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정당 정치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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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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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5 정당 정치의 전개
[ 정당 내각의 탄생 ]
일노전쟁 후 일본의 정치에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라는 정당과 번벌세력(藩閥勢力)이 번갈아 내각을 조직하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메이지천황이 죽고 다이쇼시대가 시작된 1912년경부터 번벌정치를 비판하고 헌법의 정신에 기반하여 국민의 의사를 반영 한 정치를 요구하는 운동(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데모크라시라는 말을 「민본주의」라고 번역하여,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1918년, 시베리아출병을 기대한 일부 상인들에 의한 쌀 매점 소문이 발단이 되어 쌀 가격이 올라가자, 이에 분노한 군중이 쌀 상인을 습격하는 소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쌀소동) 같은 해 내각이 총사직하자 입헌정우회의 총재인 하라 다카시(原敬)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조직하였다. 하라(原)는 육, 해, 외무의 3대신 이외의 모든 대신을 중의 원의 제1당인 입헌정우회의 의원 중에서 임명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정당내각을 조직하였다.
[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와 사회운동 ]
다이쇼시대,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대일본제국헌법 하에 의회에 기초를 둔 정당정치가 정착되고 보통선거운동과 같은 사회운동도 활발해져, 민주주의(데모크라시) 사상과 국제 협조의 여론이 고양되었다. 이것을 다이쇼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고 농촌에서는 소작쟁의도 일어났다. 1920년에는 일본 최초의 메이데이(May Day)가 행해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1922년에 전국스이헤이샤(全國水平社)가 조직되어 부락차별 철폐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부인운동도 시작되어, 히라쓰카 라이초 등의 활약에 의해 부인 참정권이 주장되었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확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 헌정(憲政)의 상도(常道) ]
하라 다카시(原敬)는 1921년 폭한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당세력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고 그후 비정당 내각이 계속되었지만, 1924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한 호헌 삼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8 년간 중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의 총재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이를 「헌정(憲政)의 상도(常道)」라고 한다. 가토내각은 1925년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납세액에 관계없이 25 세 이상의 남자 전원이 선거권을 획득하였다. 1928년에는 제1회 보통선거가 행해져 정우회(政友會)가 제1당이 되었다.
사진: 최초의 보통선거 (1928년 2월)
유권자의 수는 인구의 약 20%로 4배 가까이에 늘었다.
[ 정당 내각의 탄생 ]
일노전쟁 후 일본의 정치에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라는 정당과 번벌세력(藩閥勢力)이 번갈아 내각을 조직하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메이지천황이 죽고 다이쇼시대가 시작된 1912년경부터 번벌정치를 비판하고 헌법의 정신에 기반하여 국민의 의사를 반영 한 정치를 요구하는 운동(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데모크라시라는 말을 「민본주의」라고 번역하여,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1918년, 시베리아출병을 기대한 일부 상인들에 의한 쌀 매점 소문이 발단이 되어 쌀 가격이 올라가자, 이에 분노한 군중이 쌀 상인을 습격하는 소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쌀소동) 같은 해 내각이 총사직하자 입헌정우회의 총재인 하라 다카시(原敬)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조직하였다. 하라(原)는 육, 해, 외무의 3대신 이외의 모든 대신을 중의 원의 제1당인 입헌정우회의 의원 중에서 임명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정당내각을 조직하였다.
[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와 사회운동 ]
다이쇼시대,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대일본제국헌법 하에 의회에 기초를 둔 정당정치가 정착되고 보통선거운동과 같은 사회운동도 활발해져, 민주주의(데모크라시) 사상과 국제 협조의 여론이 고양되었다. 이것을 다이쇼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고 농촌에서는 소작쟁의도 일어났다. 1920년에는 일본 최초의 메이데이(May Day)가 행해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1922년에 전국스이헤이샤(全國水平社)가 조직되어 부락차별 철폐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부인운동도 시작되어, 히라쓰카 라이초 등의 활약에 의해 부인 참정권이 주장되었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확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 헌정(憲政)의 상도(常道) ]
하라 다카시(原敬)는 1921년 폭한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당세력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고 그후 비정당 내각이 계속되었지만, 1924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한 호헌 삼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8 년간 중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의 총재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이를 「헌정(憲政)의 상도(常道)」라고 한다. 가토내각은 1925년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납세액에 관계없이 25 세 이상의 남자 전원이 선거권을 획득하였다. 1928년에는 제1회 보통선거가 행해져 정우회(政友會)가 제1당이 되었다.
