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6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전개

4-1절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6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전개
[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막부는 조정의 허가를 얻지 못한 채,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어 하코다테(函館), 가나가와(요코하마[橫濱]), 니가타(新瀉), 효고(兵庫縣, 고베[神戶]), 나가사키(長崎)의 5개 항구를 열었다.

그 후 일본은 외국 나라들과(*1) 위와 같은 조약을 맺었지만, 이들 조약은 일본에서의 외국인 범죄를 일본측이 재판할 수 없고(치외법권), 일본에게 수입 관세율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 (관세자주권)가 없는 불평등조약 이었다.

(*1)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각각 조약을 맺었다.

[ 존왕양이 운동 ]
막부가 통상조약에 조인한 것에 대해, 조정의 의향을 무시하고 외국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이것은 조정을 받드는 존왕(尊王)과 외국을 배척해야 한다는 양이(攘夷)의 요구가 연결된 존왕양이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조약 체결을 추진한 막부의 다이로(大老, 역주: 쇼군을 보좌하는 최고의 관직) 이이 나오스 케(伊井直弼)는, 미토번(水戶藩, 이바라키현)의 전(前) 번주인(藩主, 역주: 번의 영주,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와 조슈번(長州藩, 야마구치현)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등의 존왕양이파 100 여명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다. (안세이의 대옥, 安政의 大獄) 그러나 1860년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에도성으로 출근하는 도중에 사쿠라다몬 근처에서 안세이의 대옥에 분개한 미토번 등의 낭사(浪士, 역주: 주군을 떠나 봉록[封祿]을 잃고 떠도는 무사)들에게 암살되었다. (사쿠라다몬가이 사건[櫻田門外의 變])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과거에 세키가하라의 싸움에 패하여 영지가 축소되어 있던 조슈번은 막부 비판 세력의 중심이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숙(私塾, 역주: 사설 교육기관)에서 제자들에게 존왕양이에 대해 강설하여 큰 감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쇼인이 안세이의 대옥에서 처형되자 그 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2) 등은 조슈번을 움직이게 되고, 일부의 구게(公家)와 연결하여 조정을 강경한 양이론으로 유도해 나갔다.

(*2) 당시에는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 양이(攘夷)의 결행 ]
조정의 양이 요구에 눌린 막부는 1863년 각 번(藩)에 양이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조슈번은 시모노세키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해 양이를 결행하였다. 이듬해 영미불란(英米佛蘭, 역주: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4국 군함이 연합함대를 이루어 보복을 위해 왔다. 조슈번은 구미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참한 패배를 하였다.

막부 말에 있어서 조슈번과 어깨를 겨루는 유력한 세력은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이었다. 1862년 에도로부터 귀국(歸國, 역주: 자신의 영지로 돌아감) 길에 있던 사쓰마번의 행렬에 4 인의 영국인의 말이 접촉하여, 이를 무례하다고 해서 수행 무사가 한 명의 영국인을 베어 죽였다(나마무기사건[生麥事件]). 이듬해 배상을 요구해 온 영국함대와 사쓰마번이 싸워 가고시마 거리는 불바다가 되었다.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

외국과 전쟁을 한 삿초(薩長, 역주: 사쓰마와 조슈) 양 번의 양이파 무사들은 서양문명의 힘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단순한 양이론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연중에 개국론으로 전환하면서 막부비판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47 삿초동맹(薩長同盟)과 막부의 멸망

4-1절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7 삿초동맹(薩長同盟)과 막부의 멸망
[ 삿초동맹과 도막운동 (倒幕運動) ]
1863년 막부는 조정으로부터 조슈번 세력과 이들과 연결한 양이파 구게(公家)를 추방하고, 도쿠가와와 사쓰마(가고시마현), 아이즈(후쿠시마현) 등의 유력한 번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를 만들었다. 나아가 다음해에 막부는 각번을 지휘해서 조슈번을 공격하고, 이를 항복시켰다. (조슈정벌) 그러나 조슈번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막부에 굴복한 번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과 함께 번의 주도권을 무력으로 탈환함으로써, 조슈번은 다시 막부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사쓰마번에서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번정(藩政)의 실권을 쥐고,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의 경험으로부터 양이를 포기하고 군비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조슈번을 교토에서 추방하여 세력을 회복한 막부와 대결하는 자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1866년, 도사번(고치현)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외국에 대항 할 수 있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만들 필요성을 주창하여, 그때까지 반목하고 있던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중재하여 삿초동맹 (薩長同盟)을 맺고, 두 번(藩)이 제휴하여 도막을 목표로 할 것을 밀약시켰다. 이렇게 하여 존왕양이운동은 도막(倒幕)운동으로 변화하여 갔다.

