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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4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4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


상하이 위안소의 현판

상하이 위안소의 현판. 오른 쪽에는
'성전에서 승리한 용사 대환영'이라는 현판과 왼쪽에는
'신심을 바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 적힌 현판이 보인다.

실제로 위안부의 역사는 정신대보다 훨씬 깁니다. 알려진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上海]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재인식》에 실린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 교수의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이란 논문이 바로 그 상하이 위안소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개설한 목적은 병사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여 민간 여자를 강간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인에 대한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에[江戶]시대부터 사기세끼[貸席]라 하여 행정당국의 허가를 받아 창녀들에게 매춘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요리도 팔고 하는 공창이 발달했습니다. 그 가시세끼가 벌써 1907년부터 상하이에 진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따라간 매춘녀를 가리켜 일본사람들은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지나가의 논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상하이만도 아닙니다. 1907년이면 서울에도 일본의 가시세끼와 가라유키상이 진출했다고 보입니다. 서울 용산의 일본군 주둔지 부근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유곽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때 주변의 공동묘지를 함부로 허물어 분쟁이 생겼는데요,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묘지 주인들의 요구에 일본인 업주는 “해당 유곽지가 경성(京城)에 주둔한 일본 군졸의 위생에 필요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漢城府來去文》(하), 서울시사편찬위, 297쪽). ‘위생’이란 말에서 저는 당시 일본군 주변에 세워진 유곽을 사실상 위안소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출발은 상당히 이른 시기로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후지나가의 논문입니다. 어쨌든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에 위안소를 세운 것은 맨땅에다 건물을 짓고 여자들을 모으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같이 일찍부터 진출해 온 일본인의 매춘업을 군전용으로 지정하고 감독하는 체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매춘을 목적으로 상하이로 진출한 가라유키상은 일본여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음에 후지나가 논문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여자들도 1931년 이후 활발히 상하이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1931년 상하이의 조선인은 남자가 717명, 여자가 139명이었습니다. 1936년이 되면 남자는 884명으로 별로 늘지 않았는데, 여자가 913명으로 남자보다 많게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조선에서 건너간 매춘에 종사한 여자들이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가 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도 생기고 거기에 수용된 위안부 수도 증가해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1937년 자본금 2천 원으로 시작한 위안소가 1940년 자본금 6만 원으로 번창한 업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박일석이란 사람이 경영한 ‘카페 아세아’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조선인 업주를 논문에서 세어 보니 모두 29명이나 되는군요.

위안소는 대략 세 가지 형태였습니다. 하나는 군이 직접 경영한 것인데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민간업소를 군전용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업자는 군속의 신분이 되어 군의 세밀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은 군이 지정하지만 민간인도 이용하는 매춘숙입니다. 후지나가 교수는 아직도 건물이 남아 있는 상하이 위안소를 직접 답사하여 그 내부 구조까지 밝힙니다. 아울러 일본에 생존해 있는 위안소 업자와 인터뷰도 하면서 자료 속에 나오는 위안소들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운명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기왕에 버린 몸 하면서 악착같이 깜짝 놀랄만한 돈을 번 여인도 있는가 하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편을 하다가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 여인의 슬픈 이야기도 있군요. 이상이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입니다.