사진: 최초의 보통선거 (1928년 2월)
유권자의 수는 인구의 약 20%로 4배 가까이에 늘었다.
66 일미 관계와 워싱턴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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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6 일미 관계와 워싱턴회의
[ 일미 관계의 추이 ]
일노전쟁 후,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국이 되었다. 필리핀을 영유한 미국의 극동정책의 경쟁 상대는 일본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일노전쟁 직후부터 인종차별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 서부의 주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면 하고 우수한 일본인 이민자가 백인 노동자의 일을 뺏는다고 하여 일본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의 지도자는 일본인 이민자의 처지에 이해를 보였지만, 서부 주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철폐를 담은 결의를 제안하였다. 그 목적은 이민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고 있던 나라는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일본에게 동정적이었지만 서부 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반대에 가세하여 결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1) 그러나 일본의 제안은 세계로부터 커다란 공감을 얻었다.
(*1) 일본의 제안은 세계의 유색인종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투표 결과, 11 대 5로 찬성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의장을 맡은 미국 대표 윌슨은 중요한 의제는 만장일치를 요한다 하여 부결을 선언하였다.
<미 함대의 일본 방문>
1908(메이지 41)년 3월, 16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대서양함대가 세계일주 도중에 일본을 향해 전진해 왔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는 전함은 7척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함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이 건설한 함대의 위세를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선단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반세기 전의 흑선 내항과 대비해서 백선(白船)이라 불렸다.
일본정부는 거국적으로 함대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인상을 좋게하기 위해, 「품행방정한 수병 이외에는 배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요코하마에 입항하는 날 일본인 군중은 작은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연호하고, 미국 해군 장교들은 파티 공세를 만났다. 그들을 태운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천 명의 초등학생이 미국 국가「성조기(星條旗)」를 불렀다.
[ 워싱턴회의와 국제 협조 ]
192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해군 군축과 중국 문제를 주요 의제로 하는 워싱턴 회의가 미국의 제창으로 열려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이 모였다. 회의의 목적은 동아시아에 대한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고, 이 지역에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영·일의 해군 주력함의 보유율은 5:5:3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중국의 영토 보전, 문호 개방이 9개국 조약으로 성문화되었다. 동시에 20년 동안 계속된 일영동맹이 미국의 강한 의향으로 해소되었다.
주력함의 상호 삭감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군축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비 확장 경쟁에서는 경제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오히려 유리한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군 중에는 이에 불만을 갖는 의견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당 정치가 정착되 면서 국제 협조에 노력하고 있던 일본은 조약 사항을 잘 지켰다. (*2)
(*2) 1922년 조약이 성립하자, 일본은 즉각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권익을 중국에게 반환하고 군사력보다 경제 활동으로 국력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
1923년 9월 1일,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자·행방불명자가 10만을 넘었다. (관동대진재) 이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불온한 기도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주민들이 만든 자 경단(自警團) 등이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관 동대진재의 결과,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 일미 관계의 추이 ]
일노전쟁 후,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국이 되었다. 필리핀을 영유한 미국의 극동정책의 경쟁 상대는 일본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일노전쟁 직후부터 인종차별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 서부의 주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면 하고 우수한 일본인 이민자가 백인 노동자의 일을 뺏는다고 하여 일본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의 지도자는 일본인 이민자의 처지에 이해를 보였지만, 서부 주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철폐를 담은 결의를 제안하였다. 그 목적은 이민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고 있던 나라는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일본에게 동정적이었지만 서부 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반대에 가세하여 결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1) 그러나 일본의 제안은 세계로부터 커다란 공감을 얻었다.
