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명장면) 일본해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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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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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역사의 명장면) 일본해해전
[ 발틱함대 육박하다 ]
1904(메이지 37)년 10월, 러시아황제는 일노전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의 총력을 일본을 향해 출발시켰다. 7개월 이상에 걸친 인도양에서 동지나해에 이르는 대장거(大壯擧)였다.
일본해군의 연합함대를 이끄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장관(司令長官)은 1905(메이지 38)년 5월 26일까지 쓰시마해협에 전함대를 집결시켰다. 러시아측이 먼길의 항해에 따른 피로가 극심했던데 대해, 이 사이 일본해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포격의 맹훈련을 쌓아 명중률을 높이고 있었다.
다음날 5월 27일 미명에 「적함 발견!」이라는 통보로 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오후 두 시 경에 약 40척의 일본함대는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즉시 출동, 이를 격멸하고자 한다」라는 무전을 도쿄에 타전할 때,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는 여기에 「오늘 날씨는 맑고 화창하지만 파도는 높다」라는 한 행을 덧붙였다.
[ 일본의 대승리 ]
38척의 러시아 대함대가 2열로 일본해(日本海, 역주: 동해)를 북상해 왔다. 일본 전함대는 6000미터까지 접근한 시점에서 왼쪽으로 크게 회전해 적의 진로를 막아섰다. 일본함대는 러시아의 사령장관이 타는 기함(旗艦) 스와로프를 비롯한 선두를 가는 전함에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승부는 40분으로 결정났다. 기함 스와로프는 불기둥을 뿜고 사령탑은 날아갔다. 계속해서 4척의 전함이 격침되었다. 러시아의 사령장관은 부상당하여 후에 항복하였다.
이 해전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것은 포격의 명중률이 좋았던 것과, 기사(技師)인 시모세 마사치카가 발명한 고성능 화약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저녁 무렵에서 다음날에 걸쳐 일본은 추격전에 들어가 이틀간에 걸쳐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38척의 러시아함대 가운데, 격침 16척, 포획 6척, 도망 후에 억류된 것 6척, 간신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항으로 도망쳐 들어간 배는 3척 뿐이었다. 한편 일본측은 수뢰정(水雷艇) 3 척이 침몰했을 뿐이었다. 세계 해전사상에 이정도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일노전쟁에서 활약한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전후(戰後), 패배한 러시아 장군의 구명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지의 일본에도 패자에게 인정을 베푼다고 하는 무사도(武士道)는 살아 있던 것이다.
[ 발틱함대 육박하다 ]
1904(메이지 37)년 10월, 러시아황제는 일노전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의 총력을 일본을 향해 출발시켰다. 7개월 이상에 걸친 인도양에서 동지나해에 이르는 대장거(大壯擧)였다.
일본해군의 연합함대를 이끄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장관(司令長官)은 1905(메이지 38)년 5월 26일까지 쓰시마해협에 전함대를 집결시켰다. 러시아측이 먼길의 항해에 따른 피로가 극심했던데 대해, 이 사이 일본해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포격의 맹훈련을 쌓아 명중률을 높이고 있었다.
다음날 5월 27일 미명에 「적함 발견!」이라는 통보로 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오후 두 시 경에 약 40척의 일본함대는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즉시 출동, 이를 격멸하고자 한다」라는 무전을 도쿄에 타전할 때,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는 여기에 「오늘 날씨는 맑고 화창하지만 파도는 높다」라는 한 행을 덧붙였다.
[ 일본의 대승리 ]
38척의 러시아 대함대가 2열로 일본해(日本海, 역주: 동해)를 북상해 왔다. 일본 전함대는 6000미터까지 접근한 시점에서 왼쪽으로 크게 회전해 적의 진로를 막아섰다. 일본함대는 러시아의 사령장관이 타는 기함(旗艦) 스와로프를 비롯한 선두를 가는 전함에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승부는 40분으로 결정났다. 기함 스와로프는 불기둥을 뿜고 사령탑은 날아갔다. 계속해서 4척의 전함이 격침되었다. 러시아의 사령장관은 부상당하여 후에 항복하였다.
