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5 제국의 이등시민으로서

[6] 협력자들  [6]-5 제국의 이등시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판도

대동아공영권의 판도

이광수나 최정희와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들이 조선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순수하고 정직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조선의 자손들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시 일본제국의 판도가 공간적으로 대폭 확장하고 있었던 객관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운 다음,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전을 벌여 중국의 주요도시를 점령하였으며, 1941년부터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여 동남아시아와 호주를 제외한 남태평양 전역을 장악하지요. 일본제국은 실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빛나 보였습니다. 그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실현 불가능으로 보였습니다. 그 대신 넓어진 제국의 판도는 조선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제국의 이등시민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원래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조선인 스스로 이등시민을 자처하면서 반도를 벗어나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활발히 진출하였던 것이 1930~40년대였습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재인식》에 실린 논문이 김철 교수의 <몰락하는 신생ㅡ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입니다. 이 논문도 문학에 문외한인 저에게 큰 자극으로 읽혔습니다. 이 논문에서 김철 교수는 식민지기의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태준의 소설 《농군》이, 실은 일제의 만주개발 정책에 잘 부응한 국책소설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친일문학을 지금까지 민족문학으로 간주했다니, 그럴 수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습니다만, 김철 교수의 해부는 날카롭기 짝이 없습니다. 1938년 이태준은 몇 사람의 문인과 동행하여 만주를 여행합니다. 만주로 이민 간 조선 농민의 마을을 시찰할 목적에서였지요. 그 마을은 1931년의 이른바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유명한 그 마을이었습니다. 1931년 만보산에 들어온 조선 농민은 만주의 밭을 논으로 개간하기 위해 20여 리나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토민이라고 무시한 주변의 중국 농민과 충돌이 발생합니다. 중국 농민들의 땅을 함부로 침범했던 것이지요. 중국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수로를 파괴하자 조선 농민들은 일본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하여 중국인들을 물리칩니다. 그 과정에서 쌍방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국내의 조선일보가 만주의 중국인들이 조선 농민을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오보를 내지요. 그러자 전국 도처에서 화교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벌어집니다. 평양이 가장 심하였는데, 무려 127명의 화교가 살해당하고 39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만보산사건의 전말입니다. 그 사건 7년 뒤 만주를 여행한 이태준은 ‘식민지 모국의 지식인’처럼 만주의 이 도시와 저 도시를 이국취향으로 즐겼을 뿐 아니라 만보산에 들러 만주 개척의 성공 실태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워합니다. 만주는 그렇게 조선 농민의 덕분에 마적이나 출몰했던 황무지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설《농군》은 겉으로 보기엔 고향을 떠나 험한 만주 땅에서 힘써 개간에 성공하는 한 진취적인 조선 농군을 다룬 민족소설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김철 교수는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시대적 맥락을 위와 같이 짚어 냄으로써 민족소설로 알려져 온 것을 단번에 친일 국책소설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여기저기에 농장을 차리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 때 주변의 조선 농민과 많은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 역시 수리 시설 때문이었습니다. 1930년대가 되자 만주에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였군요. 앞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하였는데, 뒤에서는 조선인이 중국인을 멸시하고 있군요. 비슷한 이야기를 싱가포르의 수상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문학과 사상사, 672쪽)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리콴유는 자기의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한국인 ‘외인부대’가 뒤를 따라 들어왔는데 몹시 거칠었고 일본군만큼이나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군요. 아마도 일본군의 뒤를 따른 조선인 군속들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조선인은 다른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자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협력의 전선이 국제적으로 확장되면서 협력의 내용까지 바뀌어 간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다룰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7]-1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1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미츠비시 나고야 공장으로 향하는 조선인 여지정신대

미츠비시 나고야 공장으로 향하는 조선인 여지정신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에는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젊은 여인들이 위안부로 수용되어 군인과 군속들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의 조선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에겐 행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성적 위안은 여인들의 인사에 반하여 강요되었으며, 여인들은 거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외출의 자유조차 박탈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노예와 마찬가지 신세였습니다.

