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5 식민지 지배라는 수준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5 식민지 지배라는 수준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또는 차별이라는 시각입니다. 주로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런 시각에서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 왔습니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의 거의 대부분이, 예컨대 8~9할이 조선여자였다는 겁니다. 또는 총독부가 행정계통을 이용하여 마을 단위로 여자들을 할당하여 징발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국의 연구자들은 일제가 일본여자들은 놔두고 주로 조선여자를 강제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까지 가세하여 어느덧 일제가 반도의 순결한 처녀의 성을 거칠게 유린했다는 식의 이해가 대중화되고 말았습니다.

위안부의 총수가 얼마인지는 2만에서 20만까지 연구자마다 설이 구구합니다. 그 가운데 조선여자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도 구구한 설이 있습니다. 저는 조선여자로서 위안부의 수가 얼마였는지는 갖가지 증언이나 자료를 총괄하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다음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위안부는 1,400명 정도였습니다. 화중(華中) 지역이 대개 그 정도였으므로 그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의 수를 알면 전 중국에 분포한 조선 위안부의 수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방식으로 동남아나 남태평양에 분포한 위안부의 수도 추정이 가능하겠습니다. 어쨌든 일본군 위안부의 8~9할이 조선여자였다는 주장에는 찬성하기 힘들군요. 처음부터 무슨 근거가 제시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되었던 것인데요, 어느덧 통설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조선여자만 색시장사에 걸려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색시장사로 끌려간 일본여자에 관한 증언도 많이 있습니다. 실은 그녀들부터 먼저 끌려갔던 것이죠. 일본에서는 그에 따라 사회적 물의가 일었습니다. 그러자 기왕에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자로서 본인의 동의가 명확한 경우 이외에는 경찰이 강하게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속아서 끌려가는 여자들이 있었지요. 그에 비하자면 조선 총독부의 색시장사 단속에는 훨씬 성의가 부족하였습니다. 아주 심하게 150여 명의 여자를 팔아넘긴 악독 사범이 체포된 기록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에 비해 단속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며, 아예 없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식민지 지배의 차별성을 지적하는 것은 옳습니다만, 그렇다고 일본여자는 놔두고 조선여자만 끌고 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저 멀리 동남아와 남태평양으로 간 일본여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장의 범위가 가장 넓었던 중국에서는 중국여자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중국의 연구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다수의 조선인 병사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데요, 자세한 소개는 뒷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총독부가 행정력을 이용하여 마을 단위로 여자들을 할당하고 징발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끼 교수도 “말단에서 관헌의 직접적인 관여를 나타내는 자료는 현재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앞으로 언젠가 그런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별 근거도 없이 관헌들이 여자들을 징발하거나 납치했다는 식으로 무성하게 이야기되어 온 것에 대한 비판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83년에 낸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에서 1943년 5월 부하 9명과 함께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출발하여 제주도로 건너와 성산포와 법환리 등에서 200여 명의 여자를 위안부로 납치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책은 1989년 국내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쟁범죄 고백은 일제가 관헌을 동원하여 여자들을 징발하였다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가 세밀히 조사한 결과 요시다의 고백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1989년 8월 14일 제주신문은 성산포 등 여인들이 끌려갔다고 하는 마을을 취재한 결과 그러한 일은 없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성산포 주민으로서 당시 85세의 정옥단은 “그런 일은 없다. 250여 가호밖에 안 된 마을에서 15명이나 징용해 갔다면 얼마나 큰 사건인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제주도 향토사가인 김봉옥 씨는 “요시다의1983년 일본어판이 나오고 나서 몇 년간이나 추적 조사한 결과, 사실이 아님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일본인의 악덕풍을 나타내는 경박한 상혼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책을 써서 이름을 내고 돈을 벌고 싶은 악덕 상혼의 소치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요시다라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세밀히 분석하면 식민지의 여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고약한 리비도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당시 총독부의 전시통제정책의 실상을 소상하게 증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요. 1939년부터 충남 논산군에서 공직생활을 출발한 어느 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41년부터 노무자의 모집, 징병제의 실행, 각종 물자의 징발과 배급에 깊이 관여한 당시의 살아 있는 증인이지요. 