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Category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제3부 나라세우기
Tag :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4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이상과 같이 분단을 초래한 일차적인 조건은 사회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야기를 끝내서는 곤란합니다. 해방정국을 규정한 외적인 국제조건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의지 밖이었기 때문에 보다 결정적인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할 여지는 처음부터 적었습니다. 처음 1년간은 그런대로 두 강대국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만, 동서냉전이 서서히 달구어지면서 협력의 가능성은 점차 봉쇄되어 갔습니다. 그 두 강대국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는 정치세력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일제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한 하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형 지식인, 중소 상공업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이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어쨌든 지배적 정치세력이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었다는 점에서 남한과 북한 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비밀이 해제된 모스크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벌써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도록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동 문서는 일본의 마이니찌[每日]신문의 기자가 발견하여 1993년 3월 26일자로 공개하였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7개 항인데, 제2항이 해당 부분입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 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단번에 실행하기는 힘드니까 공산당의 주도로 제1단계의 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입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제1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니 참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탈린의 북한정책은 처음부터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황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으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운명은 1945년 9월 그때부터 이미 결판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스크바 문서를 토대로 한반도의 분단과정을 세밀히 고찰한 논문이 《재인식》에 실린 이정식 교수의 <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입니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1945년 9월 초까지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유동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서로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둘째, 타협의 가능성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사이 런던에서 열렸던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의 전승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영국과 소련이 노골적으로 충돌하면서 소멸하고 말았다. 셋째, 연후에 스탈린은 위와 같은 비밀지령을 북한의 소련 군정에 내려 북한에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넷째,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가 한국전쟁을 도발하게 된 데는 중국의 공산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한 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의 미군정은 그의 협력자를 선택하는 데 무척이나 주저하였습니다. 미군정에 참여한 국무성의 진보주의자들은 낭만적이게도 좌파와의 협력 가능성에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박지향 교수의 논문,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이 그에 관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은 중도 좌파는 물론,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는 한 공산당 계열의 전평[全評, 전국노동자평의회]조차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미군정이 노동운동을 무조건 탄압하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동운동으로부터 정치세력을 분리하여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는 전평이 극좌노선의 불법적인 투쟁을 감행함에 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1947년 3월 미국에서 동서냉전의 개시를 공식화한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됩니다. 공산세력의 위협에 처해 있는 터키와 그리스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선언한 것이지요. 이를 계기로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한 모든 낭만적인 시도는 중단됩니다. 미국은 좌우합작을 처음부터 비판해 온 미운 오리와 같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이리 저리 모색하면서 끝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합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상 그 점은 당연하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김일성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였던 소련의 스탈린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분단의 국제정치적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이 분단을 초래한 일차적인 조건은 사회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야기를 끝내서는 곤란합니다. 해방정국을 규정한 외적인 국제조건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의지 밖이었기 때문에 보다 결정적인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할 여지는 처음부터 적었습니다. 처음 1년간은 그런대로 두 강대국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만, 동서냉전이 서서히 달구어지면서 협력의 가능성은 점차 봉쇄되어 갔습니다. 그 두 강대국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는 정치세력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일제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한 하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형 지식인, 중소 상공업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이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어쨌든 지배적 정치세력이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었다는 점에서 남한과 북한 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비밀이 해제된 모스크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벌써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도록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동 문서는 일본의 마이니찌[每日]신문의 기자가 발견하여 1993년 3월 26일자로 공개하였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7개 항인데, 제2항이 해당 부분입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 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단번에 실행하기는 힘드니까 공산당의 주도로 제1단계의 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입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제1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니 참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탈린의 북한정책은 처음부터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황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으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운명은 1945년 9월 그때부터 이미 결판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운 채 행진하고 있다.