(*1) 일본의 제안은 세계의 유색인종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투표 결과, 11 대 5로 찬성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의장을 맡은 미국 대표 윌슨은 중요한 의제는 만장일치를 요한다 하여 부결을 선언하였다.
<미 함대의 일본 방문>
1908(메이지 41)년 3월, 16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대서양함대가 세계일주 도중에 일본을 향해 전진해 왔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는 전함은 7척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함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이 건설한 함대의 위세를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선단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반세기 전의 흑선 내항과 대비해서 백선(白船)이라 불렸다.
일본정부는 거국적으로 함대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인상을 좋게하기 위해, 「품행방정한 수병 이외에는 배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요코하마에 입항하는 날 일본인 군중은 작은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연호하고, 미국 해군 장교들은 파티 공세를 만났다. 그들을 태운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천 명의 초등학생이 미국 국가「성조기(星條旗)」를 불렀다.
[ 워싱턴회의와 국제 협조 ]
192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해군 군축과 중국 문제를 주요 의제로 하는 워싱턴 회의가 미국의 제창으로 열려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이 모였다. 회의의 목적은 동아시아에 대한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고, 이 지역에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영·일의 해군 주력함의 보유율은 5:5:3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중국의 영토 보전, 문호 개방이 9개국 조약으로 성문화되었다. 동시에 20년 동안 계속된 일영동맹이 미국의 강한 의향으로 해소되었다.
주력함의 상호 삭감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군축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비 확장 경쟁에서는 경제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오히려 유리한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군 중에는 이에 불만을 갖는 의견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당 정치가 정착되 면서 국제 협조에 노력하고 있던 일본은 조약 사항을 잘 지켰다. (*2)
(*2) 1922년 조약이 성립하자, 일본은 즉각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권익을 중국에게 반환하고 군사력보다 경제 활동으로 국력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
1923년 9월 1일,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자·행방불명자가 10만을 넘었다. (관동대진재) 이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불온한 기도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주민들이 만든 자 경단(自警團) 등이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관 동대진재의 결과,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67 다이쇼(大正)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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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7 다이쇼(大正)의 문화
[ 새로운 학문과 문학 ]
메이지시대 말에서 다이쇼시대에 걸쳐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나라가 된다고 하는 목표가 달성되자, 새로운 지식에 민감한 청년들의 관심은 국가보다 개인의 내면을 향하게 되었다. 그에 수반하여 개성의 존중이나 자기 실현이 주장되고, 서양의 문학∙예술∙철학 등에 접해 교양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롭고 지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선(禪) 체험 위에 서양의 철학을 받아 들여 니시다철학(西田哲學)이라 불리는 독특한 철학을 낳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일본 서민의 생활풍속을 연구하는 민속학을 시작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등이 나와 학문에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에서는 인도주의를 내건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등의 백화파(白樺派) 작가들과 탐미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이지적인 작풍으로 알려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등장해서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다이쇼기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의 견지에서 노동자의 생활이나 혁명운동을 그린 프롤레타리아문학도 출현하였다. 또한 신극(新劇)이라 불리는 서양의 무대를 모범으로 한 연극도 활발해졌다.
[ 문화의 대중화와 도시 생활의 형성 ]
다이쇼기 중반부터는 중학교, 고등여학교, 대학이 다수 개교하였다. 민중의 지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신문 외에도 『중앙공론』과 『문예춘추』 등의 종합잡지가 읽혀지게 되고, 문학전집 등도 대량 출판되었다. 라디오방송도 개시되고 문화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근대 산업의 발전에 동반된 도시 생활자의 증대에 따라, 도시의 중심과 교외를 연결하는 사철(私鐵)이 개통되었다. 또한 합승자동차(버스)의 노선 확대, 백화점 개점, 여성 복장의 양장화, 카레라이스, 크로켓, 돈까스와 같은 양식(洋食)의 보급 등 오늘날까지 이르는 도시 생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버스걸(bus girl, 역주: 버스 여차장)이나 전화교환수 등 여성의 새로운 직장에의 진출도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특히 미국 영화는 인기를 끌었다.