이 해전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것은 포격의 명중률이 좋았던 것과, 기사(技師)인 시모세 마사치카가 발명한 고성능 화약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저녁 무렵에서 다음날에 걸쳐 일본은 추격전에 들어가 이틀간에 걸쳐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38척의 러시아함대 가운데, 격침 16척, 포획 6척, 도망 후에 억류된 것 6척, 간신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항으로 도망쳐 들어간 배는 3척 뿐이었다. 한편 일본측은 수뢰정(水雷艇) 3 척이 침몰했을 뿐이었다. 세계 해전사상에 이정도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일노전쟁에서 활약한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전후(戰後), 패배한 러시아 장군의 구명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지의 일본에도 패자에게 인정을 베푼다고 하는 무사도(武士道)는 살아 있던 것이다.
59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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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9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
[ 일본 국가의 새로운 과제 ]
일청∙일노의 두 전쟁에서의 승리에 의해, 일본은 구미열강의 압력 하에서 독립을 유지한다고 하는 막부 말 이래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향상되어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근대일본의 건설은 이에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국제적 지위의 향상은 일본국가(日本國家)에 있어서 무거운 시련이 부과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유일한 유색 인종의 대국으로서 구미 열강으로부터 경계의 시선 을 받게 되었다.
[ 한국병합(韓國倂合) ]
일노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해 갔다. 구미 열강은 영국의 인도, 미국의 필리핀, 러시아의 외몽고 등 자국의 식민지나 세력권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영향하에 두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국의 병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0(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내의 반대를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 (한국병합)
한국 국내에는 민족이 독립을 잃는 것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독립 회복 운동이 끈질기게 이루어졌다.
한국병합 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철도와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했고 토지 조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그 때까지의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어 교육 등 동화(同化) 정책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다.
[ 중화민국의 성립 ]
일본은 일청전쟁 후 영토가 된 대만에서도, 주민의 저항을 억누르고 대만총독부를 두어 현지 개발을 했다. 한편 청나라로부터는 일청전쟁 후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해 많은 유학생이 찾아왔다. 쑨원(孫文)은 1905년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를 결성해, 삼민주의(三民主義) (*1)를 내걸고 청조를 타도하려는 운동을 개시했다.
1911년 민중의 반정부 운동과 군의 반란이 연계되어 많은 성(省)이 청조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 한다. 같은 해 난징(南京)에 혁명파 대표들이 모여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다음해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청조 정부의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혁명파와 힘을 합쳐 황제를 퇴위시키고 청조를 멸망시켰으며, 그 대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혁명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후 중국은 통일성을 잃고 무력을 지니는 지방 정권인 크고 작은 군벌이 각 지방을 제각기 지배하게 되었다.
(*1) 민족의 독립, 민권의 신장, 민생의 안정이라는 세 가지 주의.
[ 일본 국가의 새로운 과제 ]
일청∙일노의 두 전쟁에서의 승리에 의해, 일본은 구미열강의 압력 하에서 독립을 유지한다고 하는 막부 말 이래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향상되어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근대일본의 건설은 이에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국제적 지위의 향상은 일본국가(日本國家)에 있어서 무거운 시련이 부과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유일한 유색 인종의 대국으로서 구미 열강으로부터 경계의 시선 을 받게 되었다.
[ 한국병합(韓國倂合) ]
일노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해 갔다. 구미 열강은 영국의 인도, 미국의 필리핀, 러시아의 외몽고 등 자국의 식민지나 세력권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영향하에 두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국의 병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0(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내의 반대를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 (한국병합)
한국 국내에는 민족이 독립을 잃는 것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독립 회복 운동이 끈질기게 이루어졌다.
한국병합 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철도와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했고 토지 조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그 때까지의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어 교육 등 동화(同化) 정책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다.
[ 중화민국의 성립 ]
일본은 일청전쟁 후 영토가 된 대만에서도, 주민의 저항을 억누르고 대만총독부를 두어 현지 개발을 했다. 한편 청나라로부터는 일청전쟁 후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해 많은 유학생이 찾아왔다. 쑨원(孫文)은 1905년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를 결성해, 삼민주의(三民主義) (*1)를 내걸고 청조를 타도하려는 운동을 개시했다.