요컨대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반인륜 범죄였습니다. 일본군과 일본국가가 공식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할 전쟁범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 점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일본국가가 공식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있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점을 납득할 수 없으며,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그러합니다만, 분노가 지나친 격정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데 격정의 분노는 경우에 따라 장애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내용을 잘못 알거나 본질을 잘못 짚으면 쓸데없는 논쟁만 생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범죄를 다룸에 있어서 마치 재판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법률가처럼 엄숙하고 냉철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재인식》의 편집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추천하였습니다. 저의 추천 위도는 그러하였습니다. 여태껏 한국인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건의 복합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우선,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위안부와 정신대(挺身隊)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만,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이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만큼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신대 하면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 아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교과서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쓰고 있는《국어대사전》(금성출판사)에서도 ‘정신대’를 찾으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의 위안부로 강제 종군한 한국 여성들의 대오”라고 되어 있군요.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신대’는 “식민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군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성적 노예집단인 종국위안부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가 무려 20만이나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수치는 한때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와 정신대는 내용이나 경위가 전혀 별개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그에 관해서는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시대정신》28, 2005)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보다 자세하게는 그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정신대는 일제가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도 남자들이 군대에 나가 자리가 비자 여자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습니다. 일제는 그 점에서 연합국보다 오히려 늦었던 편입니다. 일본에서 정신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1943년 9월부터이며, 공식 결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1944년 3월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학교, 지역, 직장 단위의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자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이란 법령을 발동합니다. 이 법에 따라 12~40세의 미혼여성이 국가에 의해 공식 동원되어 군수공장에 보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법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44년 그해에 시행된 징병제(徵兵制)나 징용령(徵用令)에서처럼 국가가 행정력을 발동하여 여자들을 공식 동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동원과 같은 강제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관의 모집과 알선에 지원해서 나가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학교의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나라를 위해 정신대로 나가라고 권유하였는데요, 권유를 받는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제와 같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3,349명의 여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1944년 3월에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군수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습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서 노동한 정신대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나고야에 있는 미츠비시[三菱] 항공기 공장의 300명 등, 알려진 한에서 정신대가 투입된 공장의 사례들을 모두 합하면 약 2,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2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2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정신대의 실체가 원래 이와 같았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예컨대 1946년에 나온 이태준의 소설《해방전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은 메칠 안 남았다고 하지만 특공댄(特攻隊)지 정신댄(挺身隊)지 고 악지 센 것들이 끝까지 일인일함(一人一艦)으로 뻐틴다면 아모리 물자 많은 미국이라도 일본 병정 수효만치야 군함을 만들 수 없을 거요. 일본이 망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은 걸 기다리나 보오!

일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주인공 현의 말을 반박하는 아내의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대는 특공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 정신대라는 말을 일본어사전에서 찾으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각오로 조직된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大辭林》). 그래서 원래 정신대라 하면 ‘여자정신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칭과 목적의 정신대가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다양한 목적의 특공대가 있었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이태준도 그의 소설에서 “특공댄지 정신댄지”라 하면서 이 둘을 동어반복의 형태로 나열했던 겁니다.

뒤이어 1952년이 되면 신석호 선생이 지은《우리나라의 생활(국사 부분)》이라는 교과서에서 정신대란 말이 다음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하략)

여기서 정신대는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나로 열거되어 있는데요, 앞서 설명한 군수공장으로 투입된 여인들의 근로조직을 가리키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의 접대 행위를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의 일반적 언어 감각에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석호 선생의 역사 교과서는 1962년까지 발행되었습니다. 역사교과서의 기술이 지니는 의의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국민의 집단기억을 공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사교과서에서 정신대는 1960년대 초까지 위안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과 같은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일반적으로 성립해 있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양자를 혼동하는 개인의 개별적인 기억은 정신대가 모집되었던 1944년 당시부터 있었다고 보입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집단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1962년 신석호의 역사교과서가 중단된 다음 1979년까지 역사교과서는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간에 알게 모르게 국민의 집단기억에 있어서 정신대의 실체가 위안부로 슬슬 바뀌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소설에서 그 좋은 증거를 찾을 수 있지요. 제가 읽어 본 제한된 범위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신대를 위안부로 묘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소설 사례로서 1969년에 나온 김정한의《수라도》(修羅道)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일정 말기 낙동강 하구의 어느 마을입니다. 이와모도[岩本]로 창씨한 마을의 구장이 처녀들을 정신대로 징발하려 합니다. 김정한은 정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희들 말로는 전력 증강을 위한 ‘여자정신대원’이란 것인데, 일본 ‘시즈오카’라든가 어딘가에 있는 비행기 낙하산 만드는 공장과 또 무슨 군수 공장에 취직 시킨다고 했지만, 막상 간 사람들로부터 새어 나온 소식에 의하면 모조리 일본 병정들의 위안부로 중국 남쪽지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정한은 1908년생으로서 식민지기를 몸소 겪은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정신대의 원래 뜻을 정확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간 여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막상 정신대로 간 사람들로부터의 ‘소식’에 의하면 중국 남방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은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요. 소설을 좀 더 따라 읽으면 드디어 마을의 여인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결국 옥이에게 붉은 닦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여자정신대원! 일본 병정의 위안부!