중국 한커우 적경리 위안소 풍경

중국 한커우 적경리 위안소 풍경. 이 위안소에는
모두 15개 업소가 잇었는데 위안소 조합의 조합장은
일본인, 부조합장은 조선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상하이의 위안소는 이후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둔군 사령관의 재량으로 설치되던 위안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에 전 일본군의 범위에서 공식화합니다. 같은 해 일본군 수뇌부는 전 일본군에 병사 150명당 1명의 위안부를 충당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병사들의 성적욕구를 해소하여 민간인 여자의 피해를 막고, 병사들의 성병을 통제하고, 또 군사기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합니다. 이후 위안소는 근 280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에서, 북으로는 흑룡강 소만(蘇滿) 국경지대에서부터 남으로 라바울 등 남태평양 제도에 이르기까지, 서로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로 넘어가는 미얀마 전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예외 없이 설치되었지요. 일본은 물론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주변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조선에 있었던 위안소로 제가 증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두 군데입니다. 한 곳은 대전시 교외의 일본군 주둔지의 부근이었습니다. 그 곳을 이용한 적이 있는 일본군 지원병 김성수는 그 곳을 병사들이 ‘P야’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P는 영어 prostitute(창녀)의 첫 글자이고 ‘야’는 일본말로 옥(屋), 곧 집을 말합니다. 언젠가 1944년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중국 난징[南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 돌아오신 할아버지를 만났더니 그 분도 위안소를 ‘피야’라고 하더군요. 대전의 ‘피야’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김성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본 키모노를 입은 중키의 여성이 나오면서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데, 발음으로 조선여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위안소를 이용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욕망은 간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나 허무한 감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 왔으며, 앞으로 또 어떤 길을 걸어 갈 것인가. 이를 생각하니 동정을 금하지 못했다”(《상이군인 김성수의 전쟁》, 금하출판사, 69쪽).

저는 아직 이렇게나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고 있는 자서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진해에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진해 해군기지에 군속으로 동원되었던 어느 할아버지가 거기에 들렀던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상급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위안소에 갈 사람은 집합하라”고 하여 얼떨결에 호기심으로 따라 나섰다고 하는군요.

[7]-5 위안부들의 처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5 위안부들의 처지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의 입구에는 이용수칙을 적은 판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위안소 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용시간은 저녁 몇 시까지이다, 단 하사관과 장교는 밤 몇 시까지이다, 등등과 더불어 이용요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사와 장교의 차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대개 1~2원이었습니다. 병사의 한 달 월급이 7~1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소 이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셈입니다. 이용 시에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삿쿠라고 하였습니다. 삿쿠는 한 달에 한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대개 위안소에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직접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위안부는 1주일에 한 번씩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업자는 위안부의 명단과 변동 상황을 매번 군부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수입금은 대개 위안부와 업자 간에 절반씩 분배하였습니다만, 업자에게 받은 선대금이 과중하거나 악덕 업주를 만날 경우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제법 자유롭게 시가를 돌아다녔던 여자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들의 경제적 처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앞서 상하이 위안소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돈을 벌은 위안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커우[漢口]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 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경자라는 조선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3만 원을 저축하였는데, 5만 원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이 대단한 여자라고 표창을 하라고 했답니다.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가 돌아 온 문옥주라는 위안부가 있는데, 자신의 기구한 역사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5천 원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 5천 원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2년 당시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면 대개 한 달에 11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견주면 경자나 옥주가 얼마나 큰돈을 모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원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야마나시[山梨]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밤마다 남태평양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던 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위안부의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기간이 지나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한 불쌍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으로 간 여인들 가운데는 전쟁말기에 배편이 끊어져 돌아올 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으로 변한 군표를 가방 한가득 들고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으며, 강을 건너다 그만 군표가 든 가방을 떠내려 보낸 어느 여인의 애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어떻게 해서 저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내진 것일까요.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분노해 마지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다음에는 1941년에 나온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열차의 혼잡한 3등 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한 신사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신사와 여인의 관계를 궁금해 합니다. 신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사람이 “만주나 북지로 다녀 보면 돈벌이는 색시장사가 제일인가 봐”라고 하여 여자가 끌려가는 색시임을 맞춥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신사는 일선으로 다니면서 색사장사한 자기의 경력을 털어 놓습니다. 역시 돈벌이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여인을 이삼십 명씩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도 합니다. 데리고 가는 색시는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역에 도착하자 신사는 내리고 그 아들이 탑니다. 아들은 다짜고짜 여인의 뺨을 후려칩니다. 도망에 대한 화풀이지요.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장실로 갑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설 속의 나는 그 여인이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여인이 화장실에 간 것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여인은 아들에게 함께 도망친 다른 여인의 소식을 묻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는 도처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색시장사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여인의 뺨을 쳤지요. 그래도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앞서 저는 조선의 여인들이 어떻게 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졌는가를 물었습니다만, 저의 한 가지 대답은 색시장사입니다. 색시장사가 그녀들을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은 그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생존 위안부 175명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증언하였지요. 그에 따르면 175명 가운데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정진성,《일본군 성노예제》, 66쪽). ‘협박 및 폭력’과 ‘취업사기’가 어떻게 다른지 관련 책을 유심히 보아도 자세한 설명이 없군요. 제가 보기에 이 둘은 구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사기가 들통이 난 그 순간부터 색시장수는 폭력배로 돌변하지요. 그들은 딸을 가진 가난한 집에 접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딸을 데리고 갑니다. 경우에 따라선 거액의 선대금을 지불하지요. 그런 경우엔 사실상 딸을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삼이사》에 의하면 1941년 색시들의 몸값은 1천 원의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은 다양합니다. 상하이 위안소에 갔다가 어느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몸을 건진 김씨 할머니는 1937년 17살 때 돈벌 수 있다는 모집인의 말에 속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를 위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위안부가 되는 줄 알고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색시장수들은 군위문단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7월 함경도 청진의 어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관동군 위문단의 모집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도 유력한 경로의 하나였습니다. 군에서 간호부로 일한다거나 밥 짓고 빨래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해놓고선 위안부로 끌고 간 경우가 되겠습니다. 1940년 일본군이 남중국 난닝[南寧]이란 곳을 점령한 다음 위안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곳으로 황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황씨는 지주의 아들이고 데리고 간 여자들은 모두 소작농의 딸이었지요. 황씨는 당초 육군 직할의 다방과 식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위안소를 경영하면서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1944년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안씨 성의 조선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친구가 하던 것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위안소 경영의 가장 큰 애로는 계약기간이 끝나 돌아간 여자의 뒤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가 여자들을 계속 대주어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업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직접 고향에 가서 여자들을 구해 오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령(軍令)을 사칭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이라고 속인다는 뜻이겠지요. 떳떳하게 신문광고를 내는 모집책도 있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문광고로는 경성일보에 2건과 매일신보에 2건이 있습니다.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광고를 보면 “위안부 지급 대모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연령은 17~23세, 근무지는 후방 ○○대 위안부, 월수는 300원 이상, 전차금 3000원 가능”이라 하였군요.

