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0 학제∙병제∙세제의 개혁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0 학제∙병제∙세제의 개혁
메이지유신의 3대 개혁
[ 학제 발포 ]
메이지 정부는 3가지의 강력한 제도개혁, 즉 학교제도, 징병제도, 조세제도의 개혁을 추진하 여 평등한 국민들로 구성되는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기반을 굳혔다. 이 3가지는 이윽고 국민들 사이에 취학의 의무,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로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72(메이지 5)년, 학제(學制)가 발포되었다. 교육은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개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사고가 주창되어, 「어느 마을이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집은 한 집도 없고, 어느 집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는 한 사람도 없게 한다.」(*1)라는 선언이 나왔다.

소학교가 의무교육이 되고 에도시대 데라코야(寺子屋, 역주: 에도시대의 초등교육기관. 한국의 서당에 해당)의 대부분이 소학교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불과 수년 사이에 2만 6천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취학률은 처음에는 50% 이하였지만, 그후 급격히 증가하여 메이지 말기에는 거의 100%에 달하였다.

(*1) 「반드시 마을에 배우지 않는 집이 없고, 집에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힘을 쓴다 」-『학사장려(學事奬勵)에 관한 경출서(仰出書)』에서

[ 징병령의 시행 ]
1873(메이지 6)년에는 징병령(徵兵令)이 공포되었다. 20세에 달한 남자는 사족(士族), 평민 의 구별 없이 모두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징병령은 서양의 제도를 받아 들여, 사민 평등 의 사상에 바탕한 국민군(國民軍)을 만드는 개혁이었다.

에도 시대까지 무기를 지니고 싸우는 것은 무사에 한정되었으며, 이것은 무사의 명예이자 특권이기도 하였다. 국민에게 평등한 의무를 부담시키는 징병제는, 사족으로부터는 특권을 빼앗는 것으로서 반발을 사고, 평민들은 일가의 젊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담이 고통스럽다 고 하여, 초기에는 여러 가지 불안을 야기시켰다.

[ 지조개정(地租改正)의 실현 ]
1868(메이지[明治]1)년, 정부는 농민이 전답에 무엇을 심을 것인 지는 자유라고 하고, 전답의 매매를 인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나아가 정부는 전국의 지가(토지 가격)를 정하고 토지 소유자를 확정하여 이들에게 지권(地券)을 교부하였다. 지권에는 소유자∙면적∙지가∙ 지조(세금)등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지권을 근거로 1873년 정부는 지조개정 (地租改正) 에 착수하였다.

에도시대의 연공은 수확고에 기초해서 쌀을 물납(物納)하는 것으로, 세율도 각 번에 따라 제 각각이었다. 이 지조개정에 의해 지가의 3%(*2)에 해당하는 지조를 화폐로 납부하는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전국의 토지에 일률적으로 과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정부의 세입(稅入) (*3)은 안정되었다.

지조개정은 토지를 보유하는 농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 위에 납세의 의무를 부과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근대국가의 재정기반이 다져졌다.

(*2) 지조개정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1877년에는 2.5%로 인하되었다.
(*3) 연도별 수입. 사진: 지권(地券) (국문학연구자료관 사료관 소장)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 구미 열강의 식민지화를 피하다 ]
1800년에 지구의 육지 약 35%를 지배하고 있던 구미 열강은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 지배권(支配圈)이 약84%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메이지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편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미 열강에 의한 영토확대정책은 제국주의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일본이 독립을 유지해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설 때까지의 역사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시대에 일어난 것이었다.

[ 중국·조선과 일본의 갈림길 ]
이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청조)은 구미 열강의 무력에 의한 위협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다. 중국에 조공하고 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아편전쟁에 충격을 받은 것은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이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자국의 문명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이 있어, 영국 등은 세계의 끝에 있는 야만스런 민족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움직임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과 청조는 차츰 열강에게 침식당해 영토 보존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에도 시대에 걸쳐 무가(武家) 사회라는 면이 있어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특히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라는 두 유력한 번(藩)이 막부 말에 서구 나라들과 전쟁을 한 결과, 구미와 일본의 힘의 차이를 통절히 인식하고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 무사의 희생에 의한 개혁 ]
메이지유신에 의해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사민평등의 사회가 실현되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사의 특권은 폐지되고 무사 신분 그 자체가 소멸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유럽의 혁명, 특히 프랑스혁명처럼 시민이 폭력으로 귀족의 권력을 타도한 혁명이 아니었다. 무사신분을 폐지한 것은 다름아닌 무사신분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메이지신정부(明治新政府)였다.