그분께 몇 차례 물었습니다만, 자기가 종사한 일반 행정계통을 통해 여자들이 모집되거나 동원되는 일을 없었다고 하는군요. 다만 교육계통을 통해 정신대를 모집하는 일은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여자들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에 동원한 별도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론 농촌의 가난이 너무 심하여 여자들을 밀어내는 힘도 강력했고, 밖에서 모집책의 끌어당기는 힘도 강력하여 관에서는 굳이 강제력을 발동하지 않아도 좋을 상황이었습니다. 방관만 해도 저절로 돌아갈 정도로 활발히 작동하는 인신매매시장이 성립해 있었던 것이죠. 그 점에서 1944년 8월 일본으로 남성 노동력을 송출하기 위해 발동된 국민징용령의 경우와는 사정이 판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국제적 노동이동과 관련하여 인력을 수집하고 송출하고 분배하는 민간 시장기구가 성립해 있습니다만, 당시의 노동시장 여건은 그런 수준이 못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관을 대신할 대리인이 없었던 것이죠. 그럴 경우에 관의 행정력이 직접 발동되는 법이지요. 그 점은 경제학의 상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점은 총독부의 관헌이 직접 더러운 손을 대지 않았다 해서 일본군이나 총독부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면책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로로 끌려왔던 간에 여인들을 군 시설의 일부인 위안소에 수용하여 성적 위안을 강요한 것 자체가 정장에서 기술한 대로 매춘업을 위한 여인의 국제 매매와 미성년의 매춘과 노예제를 금지한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로서 반인륜 전쟁범죄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어떻게 끌려왔는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혹 그 점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이상과 같은 저의 진의를 좀 더 명확히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8]-6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라는 수준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6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라는 수준


조선시대의 기생들. 기생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조선시대의 기생들. 기생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위안부 사건의 저변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패망 이전의 천황제 일본은 여성을 민법이 규정하는 인격권이나 재산권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가부장제 문화였지요. 그 민법이 조선으로 건너온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조선 나름의 유사한 전통도 있고 해서 식민지기 여성의 사회적 처지는 실로 비참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어린 딸을 늙은 부호의 첩으로 들이거나, 부호가 죽고 나서는 색주가로 팔려 나가는 여인의 기구한 인생살이에 관해서는 19세기의 구소설에서부터 20세기의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실로 허다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문화로 인해 이미 전통사회에서 상당한 정도로 매춘업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혹자는 일제가 공창제를 조선에 도입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전통을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곤란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공식 운영한 기생이란 성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는 지방에서 단신으로 올라 온 관료들을 위한 첩 시장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첩의 월급은 시세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본처럼 영업허가를 받은 공창은 없었습니다만, 그 대신 어느 여자가 양(良)이고 어느 여자가 창(娼)인지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민간에 매춘업이 혼재했음이 전통 조선사회였지요. 그래서 18세기의 어느 선비는 당시의 문란한 성도덕을 두고 “음풍(淫風)이 크게 떨쳐 집마다 마을마다 음부(淫婦)가 아닌 여자가 드물다”고 할 지경이었습니다(한국고문서학회,《조선시대생활사》2, 역사비평사, 113쪽).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의해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 공포됩니다. 전문 10조의 아주 단출한 헌법입니다. 제9조를 보면 “생명형 신체형 급(及) 공창제를 폐지함”으로 되어있습니다. 헌법에다 공창제의 폐지를 언급함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개화기에 나온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나라가 망하게 된 한편의 원인으로 문란한 성도덕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 꽤나 많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은 그에 대한 민족적 반성을 담았던 것이죠.