1911년 민중의 반정부 운동과 군의 반란이 연계되어 많은 성(省)이 청조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 한다. 같은 해 난징(南京)에 혁명파 대표들이 모여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다음해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청조 정부의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혁명파와 힘을 합쳐 황제를 퇴위시키고 청조를 멸망시켰으며, 그 대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혁명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후 중국은 통일성을 잃고 무력을 지니는 지방 정권인 크고 작은 군벌이 각 지방을 제각기 지배하게 되었다.
(*1) 민족의 독립, 민권의 신장, 민생의 안정이라는 세 가지 주의.
[인물 칼럼] 대만의 개발과 핫타 요이치(八田與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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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인물 칼럼] 대만의 개발과 핫타 요이치(八田與一)
일본의 통치에 있던 대만의 가남평야(嘉南平野)는 대만의 전 경작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넓었지만,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우기에는 홍수로, 건기에는 물 부족에 시달리는 불모의 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에서 토목 기술을 배운 후 대만총독부에 부임한 핫타 요이치(1886-1942년)는 현지 조사를 하고 공사계획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가남평야의 상류를 막아 댐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관개 시설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공사는 한없이 어려웠다. 어느 날 석유 가스가 폭발하며 50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핫타는 「이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며 탄식했지만, 대만 사람들은 「사고는 당신 탓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대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오히려 핫타를 위로했다.
1930년, 10년에 걸친 세기의 대사업은 완성되었고, 가남평야는 녹색 대지로 다시 태어났다. 미국의 토목학회는 「핫타댐」이라 명명하고, 세계에 그 위업을 소개했다.
일본의 통치에 있던 대만의 가남평야(嘉南平野)는 대만의 전 경작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넓었지만,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우기에는 홍수로, 건기에는 물 부족에 시달리는 불모의 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에서 토목 기술을 배운 후 대만총독부에 부임한 핫타 요이치(1886-1942년)는 현지 조사를 하고 공사계획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가남평야의 상류를 막아 댐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관개 시설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공사는 한없이 어려웠다. 어느 날 석유 가스가 폭발하며 50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핫타는 「이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며 탄식했지만, 대만 사람들은 「사고는 당신 탓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대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오히려 핫타를 위로했다.
1930년, 10년에 걸친 세기의 대사업은 완성되었고, 가남평야는 녹색 대지로 다시 태어났다. 미국의 토목학회는 「핫타댐」이라 명명하고, 세계에 그 위업을 소개했다.
60 근대 산업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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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4-4 근대산업의 발전과 문화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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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근대 산업의 발전과 문화의 형성 60 근대 산업의 발전
[ 일본의 산업혁명 ]
정부는 메이지 초년부터 식산흥업에 힘써, 관영사업은 서양 산업의 모범을 민간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1880년대에 들어서자, 정부는 일본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관영공장을 불하하여 경제 발전을 민간의 손에 맡겨 나갔다. 기계를 갖춘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게 된 면사, 생사, 면직물은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이러한 수출에 의해 얻은 대금으로, 면화 등의 원료와 군함, 철강, 기계 등이 수입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른 배상금은 중공업에 투자되어, 1901(메이지 34)년에 관영의 야하타(八幡)제철소가 개업하여 철강의 국내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와 동반하여 조선업도 발전을 이루어, 일노전쟁 후에는 1만 톤 이상의 조선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산업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메이지시대에 근대산업이 발전한 요인의 하나로, 에도시대 이래의 민중의 높은 교육수준과 근면 정신이 있었다. 또한 사민 평등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노력과 계획으로 인생을 열어 가려는 정신이 자라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와 같은 유능한 실업가가 다수 등장하였다.
[ 변화하는 도시와 농촌의 생활 ]
산업발전을 떠받친 것은 근대적인 교통망의 확충이었다. 1889(메이지 22)년에는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신바시(新橋)∙고베(神戶) 간이 전선개통(全線開通)되어 전국의 철도망이 확대되어 갔다. 또한 마차 등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도로도 정비되어 갔다. 지방의 도시나 농촌에도 철도가 통하여, 그때까지의 가도(街道) 연변을 대신해서 역주변이 새롭게 발전하였다.
