 중국 공산당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이 협력하여 항일할 것을 호소했다. (*1) 그러나 장제스는 먼저 국내의 공산당 세력을 쓰러뜨리고, 그 후 일본과 싸운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공산당 군대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국민당 군대에게 쫓겼다.
만주 지방의 군벌로 관동군에게 쫓겨난 장쉐량(張學良)은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령 받았지만, 내심으로는 공산당의 항일 호소에 찬성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1936년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그만두고 일치단결해 일본과 싸울 것을 인정하게 했다. (시안사건)
(*1) 1935년에 코민테른 세계대회가 열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국내의 다른 민족주의적인 정당과의 적대를 중지하고, 협력해서 외국 세력을 추방한 후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다.
[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에서 일중전쟁으로 ]
한편 일본군은 만주국의 유지와 자원 확보를 위해 인접한 화북(華北) 지방에 친일 정권을 만들기도 하여, 중국측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또한 일본은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후 다른 여러 열강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베이징 주변에 5천 명의 군을 주둔시켰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의 교외인 루거우차오에서 훈련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누군가가 총포를 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날에는 중국군과 전투 상태가 되었다. (루거우차오사건) 사건 그 자체는 소규모로 현지 해결이 시도되었으나 일본측도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였고, 국민당 정부도 즉시 동원령을 발포했다. 그리하여 이후 8년간에 걸친 일중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된 상하이에서 일본인 장병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중 간 충돌이 확대되었다.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 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 난징을 점령했다. (*2) 그러나 장제스는 벽지인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을 계속했다.
(*2) 이 때 일본군에 의해 중국 군인과 민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난징사건) 또한 이 사건의 희생자 수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가 있어 오늘 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2∙26사건 ]
1936년 2월 26일 아침, 육군 청년장교 일파가 1400 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상 관저와 경시청 등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대신 등을 살해하고 도쿄의 나가타정(永田町) 주변을 점거하였다.
사건의 수모자들은 정당∙재벌∙중신(重臣)을 타도하고 천황을 받드는 군부 정권의 수립을 노렸다. 하지만 쇼와천황은 중신을 살해한 반란분자를 용서하지 않는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반란은 3일 동안 진압되어 수모자는 엄형(嚴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후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 밖에 될 수 없다는 제도가 부활하고 육해군이 지지하지 않는 내각의 성립은 곤란해 졌다.
[ 시안사건(西安事件) ]
중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과 중국 공산당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이 협력하여 항일할 것을 호소했다. (*1) 그러나 장제스는 먼저 국내의 공산당 세력을 쓰러뜨리고, 그 후 일본과 싸운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공산당 군대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국민당 군대에게 쫓겼다.
만주 지방의 군벌로 관동군에게 쫓겨난 장쉐량(張學良)은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령 받았지만, 내심으로는 공산당의 항일 호소에 찬성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1936년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그만두고 일치단결해 일본과 싸울 것을 인정하게 했다. (시안사건)
(*1) 1935년에 코민테른 세계대회가 열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국내의 다른 민족주의적인 정당과의 적대를 중지하고, 협력해서 외국 세력을 추방한 후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다.
[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에서 일중전쟁으로 ]
한편 일본군은 만주국의 유지와 자원 확보를 위해 인접한 화북(華北) 지방에 친일 정권을 만들기도 하여, 중국측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또한 일본은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후 다른 여러 열강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베이징 주변에 5천 명의 군을 주둔시켰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의 교외인 루거우차오에서 훈련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누군가가 총포를 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날에는 중국군과 전투 상태가 되었다. (루거우차오사건) 사건 그 자체는 소규모로 현지 해결이 시도되었으나 일본측도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였고, 국민당 정부도 즉시 동원령을 발포했다. 그리하여 이후 8년간에 걸친 일중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된 상하이에서 일본인 장병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중 간 충돌이 확대되었다.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 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 난징을 점령했다. (*2) 그러나 장제스는 벽지인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을 계속했다.