여자들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내몬 데는 이 같은 전통적 성도덕이나 가부장제 문화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소정희 교수의 논문,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실현을 열망했건만>이 바로 그러한 여성사적 시각에서 쓰인 것입니다. 그 제목에다 소 교수는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이라고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에 국가도 민족도 아닌 개별 인간을 놓아야 한다는 저의 주장과 통하는 시각이군요. 소 교수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사료로 하여 그녀들을 위안부로 내몬 것이 가부장의 폭력이었음을 폭로합니다. 문필기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훌륭한 신여성으로서 살기를 꿈꾸었던 소녀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가시나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학교에 보내주질 않았습니다. 너무나 학교에 가고 싶었던 문필기는 아버지 몰래 학교에 갑니다. 그것을 안 아버지가 문필기를 교실에서 끌어내 죽어라고 두들겨 팼지요. 가슴에 멍이 든 문필기는 몇 년 뒤에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준다”는 어느 ‘일본인 앞잡이’의 말을 듣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소였습니다. 요컨대 무지막지한 가부장의 폭력이 “교육받은 근대적 자아의 실현”을 꿈꾼 한 소녀를 위안부로 내몬 궁극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저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시각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요인은 상호 인과적이지요. 일본군과 총독부의 책임이 엄중합니다만, 업자와 모집책, 그리고 자식을 내몬 부모들의 책임도 큽니다. 조선 내에도 일본군의 위안부가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한국군의 위안부가 있었으며, 훨씬 문명화된 형태입니다만 최근까지도 미국군의 위안부가 대량으로 있었지요. 이 모두는 역사적으로 한 계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건을 과거사로만 보지 않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현실로 감각합니다. 역사가는 그러한 역사의 복합성과 동시대성을 관찰합니다.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관찰을 통해 역사를 성찰합니다. 그것이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청산의 방식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찰의 역사학은 어느 한 사람이나 집단에 역사의 책임을 미루거나 추궁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미궁이지요. 그런 인간 지성의 한계에 대한 자성이야말로 근대 역사학의 출발입니다.

[8]-7 그날의 토론회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7 그날의 토론회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그해 3월 2월에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파를 조사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을 단죄한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취지의 법률이지요. 그 법이 국회를 통과한 날부터 저는 죽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집안에 이름 있는 친일파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시골 출신으로 원래 그럴 정도의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 법이 많은 점에서 잘못된 사실 인식에 기초해 있을 뿐 아니라 역사학이 추구할 올바른 방식의 과거사청산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사실 인식을 법으로 공식화한다는 점에서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반헌법적 요소까지 안고 있는 악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해 봄부터 저는 무언가 사회를 향해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한두 차례 TV토론회의 초청이 있었습니다만, 연구실에만 있던 사람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어서 사양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날의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60년도 더 된 심지어 100년도 더 된 과거사를 법률로 정치적으로 청산한다는 것의 부당함을 계속 주장하였지요. 과거에 벌어진 어떤 범죄적 사건과 관련하여 겉으로 드러난 소수의 몇 사람을, 이미 죽어서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는 그들을, 그 사건과 관련된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일종의 편 가르기 방식으로,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정당한 방식의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는 것이 제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위 법률이 친일행위로 나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인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제공한 행위”(제2조 12항)을 예로 들었습니다. 부녀자, 곧 배우자가 있는 여자가 위안부로 끌려간 적이 있나요. 법을 만든 사람들의 식견이 대단하군요. 그 점은 접어두더라도 이 법에 걸려 이름이 공포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문맥상 일본군은 아니지요. 또한 일본군으로 나가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는 수만 명의 조선인 병사도 아니지요. 이 법에 걸릴 사람들은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에 이름이 소개된 위안소 업주 정도이지요. 모집책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지요. 어린 딸을 죽도록 두들겨 팬 아버지도 포함되어야 하지요. 일본군과 협의하여 여행증명서의 발급을 지시한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도 찾아내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모두를 어떻게 찾아내고 또 찾아낸들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인합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보나마나 위안소 업주 몇 사람의 이름만 친일파 명단에 포함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업주라고 모두 친일파였을까요.