[ 새로운 학문과 문학 ]
메이지시대 말에서 다이쇼시대에 걸쳐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나라가 된다고 하는 목표가 달성되자, 새로운 지식에 민감한 청년들의 관심은 국가보다 개인의 내면을 향하게 되었다. 그에 수반하여 개성의 존중이나 자기 실현이 주장되고, 서양의 문학∙예술∙철학 등에 접해 교양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롭고 지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선(禪) 체험 위에 서양의 철학을 받아 들여 니시다철학(西田哲學)이라 불리는 독특한 철학을 낳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일본 서민의 생활풍속을 연구하는 민속학을 시작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등이 나와 학문에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에서는 인도주의를 내건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등의 백화파(白樺派) 작가들과 탐미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이지적인 작풍으로 알려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등장해서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다이쇼기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의 견지에서 노동자의 생활이나 혁명운동을 그린 프롤레타리아문학도 출현하였다. 또한 신극(新劇)이라 불리는 서양의 무대를 모범으로 한 연극도 활발해졌다.
[ 문화의 대중화와 도시 생활의 형성 ]
다이쇼기 중반부터는 중학교, 고등여학교, 대학이 다수 개교하였다. 민중의 지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신문 외에도 『중앙공론』과 『문예춘추』 등의 종합잡지가 읽혀지게 되고, 문학전집 등도 대량 출판되었다. 라디오방송도 개시되고 문화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근대 산업의 발전에 동반된 도시 생활자의 증대에 따라, 도시의 중심과 교외를 연결하는 사철(私鐵)이 개통되었다. 또한 합승자동차(버스)의 노선 확대, 백화점 개점, 여성 복장의 양장화, 카레라이스, 크로켓, 돈까스와 같은 양식(洋食)의 보급 등 오늘날까지 이르는 도시 생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버스걸(bus girl, 역주: 버스 여차장)이나 전화교환수 등 여성의 새로운 직장에의 진출도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특히 미국 영화는 인기를 끌었다.
68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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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68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대두
[ 두 개의 전체주의 ]
유럽에서 탄생한 두 개의 정치사상이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대두하여 세계로 확 산되었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어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공산주의이다. 또 하나는 독일 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다른 유럽제국의 일부에도 파급된 파시즘이다.
양쪽 모두 전체주의(*1)의 일종으로, 각지에 혁명운동을 일으키고 독특한 정치체제를 만 들어내어 20세기의 역사를 크게 움직였다.
(*1) 국가와 민족 전체의 공유로 생각되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전체의 목적을 최우선시하는 형태.
[ 공산주의 ]
공산주의 사고방식에서는 노동자계급이 단결하여 혁명을 일으켜서 자본가를 추방하고 경제를 계획적으로 운영하여, 계급에 의한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공산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는 일당독재체제였다.
러시아혁명 후, 공산주의 나라가 된 소련(*2)은 레닌의 사후, 스탈린이 권력을 쥐었다. 스탈린은 중공업의 건설, 농업의 집단화를 진행하고 비밀경찰이나 강제수용소를 이용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소련은 무계급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강제노동과 방대한 수의 희생자를 낳았다.
소련은 전세계에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거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1919년에 코민테른(*3)이라 부르는 지도조직이 만들어졌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로 위치지어져, 모스크바 본부의 지시를 실행하여 각국의 정부를 타도하려 하였다. (*4)
(*2)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약칭. 소비에트를 기초로 하는 다수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지는 연방국가.
(*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칭. 소련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영미 등과의 연합을 위해 이를 해산하였다.