첫째, 1945년 9월 초까지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유동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서로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둘째, 타협의 가능성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사이 런던에서 열렸던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의 전승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영국과 소련이 노골적으로 충돌하면서 소멸하고 말았다. 셋째, 연후에 스탈린은 위와 같은 비밀지령을 북한의 소련 군정에 내려 북한에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넷째,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가 한국전쟁을 도발하게 된 데는 중국의 공산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한 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의 미군정은 그의 협력자를 선택하는 데 무척이나 주저하였습니다. 미군정에 참여한 국무성의 진보주의자들은 낭만적이게도 좌파와의 협력 가능성에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박지향 교수의 논문,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이 그에 관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은 중도 좌파는 물론,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는 한 공산당 계열의 전평[全評, 전국노동자평의회]조차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미군정이 노동운동을 무조건 탄압하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동운동으로부터 정치세력을 분리하여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는 전평이 극좌노선의 불법적인 투쟁을 감행함에 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1947년 3월 미국에서 동서냉전의 개시를 공식화한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됩니다. 공산세력의 위협에 처해 있는 터키와 그리스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선언한 것이지요. 이를 계기로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한 모든 낭만적인 시도는 중단됩니다. 미국은 좌우합작을 처음부터 비판해 온 미운 오리와 같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이리 저리 모색하면서 끝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합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상 그 점은 당연하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김일성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였던 소련의 스탈린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분단의 국제정치적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1]-5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Category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제3부 나라세우기
Tag :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5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분단 과정의 북한 사정에 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인식》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ㅡ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 교수의 <신인간ㅡ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 정말 좋은 논문들입니다. 키무라 교수의 논문은 북한의 경제체제가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시장경제를 정지시키고 공출과 배급으로 상징되는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통제경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곧바로 폐지되어 시장경제가 부활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만 바꾼채 더 강화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공출(供出)이라는 강제수매제는 성출(誠出)로 이름이 바뀝니다만, 내용을 보면 값도 치르지 않고 거두어 가는 경우가 많고 쌀 이외의 다른 작물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시행한 마을단위의 생산책 임제는 증산돌격대로 이름이 바뀌지요. 공업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이 같은 실상을 명확히 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과연 북한 민중에게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무 당돌한 질문이라 처음에는 좀 어리벙벙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입니다. 그렇지요. 민중의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놓고 물어봅시다. 공출이나 성출이나 그게 그것이지요.
다음은 신형기 교수의 논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에게 ‘신인간’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신인간’의 상징은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하니 1946년 7월이군요. 대략 그 즈음부터 대량의 ‘구인간’들이 남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전에 이미 100만의 행렬이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1/10이나 되는 큰 인구였습니다. 그보다 더 분단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분단 과정의 북한 사정에 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인식》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ㅡ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 교수의 <신인간ㅡ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 정말 좋은 논문들입니다. 키무라 교수의 논문은 북한의 경제체제가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시장경제를 정지시키고 공출과 배급으로 상징되는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통제경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곧바로 폐지되어 시장경제가 부활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만 바꾼채 더 강화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공출(供出)이라는 강제수매제는 성출(誠出)로 이름이 바뀝니다만, 내용을 보면 값도 치르지 않고 거두어 가는 경우가 많고 쌀 이외의 다른 작물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시행한 마을단위의 생산책 임제는 증산돌격대로 이름이 바뀌지요. 공업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이 같은 실상을 명확히 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과연 북한 민중에게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무 당돌한 질문이라 처음에는 좀 어리벙벙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입니다. 그렇지요. 민중의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놓고 물어봅시다. 공출이나 성출이나 그게 그것이지요.
다음은 신형기 교수의 논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에게 ‘신인간’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신인간’의 상징은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하니 1946년 7월이군요. 대략 그 즈음부터 대량의 ‘구인간’들이 남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전에 이미 100만의 행렬이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1/10이나 되는 큰 인구였습니다. 그보다 더 분단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12]-1 헌법을 읽자
Category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제3부 나라세우기
Tag :
[12] 건국의 문명사적 의의 [12]-1 헌법을 읽자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성립하였습니다. 그날에 세계만방을 향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제(國制)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공화국입니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9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 한다”고 하였으면, 헌법 제13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불편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우리 주변에는 헌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한 번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그러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간의 세월에 헌법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읽어 보라고 권유한 선생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헌법을 읽어 본 것은 나이 50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성슌관대학교에서 재직할 때인데요, 법과대학의 어느 교수님이 《한국헌법사》(학문사, 2000)라는 책을 저술한 다음 저에게 한 권 주셨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차분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장도 좋지만 그 뜻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 이런 헌법을 이제야 읽다니.” 그런 반성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오늘이라도 서점에 들러 헌법사 책을 사서 제헌헌법 이래의 역대 헌법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1948년 8월15일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식.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불편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우리 주변에는 헌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한 번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그러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간의 세월에 헌법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읽어 보라고 권유한 선생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헌법을 읽어 본 것은 나이 50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성슌관대학교에서 재직할 때인데요, 법과대학의 어느 교수님이 《한국헌법사》(학문사, 2000)라는 책을 저술한 다음 저에게 한 권 주셨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차분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장도 좋지만 그 뜻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 이런 헌법을 이제야 읽다니.” 그런 반성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오늘이라도 서점에 들러 헌법사 책을 사서 제헌헌법 이래의 역대 헌법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12]-2 자유민주주의 국가
Category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제3부 나라세우기
Tag :
[12] 건국의 문명사적 의의 [12]-2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에 담긴 커다란 역사적 의의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왕조 시대에는 일반 백성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만한 것으로 15세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이란 법전이 있는 줄 잘 아실 겁니다. 거기에 보면 일반 백성의 법적 지위는 ‘전부’(佃夫)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금 생소한 말이겠습니다만, ‘전부’의 전(佃)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부’는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농부라는 뜻이 되지요. 요사이 말로 하면 소작농이 됩니다. 백성이 왜 소작농입니까. 다름 아니라 나라의 모든 땅이 임금님의 소유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왕조의 백성은 임금님의 은덕으로 임금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무슨 정치적 권리가 인정됐겠습니까.
