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3 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3 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야적되어 있는 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야적되어 있는 쌀

토지의 수탈설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대량의 토지가 수탈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저는 1923년에 쓰인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에서 확인합니다.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이하 생략)

신채호 선생이 ‘강도 일본’의 각종 수탈을 비난하는 어조는 신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탈의 종목 가운데 쌀의 수탈은 물론, 토지의 수탈도 보이지 않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지요. 실제로 농지의 4할이나 수탈당했다면 신채호 선생이 그에 대해 침묵했을 리가 없지요. 선생이 열거하고 있는 수탈의 목록은 새로운 국가권력으로 들어온 일제가 공유 자원을 개발하거나 각종 세금을 부과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죄다 공권력에 의한 공적 통치행위의 영역입니다. 선생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는 별도의 논쟁거리입니다. 어쨌든 타인의 재산을 대가도 치르지 않고 빼앗는 그러한 수탈은 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제가 조선인의 토지를 대량 수탈했다는 신화가 최초로 학술 논문의 형태로 제시되는 것은 1955년 일본 도쿄[東京]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재무에 의해서입니다. 이재무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총독부가 농민들로 하여금 소유 농지를 신고하게 한 조사방식이 실은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소유권 관념이 희박하였고 신고라는 까다로운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이러한 농민들에게 기한부 신고를 강요하여 대량의 무신고지가 발생하도록 유도하였다. 연후에 그 토지를 국유지로 몰수하여 일본 이민과 동척 회사 등에 유리하게 불하하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이재무가 무슨 실증적 근거를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개인적인 신념에 근거한 일방적인 추론이었지요. 이재무의 개인적 신념은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 보면 허허롭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토지를 가리켜 ‘사람의 목숨줄’[人之命脈]이라 하였습니다. 소유권 관념이 희박했다니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또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500년간 3년에 한 번씩 국가에 호적을 신고해야 했습니다. 신고 절차에 익숙지 않았다니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지수탈설이 교과서에 최초로 실리는 것은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라는 단체가 만든 중등 국사교과서에서입니다. 이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수탈한 결과 인본인의 토지가 전국의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무슨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1967년 민영규가 쓴 교과서에 전국 국토의 40%가 수탈당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만, 그 역시 무슨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의 교과서는 검인정 제도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교과서가 있었는데, 모든 교과서가 다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부터 교과서가 국정 제도로 바뀝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민영규가 만들어 낸 40% 수탈설이 정설로 교과서에 실려 왔습니다. 앞서 말한 식량 수탈설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까지의 교과서에는 그러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국정 교과서로 바뀐 뒤부터 일제가 식량의 절반을 실어 날랐다는 식의 난폭한 서술이 등장하지요.

국정으로 바뀐 교과서의 서술이 거칠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장에서 비판한 바입니다만,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의 이름으로 단행한 유신의 시대였습니다. 민족주의가 더 없이 강세를 떨치던 시기였지요. 역사가들은 이 같은 시대적 추세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역사가는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만들어 냄으로써 정치가와 대중의 민족주의적 욕망에 부응하였지요. 교과서의 서술이 난폭해진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대지를 측량하고 있는 모습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대지를 측량하고 있는 모습

교과서와 별도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한 학술 연구서가 나오는 것은 198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해에 신용하 교수가 출간한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 1982)는 뒤늦게나마 일제의 토지 수탈을 입증한 연구라고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저도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뒤 제 나름대로 한국의 토지제도사를 연구하면서 저는 신 교수의 위 책이 진지한 실증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 교수에 대한 무례한 언사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대중의 역사인식에 대한 매우 공적인 문제라 어쩔 수 없군요. 이재무와 달리 신 교수는 일제의 국유지 수탈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일제가 민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고자 광분했던 모습을 신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라고 매우 선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증거로서 신 교수는 일제가 수탈했던 국유지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는 1918년에 출간된 토지조사사업의 보고서에 소개된 분쟁사건을 신 교수가 편리한 대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지요. 예컨대 경남 김해의 어떤 땅을 두고 경남 도장관은 국유지임을, 민간인 누구는 민유임을 주장하는 분쟁에 대해 보고서는 각각의 주장은 이렇고 저렇다는 식으로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신 교수는 분쟁의 결과는 보나 마나 뻔한 것이라 하여 모조리 국유지로 판결이 난 것처럼 바꾸어 썼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실증이라고 할 수 없지요.

