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3]-4 농지개혁과 이승만

[13]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13]-4 농지개혁과 이승만
《재인식》에 실린 논문 가운데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 모습을 잘 드러낸 노문의 하나로서 김일영교수의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를 들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송건호의 비난 가운데 이승만이 지주세력을 옹호하여 농지개혁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김 교수의 이 논문을 읽으면 이런 비난이 사료라곤 한 조각도 읽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유언비어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오히려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초 1949년 3월 국회에 상정된 개혁법에서는 농민이 부담할 지가의 상환액이 평년 수확가의 300%로 정해져 있었습니다만, 이승만의 압력으로 1950년 3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서는 150%로 낮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이승만은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농지분배에 박차를 가하여 법안이 통과될 당시에는 이미 대상 농지의 7~8할이 분배된 상태였습니다.

이승만이 무엇 때문에 농지개혁에 그렇게 열심이었을까요. 가난한 소작농민을 위해서라고요. 너무 천진한 생각입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끌어 모으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그랬을 뿐입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이미 국부(國父)였습니다. 마치 프랑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한줌의 무리도 안 되는 지주세력을 위한 계급정치를 펼쳤다면 그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때 지주세력의 정당인 한민당과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만, 집권 후 자신의 대중정치를 위해 그들을 버렸습니다. 이승만은 그렇게 철저히 현실주의적 정치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대한민국이 살아났던 것이죠.

전장에서 설명한대로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의는 ‘국민만들기’의 첫걸음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침공해 왔을 때 이미 자기 소유의 토지를 확보한 농민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사흘간 군사적 행동을 중지한 것은 남한 농민들의 봉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그런 일은 조짐조차 없었습니다.

[13]-5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재해석

[13]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13]-5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재해석
《재인식》에 실린 김일영 교수의 또 하나의 논문, <전시 정치의 재조명ㅡ부산 정치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ㅡ>를 읽고 난 저의 소감은 씨름판에서 뒤집기 기술을 봤을 때처럼 통쾌한 것이었습니다. 이 논문이 다룬 사건은 1952년 6월 임시수도 부산에 서 있었던 이른바 발췌개헌을 둘러싼 정치파동입니다.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선거는 종전의 국회 간선에서 국민 직선의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일반적으로 이를 계기로 국회의 견제를 벗어난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점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만, 김 교수는 사건의 뒷면에 숨겨져 온 의미를 들추어냄으로써 이 정치파동이 이승만이 강인하게 추구해 온 ‘나라세우기’ 정치의 일환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이승만 정부는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 당하는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국회의 반이승만 세력은 이 참에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여 이승만을 밀어내고 장면을 수상으로 앉힐 책략을 꾸미면서 미국과 군부의 양해까지 얻어냅니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휴전협상에 비협조적인 이승만의 제거에 관심을 갖지요. 그렇지만 이승만이 보기에 그의 반대자들은 미국의 정책에 너무나 양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집권할 경우 휴전에 따른 영구분단은 피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그는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사실상 친위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일부 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같은 이승만의 강인한 공세에 밀려 미국도 결국 양보합니다. 이승만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결국 미국의 주선으로 이승만과 반대파가 타협하여 대통령의 국민직선제와 정부형태의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은 겉보기에는 이승만과 국회의 반대파 간에 집권을 둘러싼 거친 충돌이었지만, 그것을 넘어 전쟁정책과 통일정책 나아가 동아시아정책 전반을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한판 승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13]-6 칼을 물고 뜀을 뛰다

[13]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13]-6 칼을 물고 뜀을 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을 기다리는 반공포로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을 기다리는 반공포로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이념과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기술이 그의 재임기간에 남긴 최대의 업적은 1954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한국과 같이 약소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함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미국을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승만은 동서냉전의 전초기지로서 한반도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외교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는 휴전을 반대했으며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부르짖음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 수만 명을 기습적으로 석방했기 때문이지요.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세게 비튼 셈입니다. 그런 식의 무모한 외교를 당시 미국사람들은 “칼을 입에 물고 뜀을 뛰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드디어 미국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서울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둘 실용적인 계산에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대륙의 공산주의 국제세력으로부터, 또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를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할 가장 확실한 군사적 방호막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미동맹을 체결하기까지 이승만이 펼친 능수능란한 외교에 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차상철 교수의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 동맹>이라는 논문이 좋은 참고가 됩니다. 저도 이 논문을 통해 위와 같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13]-7 문명개화파의 적자(嫡子)

[13]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13]-7 문명개화파의 적자(嫡子)
물론 이승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도덕적 비판에는 동의할 만한 점도 있습니다. 그가 재임 마지막 3~4년간데 범한 정치적 실수는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에다 소득 40~60달러의 가난한 소농이고, 사회는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체제를 나라의 기초 이념으로 확고히 하고, 농지개혁을 통해 통합적인 국민을 창출하고, 사회주의 국제세력의 공세인 한국전쟁을 성공적으로 방위하고, 나아가 자유진영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군사동맹을 이끌어 내는 등, ‘나라세우기’의 정치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 196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의 번영은 이승만이 강인하게 추구했던 ‘나라세우기’ 정치의 성과를 전제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승만은 그를 배제하고서는 대한민국의 출발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나라세우기’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를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정중하게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까지 그 얼굴이 사진으로 전해지는 역사교과서에 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은 없습니까. 워낙 근거 없는 중상모략의 비난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횡행하고 있어 그 점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군요.

마지막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긴 안목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을 어떻게 재평가해야 좋을까라는 전장의 말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1876년 개항 이후 서유럽과 일본을 통해 전래된 근대 사상과 문물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해 온 문명개화파였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을 통해 갑신정변, 갑오경장, 독립협회로 이어진 제1세대의 개화파를 계승한 사람이지요. 뒤이은 식민지기를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선에 참여했습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국내에서 일제의 차별과 억압을 받으면서 근대를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 온 수많은 사람들이 문명개화파의 계승자였습니다. 그들이 일제의 패망과 미국체제의 성립이라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체제의 일대 전환을 맞아 한반도 남부에 세운 근대국가가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요컨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을 주요 대리인으로 한 개화기 이래의 문명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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