1899년 고종황제가 반포한 대한제국의 국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조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다”고 선포한 다음, 제3조에서 “대황제께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절대적 권리 앞에서 일반 백성의 권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 고종황제는 “민(民)은 피치자로서 정치·결사는 물론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고 명확히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토지대장에서 일반 소유자를 가리켜 ‘시주’(時主)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그 뜻을 증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임시적인 주인이란 뜻입니다. ‘시주’의 반대말은 ‘본주’(本主)인데요, 전국 토지의 ‘본주’는 황제 자신이라는 뜻이 그 ‘시주’ 규정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무한 군권을 선포하면서 토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이 같이 백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시주’라는 규정을 만들어 냈지요.
뒤이은 일제하의 식민지기는 어떠했습니까. 앞서 제5장에서 이 시기에 근대적인 법과 제도가 이식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정치의 영역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파견한 총독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삼권을 통합한 전제군주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요. 조선인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가족주의 원리의 천황제 국가인 일본 자체가 아직 자유민주주의를 잘 몰랐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하였을 때, 그것은 한국의 역사만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원리는 1876년 개항과 더불어 바깥 세계에서 슬슬 들어온 것입니다.
국민주권의 정치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한 나라는 어딥니까. 다 잘 알다시피 1776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지요.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여러 나라로 건너가 점차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한 것은 그렇게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문명의 파도가 이윽고 극동의 한반도에까지 상륙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구체적인 국제정치적 역학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입니다.
1954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미국도 원래 식민지 탄압에 신음했다. 미국의 독립은 타국의 영토와 민족을 지배하던 낡은 제국주의를 근멸시키고 수만 리 밖의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모든 국가와 국민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국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그간 미국의 도움에 감사함과 아울러 우리도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앙양(昻揚)해 갈 것을 확언 하는 바이다.
저는 이 메시지에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를 더없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초대 대통령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이를 두고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외교적인 비사(卑辭)라 치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신종선서(信從宣誓)와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에 담긴 커다란 역사적 의의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왕조 시대에는 일반 백성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만한 것으로 15세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이란 법전이 있는 줄 잘 아실 겁니다. 거기에 보면 일반 백성의 법적 지위는 ‘전부’(佃夫)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금 생소한 말이겠습니다만, ‘전부’의 전(佃)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부’는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농부라는 뜻이 되지요. 요사이 말로 하면 소작농이 됩니다. 백성이 왜 소작농입니까. 다름 아니라 나라의 모든 땅이 임금님의 소유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왕조의 백성은 임금님의 은덕으로 임금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무슨 정치적 권리가 인정됐겠습니까.
1899년 고종황제가 반포한 대한제국의 국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조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다”고 선포한 다음, 제3조에서 “대황제께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절대적 권리 앞에서 일반 백성의 권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 고종황제는 “민(民)은 피치자로서 정치·결사는 물론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고 명확히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토지대장에서 일반 소유자를 가리켜 ‘시주’(時主)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그 뜻을 증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임시적인 주인이란 뜻입니다. ‘시주’의 반대말은 ‘본주’(本主)인데요, 전국 토지의 ‘본주’는 황제 자신이라는 뜻이 그 ‘시주’ 규정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무한 군권을 선포하면서 토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이 같이 백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시주’라는 규정을 만들어 냈지요.
뒤이은 일제하의 식민지기는 어떠했습니까. 앞서 제5장에서 이 시기에 근대적인 법과 제도가 이식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정치의 영역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파견한 총독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삼권을 통합한 전제군주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요. 조선인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가족주의 원리의 천황제 국가인 일본 자체가 아직 자유민주주의를 잘 몰랐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하였을 때, 그것은 한국의 역사만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원리는 1876년 개항과 더불어 바깥 세계에서 슬슬 들어온 것입니다.
국민주권의 정치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한 나라는 어딥니까. 다 잘 알다시피 1776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지요.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여러 나라로 건너가 점차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한 것은 그렇게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문명의 파도가 이윽고 극동의 한반도에까지 상륙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구체적인 국제정치적 역학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입니다.
1954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미국도 원래 식민지 탄압에 신음했다. 미국의 독립은 타국의 영토와 민족을 지배하던 낡은 제국주의를 근멸시키고 수만 리 밖의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모든 국가와 국민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국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그간 미국의 도움에 감사함과 아울러 우리도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앙양(昻揚)해 갈 것을 확언 하는 바이다.
저는 이 메시지에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를 더없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초대 대통령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이를 두고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외교적인 비사(卑辭)라 치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신종선서(信從宣誓)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