(*4) 일본에서도 일본공산당이 코민테른 일본지부로서 은밀히 창립되었다. 1925년 일본정부는 소련과 국교를 맺었지만 이것에 의해 국내에 파괴활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같은 해 사유재산제도의 부인 등과 같은 활동을 단속하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 파시즘 ]
이탈리아에서는 1922년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의한 독재정치가 시작되어,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다. 파시스트당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독재적인 군국주의의 경향을 파시즘이라고 하여 세계공황 후 경제적으로 고통받던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거액의 배상금을 짊어지게 되고 심각한 물가 상승이 엄습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이 높아졌다. 결국 히틀러가 나치스당(*5)을 이끌고 등장하여 민족 영광의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자,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그에게 이끌려 가게 되었다. 나치스당은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에 의한 국내의 혼란을 틈타 1932년에는 국회의 제1당으로 약진하였다. 다음해 히틀러는 정권을 쥐고 순식간에 독재체제를 완성시켰다.
나치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종이었다. 게르만 민족의 순수 혈통을 지킨다는 이념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유대인에 대해서는 철저한 박해를 가하였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비밀경찰과 강제수용소를 이용하여 대량의 살육(殺戮)을 행하였다. 두 개의 전체주의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로부터 지배 방법을 서로 배우고 있었다.
(*5)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 두 개의 전체주의 ]
유럽에서 탄생한 두 개의 정치사상이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대두하여 세계로 확 산되었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어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공산주의이다. 또 하나는 독일 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다른 유럽제국의 일부에도 파급된 파시즘이다.
양쪽 모두 전체주의(*1)의 일종으로, 각지에 혁명운동을 일으키고 독특한 정치체제를 만 들어내어 20세기의 역사를 크게 움직였다.
(*1) 국가와 민족 전체의 공유로 생각되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전체의 목적을 최우선시하는 형태.
[ 공산주의 ]
공산주의 사고방식에서는 노동자계급이 단결하여 혁명을 일으켜서 자본가를 추방하고 경제를 계획적으로 운영하여, 계급에 의한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공산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는 일당독재체제였다.
러시아혁명 후, 공산주의 나라가 된 소련(*2)은 레닌의 사후, 스탈린이 권력을 쥐었다. 스탈린은 중공업의 건설, 농업의 집단화를 진행하고 비밀경찰이나 강제수용소를 이용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소련은 무계급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강제노동과 방대한 수의 희생자를 낳았다.
소련은 전세계에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거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1919년에 코민테른(*3)이라 부르는 지도조직이 만들어졌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로 위치지어져, 모스크바 본부의 지시를 실행하여 각국의 정부를 타도하려 하였다. (*4)
(*2)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약칭. 소비에트를 기초로 하는 다수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지는 연방국가.
(*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칭. 소련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영미 등과의 연합을 위해 이를 해산하였다.
(*4) 일본에서도 일본공산당이 코민테른 일본지부로서 은밀히 창립되었다. 1925년 일본정부는 소련과 국교를 맺었지만 이것에 의해 국내에 파괴활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같은 해 사유재산제도의 부인 등과 같은 활동을 단속하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 파시즘 ]
이탈리아에서는 1922년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의한 독재정치가 시작되어,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다. 파시스트당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독재적인 군국주의의 경향을 파시즘이라고 하여 세계공황 후 경제적으로 고통받던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거액의 배상금을 짊어지게 되고 심각한 물가 상승이 엄습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이 높아졌다. 결국 히틀러가 나치스당(*5)을 이끌고 등장하여 민족 영광의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자,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그에게 이끌려 가게 되었다. 나치스당은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에 의한 국내의 혼란을 틈타 1932년에는 국회의 제1당으로 약진하였다. 다음해 히틀러는 정권을 쥐고 순식간에 독재체제를 완성시켰다.
나치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종이었다. 게르만 민족의 순수 혈통을 지킨다는 이념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유대인에 대해서는 철저한 박해를 가하였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비밀경찰과 강제수용소를 이용하여 대량의 살육(殺戮)을 행하였다. 두 개의 전체주의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로부터 지배 방법을 서로 배우고 있었다.
(*5)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