[7]-7 일본군의 전쟁범죄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7 일본군의 전쟁범죄
이상이 여인들이 끌려간 다양한 경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건을 기획하고 연출한 최종 책임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일본군과 총독부입니다. 일본군은 수뇌는 위안소의 설치를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업자를 지정하여 여인들을 모으도록 지시했습니다. 거기에 총독부가 협조하였습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거나 항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여행증명서가 필요한 시절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행렬이 위안소로 가는 줄은 그 시대의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법으로도 인신약취와 취업사기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관헌들은 그것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줌으로써 협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집책에 끌려 위안소로 향한 여인들의 행렬은 일본군과 총독부가 공모한 인신약취의 범죄행위였습니다. 위안소의 여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으며, 자유외출은 금지되었습니다. 여인들은 성노예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에 따르면 일본군과 일본 국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서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반인륜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를 찾아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첫째,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매춘업을 위해 부인과 아동의 매매를 금지한 1911년의 국제조약을 위반하였습니다. 이 조약에 의하면 본인의 동의 없이는, 또는 21세 미만의 미성년의 경우는 동의가 있더라도, 매춘업을 위해 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이러한 범죄행위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범죄행위를 교사(敎唆)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1907년에 체결된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협약을 위반하였습니다. 이 협약 가운데는 여성의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노예제를 금지한 국제법을 위반하였습니다. 위안소의 여성들이 노예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넷째 위안부 가운데 상당수는 21세 미만의 미성년이었습니다. 미성년의 강제노동이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범죄행위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吉見義明, <‘종군위안부’ 문제로 무엇이 추궁당하고 있는가>,《歷史と眞實》, 筑摩書房, 1997). 저는 이상과 같은 요시미 교수의 주장에 찬성입니다. 아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정부는 요시미 교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행여나 전쟁 시에 일본군이 저지른 반인륜 전쟁범죄를 덮을 요량이라면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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