(*2) 이 때 일본군에 의해 중국 군인과 민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난징사건) 또한 이 사건의 희생자 수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가 있어 오늘 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72 악화되는 일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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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2 악화되는 일미 관계
[ 목적 불명의 수렁에 빠진 전쟁 ]
중국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온 국가를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정부는 의회의 동의 없이 물자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언론의 통제와 검열 등도 강화되었다.
중국 대륙에서의 전쟁은 장기화되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화평공작(和平工作)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 군부의 강경한 방침이 끊임없이 우위를 차지했다. 1940년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 대의사(代議士, 역주: 중의원 의원)는 제국의회에서 「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지만, 정부는 명확히 답할 수 없었다.
세계 공황 후 일본 국내에서도 독일이나 소련 같은 국가 체제하에서의 통제 경제를 이상으로 보는 풍조가 확대되었다. 1940년에는 정당이 해산되고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역주: 1940년 10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신체제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국민 통제 조직)로 통합되었다.
[ 악화되는 일미 관계 ]
한편 1933년 무렵부터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은 본국과 식민지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그 경제권 내부에서 중요한 상품의 자급자족을 추진하는 한편, 높은 관세를 매겨 권외의 상품을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을 블록 경제라고 한다.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은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 건설이라는 성명을 내고 일본∙만주∙중국을 통합한 독자적 경제권을 만들 것을 시사했다. 이는 후에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문호 개방, 기회 균등을 주창하며 고노에 성명에 강하게 반발하고, 일본이 독자적 경제권을 만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중전쟁에서 미국은 표면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 무렵을 전후해서부터 중국의 장제스를 공공연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일미전쟁에 이 르는 대립의 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1939년 미국은 일미통상항해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고해 왔다. 석유를 비롯해 많은 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은 점차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일본 육군은 북방의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북진론(北進論) 사고가 전통적으로 강했으나, 이 무렵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석유 등과 같은 자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남진론 사고가 강해져 갔다. 그러나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 그 곳에 식민지를 갖고 있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 목적 불명의 수렁에 빠진 전쟁 ]
중국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온 국가를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정부는 의회의 동의 없이 물자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언론의 통제와 검열 등도 강화되었다.
중국 대륙에서의 전쟁은 장기화되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화평공작(和平工作)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 군부의 강경한 방침이 끊임없이 우위를 차지했다. 1940년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 대의사(代議士, 역주: 중의원 의원)는 제국의회에서 「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지만, 정부는 명확히 답할 수 없었다.
세계 공황 후 일본 국내에서도 독일이나 소련 같은 국가 체제하에서의 통제 경제를 이상으로 보는 풍조가 확대되었다. 1940년에는 정당이 해산되고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역주: 1940년 10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신체제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국민 통제 조직)로 통합되었다.
[ 악화되는 일미 관계 ]
한편 1933년 무렵부터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은 본국과 식민지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그 경제권 내부에서 중요한 상품의 자급자족을 추진하는 한편, 높은 관세를 매겨 권외의 상품을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을 블록 경제라고 한다.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은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 건설이라는 성명을 내고 일본∙만주∙중국을 통합한 독자적 경제권을 만들 것을 시사했다. 이는 후에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문호 개방, 기회 균등을 주창하며 고노에 성명에 강하게 반발하고, 일본이 독자적 경제권을 만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중전쟁에서 미국은 표면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 무렵을 전후해서부터 중국의 장제스를 공공연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일미전쟁에 이 르는 대립의 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1939년 미국은 일미통상항해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고해 왔다. 석유를 비롯해 많은 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은 점차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일본 육군은 북방의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북진론(北進論) 사고가 전통적으로 강했으나, 이 무렵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석유 등과 같은 자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남진론 사고가 강해져 갔다. 그러나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 그 곳에 식민지를 갖고 있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