[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멸망 ]
1866년 선대의 쇼군(將軍)이 서거한 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제15대 쇼군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막부에 호의적이던 고메이 천왕(孝明天皇)이 서거하고 14세의 메이지 천왕(明治天皇)이 즉위하여, 조정 내부에서는 도막파가 우세해졌다.

1867년 10월, 요시노부(慶喜)는 도쿠가와가(德川家)가 막부라는 형태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고 삼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지위를 조정에 반환하였다.(*1) 이것을 다이세이 봉환(大政奉還)이라고 한다. 요시노부는 천황 밑에 다이묘들이 모이는 의회를 만들어, 이중에서 최대의 다이묘인 도쿠가와가가 실질적인 지배를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시노부의 의도를 간파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쿠보 도시미치는 구게(公家)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나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등과 연결하여, 조정(朝廷)이 요시노부의 추방과 영지 몰수를 하도록 기획하였다.

그 결과 1867년 말 조정은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대호령을 발하여, 고대건국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 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를 조직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260년간에 걸친 도쿠가와막부는 멸망하였다. 이는 무사가 정권을 잡았던 시대의 종말이기도 하였다.

(*1)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이래 무가(武家)의 수장을 지칭하며, 도쿠 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임명된 이후에는 도쿠가와가(德川家)가 대대로 세습하였다. 이를 반환하는 것은 정권의 반환을 의미한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정부로의 전환>
페리가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한 지 불과 15년 후에 도쿠가와 막부는 멸망하였다. 조선의 이조(李朝, 역주: 이씨 왕조)는 구미열강이 밀어 닥친 후에도 44년이나 계속되었고, 청조는 72년간이나 무너지지 않았다. 이들과 비교해 보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대단히 짧은 기간에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의 세력에 의해 쓰러진 것이 된다. 이것은 어째서일까.

이조나 청조에서는 시험제도(試驗制度, 역주: 과거)를 통해 전국의 우수한 인재가 중앙으로 모아졌다. 황제나 국왕이 강대한 힘을 가진 반면, 지방의 대항세력은 약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각지의 번에서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다. 이는 후에 막부를 쓰러뜨리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일본에는 황실(皇室)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전국의 무사는 최종적으로 천황을 섬기는 입장에 있었다. 황실은 정치의 실권은 없었지만, 권위의 상징으로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열강의 압력이 강해지자 막부의 권위는 쇠퇴하였지만, 막부를 대신하여 다시 황실을 일본 통합의 중심으로 함으로써, 정권의 이동이 단기간에 무리없이 이루어졌 다.

48 메이지 유신의 시작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48 메이지 유신의 시작
[ 보신전쟁(戊辰戰爭)과 구(舊)막부군의 멸망 ]
천황 밑에 만들어진 신정부의 지도자로 임명된 것은 도막파의 구게(公家)와 무사들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여기에 참가하지 못하고 신정부에 영지의 반환을 명받았다. 구막부군(舊幕府軍)은 이 명령에 분격하여 1868년 1월 교토의 도바∙후시미(鳥羽∙伏見)에서 삿초 양 번을 주체로 하는 신정부군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패하였다(도바∙후시미의 싸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구막부군을 추격하여 양 군의 싸움은 전국적인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신정부군은 천황의 군대를 나타내는 니시키노미하타(錦의 御旗, 역주: 붉은 비단에 해와 달을 금은으로 수놓거나 그린 깃발로 가마쿠라시대 경부터 관군의 표장으로 이용)를 선두에 내걸고, 관군(조정군[朝廷軍])으로서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리하게 싸움을 진행시켜 에도를 점령하였다. 이 때 신정부군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 측의 가쓰 카이슈(勝海舟)가 서로 이야기를 해 에도성을 무혈 개성(無血開城)하였다.

내전은 그 후 동북에까지 이르러 아이즈번(會津藩)에서는 16-17세의 소년 19 명이 자인(自刃, 역주: 칼로 자결함)하는 뱟코타이(白虎隊)의 비극을 낳았다. 다음해 5월 막부 측의 최후 거점이었던 홋카이도∙하코다테의 고료카쿠(五稜郭)가 신정부의 손에 떨어져 구막부군 은 멸망하였다. 이 1년 반에 이르는 내전을 보신전쟁(戊辰戰錚)이라 한다.

