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6]-4 마지막 소농사회

[16] 1950년대의 재평가  [16]-4 마지막 소농사회
이상은 주로 50년대의 도시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960년까지도 도시부의 인구비중은 전체 국민의 28%에 불과했습니다.
인구의 8할 가까운 다수가 살았던 농촌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이만갑 교수의 <1950년대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라는 논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195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이만갑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경기도 광주군과 용인군의 접경에 있는 여섯 마을의 사회, 경제, 문화 실태를 주민과의 면접 방식으로 세밀히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를 가지고 이만갑 교수는 1960년에 《한국농촌의 사회구조》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재인식》에 실린 위의 논문은 이만갑 교수의 양해를 얻어 그 책의 일부를 저와 제 제자가 논문의 형태로 압축하고 간략히 해설을 붙인 것입니다.
그 여섯 마을은 오늘날의 성남시입니다.
전국 유수의 산업도시와 아파트단지의 하나인 그곳은 50년 전 이만갑 교수의 일행이 찾았을 때만 해도 순수 농촌사회였습니다.
저는 위 논문에 해설을 붙이면서 그곳에 살았던 18세기의 사람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조금 낯설긴 하지만 여전하군”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만, 아마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50년대의 농촌사회는 근대 국민국가에 포섭되어 있긴 하나, 전통사회의 원래 모습을 꽤 많이 남기고 있었습니다.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함에 있어서 해방, 분단, 건국, 전쟁으로 급박하게 돌아간 국가 수준의 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느리게 움직이는 밑바닥의 흐름으로서 대다수 사람의 일상생활의 무대였던 농촌사회에 대한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이해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1950년대의 농촌 풍경. 장에 가는 길

1950년대의 농촌 풍경. 장에 가는 길.

농촌 주민의 사회적 인간관계를 규정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양반인가 상민인가라는 신분의식이었습니다. 마을의 상민들이 양반가의 장례에 상여를 메야 했던 것과 같은 전통사회의 신분억압과 차별은 오래전에 사라졌습니다만, 관습의 영역에서 신분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는 규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원 신분을 예민하게 의식하였습니다. 양반 출신은 상민 출신을 멸시하였으며, 두 출신이 우정으로 교류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신분의식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은 동일 신분 간의 중매를 통한 신분내혼(身分內婚)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을마다 양반과 상민 신분의 구성은 달랐습니다. 양반마을과 상민마을은 그런대로 잘 단합된 질서를 보였습니다만, 양반과 상민이 비슷한 세력으로 대립한 마을에서는 골목의 쓰레기조차 치워지지 않을 만큼 자치질서가 취약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신뢰관계는 친족이 기본이었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뢰관계로서 사회단체는 그 종류가 많지 않았고 기능도 약했습니다. 농촌사회를 통합한 가장 중요한 힘은 친족이었고 그 다음이 마을이었습니다. 그 바깥으로 나가면 면 단위의 관료기구가 있었습니다만, 일정 시대에 비해 권위나 효율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학교와 교회가 있었지만 농촌사회의 내부 질서로 정착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교사와 목사는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머물렀을 뿐입니다.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축산조합, 채소조합, 산림조합 등 여러 단체가 있었지만 농민들의 참여 의식은 약했습니다. 농촌주민들이 가장 많이 가입한 단체는 자유당이라는 지배 정당이었습니다. 면접의 대상이 된 336명 가운데 무려 66명이 자유당의 당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관료기구와 마을의 유력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된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농촌사회를 통합한 가장 규정적인 질서는 친족과 마을과 관료제였습니다. 그 외에 인간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나 단체는 희박하였습니다. 친족과 마을을 벗어나면, 심지어는 마을 내부에서조차, 사람들은 대개 고독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조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성취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돈과 명예와 재능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다 합해도 30%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교육에 따른 학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8%나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그들의 삶이 개선되었음을 인정하지만, 농촌의 가난과 관료기구의 무관심과 무능력에는 강한 불만을 드러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마을의 엘리트에게 양반인가 상민인가의 신분의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농촌사회에는 새로운 협동질서가 창출되고 있었습니다.
60~70년대의 농촌사회가 과시한 개발과 협동의 능력이 전통사회의 끝자락에 놓였던 50년대의 농촌에서 이미 뚜렷한 조짐으로 성숙되고 있었던 겁니다.

[17]-1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17] 개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17]-1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고아원 어린이들이 미국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고아원 어린이들이 미국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위한 마지막 주제로서 50년대의 경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관련해서 소개할 《재인식》의 논문은 우정은 교수의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ㅡ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입니다. 이 논문은 50년대의 경제를 재평가함에 선구를 달린 연구입니다.
50년대의 경제와 관련하여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한국 경제가 해방, 분단, 전쟁의 과정을 겪으면서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1953~1955년 1인당 실질소득은 거의 1910년대 수준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1인당 실질소득이 1940년의 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1965년이 되어서입니다. 그렇게나 비참한 상황에서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없으니까 국가 재정의 거의 7할이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채워졌습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은 대략 31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50년대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빌붙어 사는 거지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우정은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미국의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가 미국의 요구를 물리치면서 독자의 경제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이 독자의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로 옆에 일본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일본의 공산품을 수입해 쓰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한국은 농업에 비교우위가 있으니까 거기에 주력하여 농업국가로 발전하는 편이 경제도 안정시키고 경제성장도 빨라지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았습니다.
1960년에 《경제발전의 제단계ㅡ반마르크스주의사관》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로스토우(W.W.Rostow)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1961년에 한국 경제에 관해 낸 보고서는 한국경제가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고질적인 동양적 문제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정치의 분열과 부정부패는 교정될 수 없는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노선의 공업화를 추구하다니요,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약 30년 뒤 로스토우는 다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기가 틀렸음을 시인하면서 도대체 이 민족에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떠한 문명의 저력이 있었던가를 물었지요.