이것에 관해 어느 프랑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특권 계급이었던 무사는 다른 계급에 의해 타파된 것이 아닙니다. 외국의 압력 앞에서 스스로 혁명을 추진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희생을 치룬 것입니다. 혁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어느 계급이 다른 계급을 쓰러뜨린다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닙니다. 무사들이 바란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리스 뱅거[Maurice Bange]『스스로를 죽인 일본사』에서 일부 요약)

메이지유신은 오야케(公)을 위해 일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던 무사들에 의해 실현된 개혁이었다.

[ 메이지유신과 교육입국(敎育立國) ]
메이지유신의 개혁에 있어서 새로운 나라만들기의 근본으로 여져진 것은 교육이었다. 교육을 중시하는 사상은 에도시대로부터 계승된 것이었다. 그것은 막부 편에 섰던 번(藩)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막부 편에 붙어 보신전쟁에서 패한 나가오카번(니가타현)에서는 전란과 홍수의 피해가 겹쳐 심각한 식료부족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괴로움을 차마 못본 친척 관계에 있는 번으로부터 「미백표(米百俵), 역주: 쌀 100석」가 위문품으로 보내어져 왔다. 그러나 번정(藩政)의 책임자였던 고바야시 도라사부로(小林虎三郞)는 한 톨의 쌀도 번사에게 배분하지 않고, 장래의 인재 육성을 위해 번의 학교를 개교하는 자금으로 돌려 버렸다. 장래에 대비해서 자원(資源)을 인재 만들기에 중점적으로 배분하는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근원이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무사의 자제를 위한 번교(藩校)와 일반 서민을 위한 데라코야(寺子屋)의 두 교육 기관이 있었다. 메이지정부에서는 일찍부터 평등하고 공평한 교육 기회를 국민에게 보장하는 학교제도를 만들었다. 학제발포(學制發布)에 의해 정부는 2만 6천 교의 소학교 설치를 목표로 하였다. 그 대부분은 데라코야나 번교를 전용한 것이었다. 학교는 국민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무사의 아이들도 정인(町人)∙농민의 아이들과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여 경쟁하게 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평등하게 미래가 약속되는 이러한 구조는 그때까지의 신분의식을 파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명치유신의 교육입국 방침은 일본 근대화의 토대가 된 것이다.

51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 획정(劃定)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1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 획정(劃定)
[ 북방의 영토 획정 ]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을 지향한 일본은, 이웃 나라들과의 사이에 국경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국경을 획정(劃定)하지 않으면 주민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장하거나 국민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주민에게 부여하는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가라후토(樺太, 사할린)에는 마미야 린조(蔵間宮林)의 탐험 이후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후 러시아인이 이주를 시작하여, 러시아는 가라후토가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잡거(雜居)의 땅이라고 일본인에게 인정하게 하였다. 양자의 사이에서는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국은 일본이 만일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가라후토는 물론이고 홋카이도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메이지 정부에 경고해 왔다. 신정부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75(메이 지 8)년 러시아와 가라후토, 지시마교환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이 가라후토 전체를 러시아에 양도하고, 그 대신에 지시마열도(千島列島, 쿠릴제도)를 일본령으로 하는 것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를 일본령으로 하여 1876년에 각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미 영국선이 이곳에도 영국기를 세우고 있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일본령이 되었다.

[ 대만 출병과 류큐(琉球) ]
일본은 청과의 국교 수립을 위해 1871(메이지 4)년 일청수호조규(日淸修好條規)를 맺었다. 이는 국제법의 원리에 근거해 양국의 대등한 관계를 정한 조약이었다.

같은 해, 류큐(역주: 지금의 오키나와)의 도민 66명이 대만에 표착하여 54명이 대만 주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류큐는 일본과 청 양쪽에 종속되어 있었다. 일본은 류큐 도민의 살해 책임을 청나라에게 물었지만, 청은 대만 주민을 「화외민(化外民)」(*1)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대만 주민을 벌하는 것은 일본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1874년 대만에 병사를 보냈다(대만 출병). 이 충돌은 근대 국민 국가의 관념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청과 일본 간의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청과의 협의 결과,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청은 이로 인해 류큐 도민을 일본 국민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일본은 1879(메이지 12)년 류큐를 일본 영토로 삼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했다. (류큐 처분[琉球處分])

그리하여 일본은 이웃 여러 나라 사이의 국경을 거의 획정짓는 데 성공했다.

