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4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4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청조 중화제국의 구조

청조 중화제국의 구조

조선왕조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크게 보면 같은 원리에 기초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평등한 주권국가끼리의 국제질서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는 중국이 중심이 된 중화제국이란 국제질서가 존재하였습니다. 이 국제질서에서 성리학이 이야기하는 하늘을 직접 대변하는 존재는 중국의 천자(天子)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의 왕은 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늘과 관계를 맺는 식이었습니다. 천자가 다스리는 중국은 나라라 하지 않고 천하(天下)라 하였습니다. 그 천하는 한족들이 사는 지역이 한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3겹의 동심원이 둘러싼 형태였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바깥 고리는 동북·몽골·신강·티베트로 이루어진 이른바 번부(藩部)였습니다. 대개 이 고리까지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지요. 다음의 바깥 고리는 조선과 베트남과 같은 조공국(朝貢國)이었는데 열둘 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 나라는 이후 제국주의의 침입을 맞아 중화제국에서 분리된 부분에 해당합니다. 맨 바깥의 고리는 호시(互市)라 하여 중국과 평등하게 교역하는 일본이나 로마 등 서유럽의 먼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천자의 덕화가 미치는 정도와 형식에 따라 동심원적 질서를 취하는 것이 천하로서 중국의 개념이었지요. 그 속에서 나라[國]라 하면 중국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諸侯)의 조정을 의미하였지요.

15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중화제국의 질서를 수용하였습니다. 왕이 바뀔 때는 천자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그것은 조선의 왕이 누린 움직일 수 없는 권위의 기초였습니다. 그 대가로 조선왕조는 1년에 4~5차례 중국에 조공을 위한 사신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자주독립하고 번영을 누린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속에서였지요. 오늘날과 판이한 국제질서의 이러한 역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조선왕조의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장에서 소개한 기자정통설은 그러한 국제질서를 뒷받침한 역사관입니다. 17세기 이후가 되면 같은 오랑캐 출신인 여진족이 청 제국을 세웁니다. 그러자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은 소중화(小中華)라 하여 세계문명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었습니다. 소중화 사상은 18세기 후반 중국의 발전상이 알려지면서 많이 후퇴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설적으로 중화제국의 국제질서에 관한 전통적인 감각만큼은 더욱 공고해진 채로 끝까지 뻗쳤던 셈이지요.

조선왕조의 시대를 이렇게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과 그 역사적 의미가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왕과 양반의 조정으로서 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백성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중화제국의 질서 속에서 위치한 한 제후의 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나라가 망한 것은 그런 국가관과 국제질서의 감각을 해체할 만한 지성의 창조적 변화가 그 나라에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너무나 단단한 갑옷과 같았습니다. 견갑(堅甲)으로 둘러싸인 전통문명은 보기에 따라 무척이나 아름답지요. 그러나 그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합니다.

[3]-5 대전환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5 대전환
20세기의 한국사는 전통 왕조와 문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 조정이 전제될 때 비로소 그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의 한국사는 나라를 빼앗겼다가 독립운동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았던 역사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문명사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중국문명권에서 이탈하여 서유럽문명권으로 편입된 역사가 20세기 한국의 역사입니다. 유교문명권에서 기독교문명권으로, 대륙농경문명에서 해양상업문명으로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세계적 수준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이 같은 관점을 무슨 영문인지 우리의 근·현대사에 적용하는 데 그렇게도 망설여 왔습니다. 문명사의 대전환을 직접 강요한 세력이 원래 같은 문명권에 속했던 일본이어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워서 그랬던가요. 아니면 섬나라 오랑캐라고 가볍게 여기던 일본에 당한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선량한 주인론’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이런 식의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는 자위행위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는 20세기의 한국사를 일본과의 관계로만 국한된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문명사의 대전환이라는 넓디넓은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리 보입니다. 그렇게 과거를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위한 기본 전제입니다.

[4]-1 역사란 무엇인가?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입니까. 주제가 빗나가는 듯합니다만,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흔히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그것이 역사이지요. 기억되지 않은 과거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지요. 어려운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가능한가. 저는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언제 홍수가 발생했고 언제 일식이 일어났는지,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서로 다툰 사회현상에 관한 기억은 이해관계가 다르면 다르게 기억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객관은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이란 학문이 과연 성립할까요. 무엇 때문에 역사가는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과거의 사실을 캐고 있나요.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이란 절을 두어 이 문제에 대한 저의 평소 고민을 펼쳐 보았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사가란 ‘역사와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가 투쟁하는 역사란 대중의 과거사에 대한 집단기억을 말합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정치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되어 대중에게 주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최고수준의 집단기억이라 할 국가와 민족의 역사에서 후자의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한국인은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라는,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해선 제2장에서 쓴 그대로입니다. 역사가는 이러한 대중의 집단기억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역사가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정치적으로 기획되거나 조작되었을 수 있음을 사료에 기초하여 대중에 알리는 전문 직업인이지요.

역사가의 비판을 통해 대중은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지혜를 과거사의 성찰에서 찾는 것이지요. 그러한 성찰의 화두를 대중에 던지는 직업능력의 소지자가 역사가입니다. 역사가의 고발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역사가는 자기의 발언이 객관적이거나 법칙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료를 보니 이렇게 저렇게 통념과 다르더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선진사회라면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발언을 경청하지요. 대중이 역사가의 발언을 무시하면 그 사회는 후진사회입니다. 일단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얻은 지식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다른 역사가의 다른 의견과 견주면서 어느 의견이 옳은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중과 역사가 사이에 이러한 민주적인 분업관계가 성립해 있는 사회야말로 진짜 선진사회라고 생각합니다.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지금부터 저는 이 같은 역사가의 직업의식에서 1910~1945년 일제하의 식민지로 있었던 우리의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그 시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수탈’입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수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가 수탈입니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의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을 수탈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거나 해외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60년간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국민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지요.

국사교과서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2001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일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컨대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였으며, 이 토지를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농민이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과 같은 국책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또 총독부는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노동력을 수탈하였습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서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국사 교실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선생도 울먹이고 학생도 울었답니다. 그렇게 악독한 수탈을 당한 조상들이 너무 서럽고 분하여 울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런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예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비슷한 사실이 없지 않으나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자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혹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가 정치화된 역사가에 의해 또는 역사화된 정치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역사의 본질을 국사교과서의 수탈설만큼 적나라하게 잘 보여 주는 다른 사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생산된 쌀의 거의 절반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쌀이 건너간 경로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했습니다. 수탈과 수출은 매우 다르지요. 수탈은 조선 측에 기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수출은 수출한 농민과 지주에게 수출소득을 남깁니다.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정도 높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수출을 하면 농민과 지주는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이 커지면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요.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과 같은 대용 식량을 사와서 충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추계에 의하면 인구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줄었다고도 반드시 이야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수출소득으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나 원료를 수입하여 방직공장을 차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 김성수 선생의 경성방직(京城紡織)이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공장입니다. 요컨대 수출을 하면 수탈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한국의 교과서는 이 평범한 경제학의 상식을 거꾸로 쓰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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