그건 그렇고 50년대 한국 경제를 충고하던 미국의 입장은 확실했습니다.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안정시키면서 일본과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을 축으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집불통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사서 쓰라니, 그것은 다시 일본에 종속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립경제의 건설을 위한 독자의 공업화 정책을 강행합니다. 미국이 어쩔 것이냐, 그렇다고 미국이 냉전의 전초기지인 한국을 버리기야 하겠느냐 하는 배짱에서였습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이 완고하기 짝이 없는 노인 때문에 난처한 지경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 13장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한때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을 장면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한 야당 지도자로 갈아치울 것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만,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한국의 실정에 더 좋다는 실용적인 판단으로 그만 접고 말았습니다.

[17]-2 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

[17] 개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17]-2 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
이승만 대통령이 펼친 자립경제를 위한 공업화 노선을 가리켜 흔히 수입대체공업화(輸入代替工業化) 전략이라 합니다. 외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공산품을 국내 공업을 일으켜 국산품으로 대체하자는 뜻입니다.
이 공업화 전략의 핵심적 정책 수단은 저환율 정책입니다. 예컨대 1달러에 300환이 시장에서 성립한 균형 환율임에도 1달러에 100환으로 1/3 수준으로 환율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합니까. 미국에서 1달러어치 물건을 사올 때 300환이 아니라 100환만 지불해도 되지요. 수입대체를 위한 국내 공업을 일으키려면 미국에서 기계와 부품을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용을 줄이고자 저렇게 저환율 정책을 취했던 것이죠.
이승만 정부가 저환율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 달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한국정부가 달러를 손에 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로는 한국에 주둔하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한국화폐를 대여한 다음, 그것을 달러로 상환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될 수 있는 한 많은 달러를 상환 받으려고 저환율로 한국화폐의 가치를 실세 이상으로 높여 둔 것이지요. 이를 두고 미국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부당하게 낮은 환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면서 대여금 상환 달러의 지급을 미루었습니다.


1961년 4월 준공된 충주비료공장

1961년 4월 준공된 충주비료공장.

이제 미국에서 원조가 주어지고 한국에서 집행되는 경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컨대 어느 해에 미국의 원조가 3억 달러로 책정되었다고 칩시다. 3억 달러의 돈이 오는 것이 아니라 3억 달러만큼의 미국이나 다른 나라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정부는 장부상으로 들어온 3억 달러를 민간의 수입업자에게 배당합니다. 가령 어느 업자가 100만 달러를 배당받았다 칩시다. 업자는 그에 상당하는 1억 환의 한국 화폐를 한국은행에 예치한 다음 수입허가증을 얻습니다. 그리고선 그 증서를 미국의 원조당국과 금융기관에 제출하여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오는 것입니다. 한국은행에 예치된 수입대금은 미국 정부의 감독하에 한국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지출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 했습니다.
달러를 배당받은 수입업자는 횡재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입한 물건을 그대로 국내 시장에 내다 팔면 실세 환율에 따라 몇 배나 큰 이익이 생기니까요. 그럼에도, 정부가 그런 특혜를 부여한 것은 수입업자가 외국에서 원료와 부품과 기계를 사와서 팔아먹지 않고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업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지 않아도 좋을 자립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었습니다.

[17]-3 이승만의 꿈 '자립경제'...50년대 중반 고도성장 기록

[17] 개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17]-3 이승만의 꿈 '자립경제'...50년대 중반 고도성장 기록
실제 기업가들이 정부의 기대대로 공장을 짓고 돌렸던가요. 그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로 밀가루·설탕·면방직과 같은 소비재공업의 공장이 건설되었습니다. 모두 원료가 희다고 해서 이들을 가리켜 삼백(三白)공업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유리, 제련, 시멘트 공장도 건설되었습니다. 충주에서 비료공장의 건설도 착수되었습니다만, 완공을 보는 것은 1961년의 일입니다.

이러한 공업화 정책의 결과 1954~1955년은 연간 6%, 1956년에 일시 정체한 후 1957년은 8.8%의 고도성장을 보였습니다. 1958년 이후에는 2~4%로 정체하여 조금 뒤에 쓰겠습니다만 경제 위기였습니다. 1954~1960년을 평균하면 연간 4.9%로서 당시 후진국의 평균 성장률 이상이었습니다. 산업별로는 2차산업의 성장률이 가장 높아서 연간 10% 이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2차산업의 국민경제 비중이 1954년의 13.5%에서 1960년의 19.4%로 높아졌습니다. 저는 50년대가 이 정도라도 거둔 공업화의 성과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6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공업화로 경제발전의 전략을 바꾸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식료나 의류와 같은 기초적 생필품의 수급에서 어느 정도 수출의 여력이 있었으니까 그런 식의 대전환이 가능했던 것이죠. 최소한의 비빌 언덕은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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