(*1) 「국가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자」라는 의미.

<일청수호조규(1871년)>
제1조 일청 양국은 우호를 돈독히 하고, 서로 영토를 존중한다.
제2조 만약 다른 나라로부터 부당한 간섭이 있으면 양국은 상호 원조한다. (일부 요약)

[ 조선과의 외교 ]
메이지 정부는 유신 직후인 1868년, 새로 조선과 국교를 맺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준비한 국서(國書)에 부적절한 문자가 사용되었다(*2)는 이유로 외교 관계 맺기를 거부했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의 외교에서는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었다.

(*2) 일본 사절이 지참한 국서에 일본 천황을 일컫는 「황(皇)」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52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2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 이와쿠라사절단 ]
1871(메이지 4)년 폐번치현 후에 신정부(新政府)로서 정식으로 조약 체결국을 방문하고, 동시에 조약개정의 예비 교섭을 하기 위해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대표로 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의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되었다(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

사절단은 유학생을 포함해서 전체 11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절단은 2년 가까이 구미 문명을 현장에서 습득한 결과, 구미와 일본의 문명의 진보 차이 를 약 40년으로 어림잡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 산업의 확립(부국[富國])을 우선으로 해서 구미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이 본 세계>
(구메 구니타케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서 발췌 요약)
◆유럽에서 「의원을 선거로 뽑고 법률을 모두가 함께 의결하는 것은 공평한 것 같지만, 이견(異論)이 나와 다수결로 정하면 대부분 좋은 안은 통과되지 않는다」 「영국이 풍요로운 것은 민중이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약자의 살은 강자에게 먹히게 된다. 유럽인이 멀리까지 항해하게 되면서 열대(熱帶)의 약한 나라는 유럽인들이 다투어 먹는 바가 되었다.

[ 정한론 ]
그런데 국내에서는 1873(메이지 6)년 일본의 개국 권유를 거절해 온 조선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하여, 사족(士族, 역주: 메이지유신 이후 옛 무사 계급에게 주어진 신분)들 사이에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한론이 일어났다. 폐번(廢藩, 역주: 번 제도의 폐지)으로 실업한 사족들은 징병령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무사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조선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보여주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기대를 건 것은 사절단의 부재 동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는 정부에서 근대 국가를 만드는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사족들의 정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명예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고는 자신이 사절단으로서 조선에 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 다른 참의(參議)도 이에 동의하여 정부의 결정을 얻어냈다. 사이고 자신은 전쟁을 각오한 교섭으로 조선에게 문호를 열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정부의 분열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 ]
그러나 구미 각국의 강대한 군사력을 목격하고 귀국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이와 쿠라 도모미(岩倉具視)등은, 국력의 충실을 먼저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출병은 구미의 간섭을 초래한다고 우려하였다. 이에 이들은 조정과 정부 부내(部內)에 공작하여, 각의에서 정식으로 결정된 사이고(西鄕)의 사절 파견을 연기하였다. 이에 화가 난 사이고와 에토 신 페이(江藤新平),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은 정부의 관직을 사임하였다. (*1)

1876(메이지 9)년 정부는 일시금 급부를 지불하여, 구번(舊藩)을 대신하여 정부가 사족에게 급부(給付)하고 있던 녹(祿, 역주: 급여)을 중단하였다. (질록처분[秩綠處分]) 이에 불만을 가진 각처의 사족이 정부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사이고는 가고시마 (鹿兒島)로 돌아가 사학교(私學校)를 열고 있었는데, 불만을 가진 전국의 사족은 사이고에게 기대를 하였다. 1877(메이지 10)년, 가고시마의 사족들은 사이고를 지도자로 해서 거병 하였지만 징병된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 군대에게 패하였다. (세이난[西南]전쟁) 이후 사족들의 무력에 의한 저항은 종언을 고했다.

(*1) 이 뒤에 일본은 1875년 조선의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파견하여 무단으로 주변의 연안을 측량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에, 군함이 포격을 당하여 교전하는 사건이 발 생하였다 (강화도사건). 이것을 이유로 일본은 다음해인 76년에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 를 맺어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것은 조선에게 있어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