[ 근대국가 건설의 기본 방침 ]
왕정복고의 대호령 가운데에는 옛것을 새롭게 하여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 는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라는 말이 인용되었다. 여기에서 막부 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이르는 일련의 변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부른다.

1868년 3월 메이지 천황(天皇)은 구게(公家)와 다이묘(大名)를 이끌고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대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個條의 御誓文)을 발하였다. 여기에서는 회의를 열어 여론을 바 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과 언론활동을 활성화하는 것 등이 제창되었다. 이에 따라, 일 본이 서양의 문명을 받아 들여 근대적인 입헌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길이 열렸다.

같은 해 9월 원호를 메이지(明治)로 개원(改元)하고, 이후 한 명의 천황에게 하나의 원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제도를 제정하였다. 또한 에도(江戶)는 도쿄(東京)로 개칭되어 메이지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에 도쿄는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도쿄는 근대 일본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5개조의 서문(五箇條의 御誓文)>
一. 널리 회의를 시행하여 나라의 모든 중요 사항은 공론(公論)으로서 결정할 것
一. 상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히 나라의 정치를 행할 것
一. 문무백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이 없도록 할 것
一. 구래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세상의 법도를 따를 것
一.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고 황도(皇道)의 기초를 진작시킬 것

(『법률전서』에서)
-회의를 열어 모두의 의견을 널리 취합하여, 모든 정치는 여론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해야 한다.
-구게(公家)와 무가(武家)는 하나가 되어, 일반 서민이라도 그 희망을 이루게 하여 사람들 의 마음이 식상하여 불만을 갖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의 나쁜 습관은 버리고 세계에 통용되는 바른 도리에 따라야 한다.
-지식을 널리 세계에서 구하고,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의 기초를 크게 분기시켜야 한다.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 판적봉환(版籍奉還) ]
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는 어떻게 해서 성립된 것일까.
보신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해도 신정부는 번(藩)들의 연합체로서 그 기초가 불안정하였다. 신정부 내에서는 각 번의 의향을 언제나 배려할 필요가 있어, 일본국 전체의 입장에서 개혁을 행하는데 항상 곤란이 따랐다. 또한 국내가 다수의 번으로 나뉘어진 채로는 언제 어느 때 외국 세력에게 이용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국내의 통일은 급선무였다.

이에 신정부의 중심이 되어 있던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현∙나가사키현)의 네 번(藩)은 1869(메이지[明治]2)년 번주(藩主)가 자청하여 그 영토(판[版])와 인민(적[籍])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다른 번도 잇달아 이러한 움직임에 따랐다(판적봉환[版籍奉還]). 이 판적봉환에 의해 전국의 토지와 인민은 천황(오야케[公])의 것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각 번에 남겨져 있었다.

[ 폐번치현(廢藩置縣) ]
1871(메이지[明治]4)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의 신정부 지도자들은 전국의 번을 일거에 폐지하는 개혁에 관해 비밀리에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쓰마∙조슈∙도사의 각 번에서 모은 천황 직속의 약 1만의 친병(御親兵)을 배경으로, 7월에 도쿄에 체재하고 있던 전 번주들(*1)을 황거(皇居, 이전의 에도성)로 모이게 해 천황의 이름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의 포고를 알렸다.

폐번치현은 분권적인 제도인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제(*2) 하에서 지방조직인 현을 두는 것으로, 번에 남겨져 있던 군사(軍事)와 징세(徵稅)의 권한도 신정부의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으로부터 모아진 연공은 번이 아니라 신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사는 실직(失職)하였지만 무사의 녹(祿)은 그후 한동안 신정부가 대신해서 급부하였다.

신정부는 번의 반란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롭게 설치된 현은 신정부에서 파견된 현령(현지사[縣知事])이 통치하게 되어, 일본은 통일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1) 당시에는 판적봉환에 의해 지번사(知藩事)라는 직명이었다.
(*2)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다양한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정치 구조를 중앙집권제라고 한다. ⇔지방분권

[ 사민평등의 사회로 ]
한편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워 사람들을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국민으로서 통합해 나갔다. 우선 종래의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번주와 구게를 화족(華族), 무사를 사족(士族), 농민과 상인(町人)을 평민(平民)으로 하였다. 또한 평민에게도 성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직업선택, 결혼, 주거,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나아가 1871년에는 해방령(解放令)이 나와 에타(穢多, 역주: 근세·중세 천민 신분의 하나)와 히닌(非人,역주: 에도 시대의 천민 계층)으로 불리던 사람들도 평민이 되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차별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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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