소설의 주인공 가야부인의 몸종인 옥이 처녀에게 드디어 ‘붉은 딱지’, 곧 정신대 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붉은 딱지’[赤紙]는 군인으로 징병될 청년들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흰 딱지’[白紙]도 있었는데요, 징용 대상자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여자정신대에 대해서는 붉은색이든 흰색이든 영장이 발부된 적이 없습니다. 전술한 대로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국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의 직업능력을 등록시킨 필요가 있습니다. 호적지를 떠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와 같은 것이 정비될 필요도 있습니다. 동원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예비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실제 총독부는 1938년 발포된 ‘국민총동원법’에 근거하여 이러한 준비과정에 착수합니다.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국민등록제를 실시하였으며, 기류령(寄留令)을 공표하여 호적지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농촌청년을 대상으로 일본말을 가르치고 제식훈련을 시키는 등, 이른바 연성(鍊成)과정을 운영했습니다. 총독부가 1944년 징병제와 국민징용령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 같은 준비작업이 치밀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그러한 준비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동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행하려야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여건이었지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자들이 학교나 직장 단위로 정신대로 간 것은 사실상 강제였습니다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딱지 같은 것이 발부된 적은 없었던 것이죠.

김정한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역사가처럼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시 붉은 딱지가 조선인을 상대로 발부되었다는 사실, 여인들이 정신대로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는 장소와 시간을 달리 하는 이 세 가지 사건을 그 스스로도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인 1969년에 이르러 어렵지 않게 하나로 통합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붉은 딱지’가 발부된 “여자정신대! 일본병정의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설처럼 쓰인 소설이었지요. 그렇지만 소설의 힘은 위대합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분노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소설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신대를 위안부로 아는 국민의 집단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읽었던 좁은 범위의 근거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7]-3 기억의 집단화, 공식화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3 기억의 집단화, 공식화
이윽고 1979~1982년이 되면 역사교과서에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는 기술이 나타납니다. 여인들이 전선으로 끌려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위안부라는 기술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끌려간 여인들이 위안부로 희생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983~1996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라고 하여 애매하긴 하지만 좀 더 강력한 암시의 서술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1997~2001년의 교과서에 이르면, “이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했다”고 하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기술이 명확하게 성립하지요. 이후 2002년부터 지금까지는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하여, 약간 바뀌긴 했습니다만, 위안부가 당초 정신대로 동원된 여자들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의 서술을 보이고 있습니다.

1997년부터 교과서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기술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였던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면서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한 사건이 큰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이어 일본의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공문서가 발견되었지요. 그러자 일본정부도 일본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뒤이은 양국의 정상회담에서 사죄의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가 양국에서 결성되어 생존 위안부를 찾아내고 숨어 있는 자료를 발굴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위안부의 실태와 역사가 상세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응하여 일본정부는 수상이 생존 위안부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내고 관민 합동으로 ‘국민기금’이라는 자금을 조성하여 대략 3천만 원씩의 보상금을 지급코자 하였습니다만, 한국 측에서는 할머니들이 수령을 거부하면서 일본국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신 한국정부로부터 위에 상당한 생활지원금을 지급받고 또 매달 70만 원 정도를 생활안정지원금으로 지원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에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한국의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져 나온 1991년 그때부터 위안부를 정신대로 불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도 위안부 문제를 위한 한국의 시민단체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국민의 집단기억은 1990년대에 이르러선 누구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꽤 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1991년 이후 언론의 공로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어느 신문은 1944년 8월에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을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한반도에서 조직적으로 위안부를 징발한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였다고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하였지요. 이 기사는 지금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신문은 한술 더 떠서 “12~13세의 젊은 생도는 근로정신대에, 15세 이상의 미혼 소녀는 종군위안부로 연행되었다”고 썼습니다. 이렇게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어린 소녀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로 강제 연행되었음을 보도하는 가운데, 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소설과 영화가 뒤를 따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7년 국정교과서의 6차 개정에 이르러 위와 같은 기술이 역사교과서에 나타나게 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습니다.

앞서 저는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는 많은 경우 비교적 가까운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백두산 영산설과 일제의 토지수탈설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만, 지금의 정신대 설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약 175명의 여인이 자신이 위안부로 된 불행한 역사를 고백하였습니다만, 그 가운데 당초 정신대로 동원되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을 증명해 보려고 여러 연구자가 많은 애를 썼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역사적 사실은 처음부터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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