신용하 교수가 위 책을 출간한 그 해에 경남 김해 군청에서 토지조사사업 당시에 작성된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자료를 이용한 논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85년부터입니다. 저도 그 과정에서 한 몫을 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총독부는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의 심사에서 공정하였으며, 나아가 기존의 국유지라도 민유인 근거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민유지로 바꾸어 판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분쟁을 거쳐 남은 국유지는 전국의 총 484만 정보의 토지 가운데 12.7만 정보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마저 대부분 1924년까지 일본 이민이 아니라 조선인 연고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해 버렸습니다.

[4]-4 만들어진 기억의 상업화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4 만들어진 기억의 상업화
1997년 저를 포함한 몇 사람의 연구자들이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원 자료에 기초하여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 1997)라는 연구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이후 이전과 같은 난폭한 수탈설은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교과서의 서술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군요. 한번 만들어진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선진사회라면 그러한 일이 있기 곤란합니다. 거기서는 학술세계를 지배하는 엄격한 심판자 그룹이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에 비해 후진사회는 엄격한 심판자 그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옳고 그른지를 대중은 물론 연구자조차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대중의 집단기억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지요. 한번 권력화한 대중의 집단기억은 좀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한국사회는 아직 이 같은 후진사회의 특질을 많이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가 그런 후진적 양상을 떨치지 못하는 데는 상업화 된 민족주의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신용하 교수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 측량기를 들고”를 이야기했지만 실제 피스톨이 발사된 사건을 하나라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의 그런 한계는 역사소설가에 의해 곧잘 매워집니다. 199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조정래의 장편 역사소설 《아리랑》 아홉 권이 그 좋은 예이지요. 다 합하여 무려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의 앞부분은 토지조사사업 당시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 무대에서 사업의 실무를 맡은 조선인 모리배들이 일본인 순사와 결탁하여 신고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있습니다. 토지를 빼앗기게 된 농민이 모리배에 항의하다 몸을 밀쳐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자 일본인 순사가 그 농민을 나무에 묶어 놓고 즉결 처분으로 총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지나쳐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이 소설가는 당시가 비록 식민지이지만 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일개 순사가 사람을 즉결로 처형하다니요. 일제가 1911년에 공포한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이란 법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그렇게 그 시대는 한 소설가에 의해 더없는 야만의 시대로 그려졌습니다. 마치 포르투갈의 모험 상인들이 아프리카 남미의 미개 지역에 들어가 마구 분탕질치는 식으로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를 그리고 있습니다. 본의가 아니겠습니다만, 그 소설에서 우리 민족은 동네 사람이 죄 없이 총살당해도 그저 보고만 있는 나약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야만인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랬던가요. 어쨌든 그 소설을 읽은 수많은 젊은이가 그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알겠지요. 그리고선 야만인처럼 난폭하게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사고하겠지요. 그것이 두려워서 하는 말입니다.

[5]-1 한용운의 자유의 논리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1 한용운의 자유의 논리


[한용운]

한용운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다른 누구보다 명확히 한 사람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분이신 한용운 선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인 검찰의 심문에 대응하여 한용운 선생이 작성한 ‘조선독립의 글’이란 문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자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그런데 일본인 검찰을 감복시킨 한용운 선생의 자유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저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다”는 선생의 외침에서 문득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가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연설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바다를 건너 온 정신이었습니다. 전통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그런 인간 자유론이 생겨날 여지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용운이란 당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신세계는 인류 보편의 자유 가치를 찾아 동서양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국주의 비판이 일본인 검찰에게 경의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가 이미 세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한용운 선생의 정신세계에서 저는 제가 앞서 이야기한 ‘문명사의 대전환’의 가장 훌륭한 예를 발견합니다. 중화제국이라는 문명권의 일부로 위치했던 조선 문명이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알고 개인을 궁극의 실체로 인정하는 서유럽 문명권으로 포섭되어 가는 그 대전환 말입니다. 제가 식민지기를 이해하고 또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시각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입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리켜 세간에서는 흔히들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진의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은 가운데 편견에 가득 찬 비판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5]-2 ‘영구병합’을 위한 근대의 이식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2 ‘영구병합’을 위한 근대의 이식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목적에서부터 기존의 수탈론과 이해를 달리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은 이른바 ‘영구병합’이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통치사료를 보면 ‘영구병합’이란 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옵니다.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20~30년간 살다가 돌아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영구히 살려고 왔습니다. 이 점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구병합’이란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그대로 두어서도 안 되지요. 그럴 목적에서 일제는 그들의 법과 제도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한갓 수탈이나 자행하여 민심을 잃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달렸던 것이 일제의 조선 지배 35년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란 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대조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근대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법학자들은 ‘사적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일제가 조선에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도입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본 자신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전의 단계였지요. 그들이 만든 근대국가는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에 기초한 천황제 국가였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이지요.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류로 정착시켰습니다. 그 서유럽 기원의 민법이 1912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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