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을 보면 그들은 나쁜 짓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자 1,400여 명의 위안부를 상하이와 한커우에서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 인간적인 업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청산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관련 당사자들의 진솔한 고백을 토대로 하여, 또한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과 미국군의 위안부 문제까지도 시야에 넣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여성 문제와 성도덕을 고양시키는 방향의 국민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라는 단체는 저의 발언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 했다고 규탄한 다음, 제가 국립대학 교수직에서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뒤이어 여성 국회의원 다섯 사람도 경박하게 같은 성명을 내었지요.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욕설을 담은 이메일이 수도 없이 밀어닥쳤습니다. 저 멀리 미국 볼티모어의 어느 사람까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 연구실 문에다 계란을 던지고 후다닥 도망친 학생도 있었지요.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를 매도한 수많은 분들에게《재인식》에 실린 위안부 관련의 두 논문과 지금의 저의 글을 저의 답변으로 드립니다. 《재인식》을 편집할 때의 일입니다. 위안부에 관해 좋은 논문이 한두 편 더 있어 초청하였더니 사양하더군요. 제가 보기에 한국에서 위안부 연구와 시민활동은 조선의 순결한 처녀의 성을 일제가 마음껏 유린했다는 식의 대중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이미 한 개인으로서는 거스를 용기를 내기 힘든 권위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거절을 당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으로 짐작되는데, 그건 확실히 또 하나의 슬픈 현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9]-1 개발(development)의 뜻

[9]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9]-1 개발(development)의 뜻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하였습니다. 영구병합과 동화정책의 구호가 그토록 요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황급하게 고향으로 철수했습니다. 아무도 남아 달라고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허망했던 것이 일제의 동화정책이었습니다. 역시 처음부터 되지도 않을 무리한 프로젝트였지요. 그런데 일제가 철수한 뒤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그 당시로 복귀한 것일까요. 식민지수탈론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마치 난폭한 구둣발에 짓밟혀 있던 풀이 구둣발이 치워지자 다시 허리를 펴는 식의 그러한 원상회복을 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았다고도 하지요. 공식적으론 ‘광복’이라 합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의 가장 큰 국경일은 ‘광복절’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식의 원상회복론에 찬성하기 힘들군요. 식민지 지배는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화학적인 작용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5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소개하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식민지기에 식민지적 형태의 근대화라는 변화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학설이지요. 그에 따라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들이 옛날의 그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경제학에서는 발전 또는 개발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development라고 하지요. 이는 성장, 영어로 말해 growth와는 상이한 개념입니다. 성장은 사람의 키가 크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국민 소득이 1,000달러에서 2,000달러로 되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러나 개발, development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영어 단어의 기원은 생물학에서 나왔습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과정, 바로 그것이 개발입니다. 모양과 기관이 바뀌고 복잡화하는 것이지요.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개발되었다거나 발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회의 운동 원리와 그 사회의 부속 기관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어 마치 성충이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듯이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에 허수열 교수가《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 2005)이란 책을 내어 우리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식민지수탈론 측에서는 기다리던 용사가 나타났던 식으로 반겼던 것으로 압니다. 이 책의 요지는 식민지기에 총소득이 증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두 일본인 차지가 되고 조선인의 소득 수준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겁니다. 허 교수는 이를 통계로 입증한다고 애를 썼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일종의 편집증에 가까운 추론에 불과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재인식》에 실린 주익종 박사의 논문이 잘 꼬집고 있고, 또 김낙년 교수도 별도의 서평을 통해 그 논리적 모순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에(《경제사학》38, 2005) 여기서는 그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개발’이란 말이 아주 잘못 쓰이고 있음에 대해선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허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성장 없는 성장’이라 해야 옳지요. 그는 개발이 원래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가 진정 ‘개발 없는 개발’을 입증하고 싶었다면 일제가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하여 근대적 경제환경을 조성하여도 조선 사람들은 그에 도무지 적응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미개하였음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일제가 조선 사람들의 근대적인 경제활동을 철저하게 봉쇄하여 영구병합의 동화정책을 처음부터 포기하였음을 주장하든가 해야지요. 저는 ‘개발 없는 개발’을 한갓 희언(戱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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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