근대산업의 발전과 교통망의 정비로 직업이나 사업의 선택 폭이 넗어졌다. 농촌에서도 다양한 부업이 시도되고,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미식(米食)이 보급되고 인구도 착실히 증가해 갔다. 자녀를 제사공장의 여공으로 돈을 벌러 내보내거나, 도시에 이주해서 공장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도 다수 나오게 되었다.
도쿄 등의 대도시에서는 유리가 보급되어 쇼윈도우가 늘어 서고, 민가에서도 유리 장지가 이용되게 되었다. 또한 길거리에 시계탑이 설치되어 정확한 시각에 맞추어 생활하는 습관이 확산되고 공장 등에서도 시간 단위로 노동이 계산되게 되었다.
[ 사회 문제의 발생 ]
근대산업의 발전과 함께 공장근로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근로가 문제가 되었다. 일청전쟁 후에는 노동조합운동도 시작되었다. 1891(메이지 24)년에는 아시오동산(足尾銅山)의 광독(鑛毒)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901년에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는 이를 천황에게 직소하려고 해서 널리 주목을 받았다. 급속한 근대산업 발전의 그늘에는 새롭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 일본의 산업혁명 ]
정부는 메이지 초년부터 식산흥업에 힘써, 관영사업은 서양 산업의 모범을 민간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1880년대에 들어서자, 정부는 일본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관영공장을 불하하여 경제 발전을 민간의 손에 맡겨 나갔다. 기계를 갖춘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게 된 면사, 생사, 면직물은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이러한 수출에 의해 얻은 대금으로, 면화 등의 원료와 군함, 철강, 기계 등이 수입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른 배상금은 중공업에 투자되어, 1901(메이지 34)년에 관영의 야하타(八幡)제철소가 개업하여 철강의 국내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와 동반하여 조선업도 발전을 이루어, 일노전쟁 후에는 1만 톤 이상의 조선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산업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메이지시대에 근대산업이 발전한 요인의 하나로, 에도시대 이래의 민중의 높은 교육수준과 근면 정신이 있었다. 또한 사민 평등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노력과 계획으로 인생을 열어 가려는 정신이 자라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와 같은 유능한 실업가가 다수 등장하였다.
[ 변화하는 도시와 농촌의 생활 ]
산업발전을 떠받친 것은 근대적인 교통망의 확충이었다. 1889(메이지 22)년에는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신바시(新橋)∙고베(神戶) 간이 전선개통(全線開通)되어 전국의 철도망이 확대되어 갔다. 또한 마차 등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도로도 정비되어 갔다. 지방의 도시나 농촌에도 철도가 통하여, 그때까지의 가도(街道) 연변을 대신해서 역주변이 새롭게 발전하였다.
근대산업의 발전과 교통망의 정비로 직업이나 사업의 선택 폭이 넗어졌다. 농촌에서도 다양한 부업이 시도되고,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미식(米食)이 보급되고 인구도 착실히 증가해 갔다. 자녀를 제사공장의 여공으로 돈을 벌러 내보내거나, 도시에 이주해서 공장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도 다수 나오게 되었다.
도쿄 등의 대도시에서는 유리가 보급되어 쇼윈도우가 늘어 서고, 민가에서도 유리 장지가 이용되게 되었다. 또한 길거리에 시계탑이 설치되어 정확한 시각에 맞추어 생활하는 습관이 확산되고 공장 등에서도 시간 단위로 노동이 계산되게 되었다.
[ 사회 문제의 발생 ]
근대산업의 발전과 함께 공장근로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근로가 문제가 되었다. 일청전쟁 후에는 노동조합운동도 시작되었다. 1891(메이지 24)년에는 아시오동산(足尾銅山)의 광독(鑛毒)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901년에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는 이를 천황에게 직소하려고 해서 널리 주목을 받았다. 급속한 근대산업 발전의 그늘에는 새롭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