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3 《해방전후사의 인식》 비판

[1] 빗나간 역사의식  [1]-3 《해방전후사의 인식》비판
이 책은 그러한 탈민족과 문명사의 관점에서 지난 20세기의 한국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것입니다. 무모하다고나 할까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서술의 대상은 20세기 전체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패망 이후 식민지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성립한 초창기인 1950년대까지입니다. 흔히들 그 시대를 해방전후사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그 해방전후사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지배 학설이었던 민족주의 역사학을 논리적으로 또 실증적으로 치열하게 비판하면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비판의 표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1989, 이하 《인식》으로 약칭)이란 여섯 권의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인식》은 해방전후사를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정판입니다. 이 책은 1980~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읽지 않은 대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여서 여섯 권 합하여 100만 권 가까이나 팔려 나갔다고 하는군요. 재야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도 이 책을 탐독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현 집권세력의 요처에 포진한 이른바 386세대라는 젊은 정치가들의 현대사 인식은 이 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현 정부가 20세기 한국사 전체를 대상으로, 심지어는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까지를 대상으로 해서, 무려 16개에 달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과거사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각 권에는 총론이 있습니다. 총론은 책의 성격과 내용을 대변합니다. 그 총론을 중심으로 《인식》 각 권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제1권의 총론은 언론인 출신의 송건호 씨가 썼는데, 주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이 거칠고 감정적인 데가 많지요.

예컨대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은 신생정부임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참신한 기풍을 볼 수 없어 마치 노쇠국과 같았다” 등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비판을 넘어 《인식》이 나름의 논리체계를 세우기 시작하는 것은 제2권부터입니다. 제2권의 총론은 강만길 교수가 썼는데, 그의 유명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거기서 펼쳐집니다. 요컨대 식민지기에는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였듯이 해방 후의 분단시대에는 민족통일이 지상과제라는 겁니다. 민족통일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성립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에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의 정치는 민족정치이어야 하고, 경제도 민족경제이어야 하고, 문화도 민족문화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민족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바로 60년 전 김구 선생이 38선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휴전선에 선 중간자의 입장이 되어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전쟁을 치르고 분단을 고착시켜 간 역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강 교수가 이야기하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입니다.

이렇게 제2권의 총론이 역사인식이라면 제3권의 총론에서는 사회경제의 분석과 그에 기초한 혁명이론이 제시됩니다. 제3권의 총론자는 박현채 선생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백아산에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박 선생에 의하면 식민지기와 미군정기는 식민지반봉건사회(植民地半封建社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크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이지만, 아직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봉건적 부문이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경제적 변혁이 반(反)제국주의와 반(反)봉건적 토지개혁을 주요 과제로 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이하면 아직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미약하여 공산당이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객관적 여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민주주의적인 토지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여 정권을 확실히 장악한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가자는 주장이지요.

아시아의 정치사에서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개발하고 실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이지요. 그는 위와 같은 2단계 혁명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 불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마오의 이 같은 혁명이론을 수용하고 실천했습니다. 박현채 선생도 그러한 사상을 계승 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위와 같은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그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중진 단계로 발전한 1980년대 중반부터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마오의 혁명이론으로 해방전후사를 재해석하고자 했던 것이 제3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4권의 총론은 최장집과 정해구 두 교수가 함께 쓴 것인데 《인식》 여섯 권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논문입니다. 두 교수는 앞의 세 권까지의 도덕심판과 역사인식과 혁명이론을 전제한 위에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해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해방, 분단, 건국, 전쟁에 이르는 전 역사 과정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큰 논문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 정권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은 혁명적인 소련국의 지원하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자와 혁명적인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와 반민족·반혁명 세력의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그러한 성격 차이 때문에 거의 불가피했던 내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남한의 해방과 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대한민국 내부에서, 그것도 제도권에 속한 대학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아슬아슬한 대목이 바로 제4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5권의 총론은 김남식 씨가 썼습니다. 이 분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어쨌든 여기서는 일층 대담무쌍하게 북한의 역사적 정통성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북한을 두고 김남식은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혁명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북한의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김남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6권의 총론은 박명림 교수가 썼는데, 제4권의 총론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인식》은 마오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비판한 다음, 북한의 주체사상에 기대어 민족통일을 전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 과연 그렇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해체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중국도 사실상 자본주의체제로 바뀐 가운데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세계사의 현실이 엄연히 그러할진대 지금도 신민주주의혁명론이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추종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새삼스레 《인식》을 비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요. 비판보다는 오히려 《인식》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좀 더 우호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인식》을 비판할 때마다 그런 반비평이나 불평을 자주 듣습니다. 예컨대 《인식》의 제1권이 출간된 1979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서슬도 시퍼렇게 사람들의 정치적 권리를 억압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 시절에 나온 《인식》은 갖은 정치적 박해를 무릅쓰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겁니다. 사실 그 점을 평가함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충 얼버무릴 일은 아니지요. 제가 《인식》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제시된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비판과 그 바탕을 이루는 민족주의 역사의식만큼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체계로까지 공식화하여 다음 세대의 역사의식까지 지배하는 권위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1]-4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인식

[1] 빗나간 역사의식  [1]-4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인식
예컨대 《한국근현대사》라는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를 봅시다. 7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대개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금성사판 교과서를 예로 들지요. 이 교과서에서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는 제4부 이하를 보면 맨 먼저 해방과 건국을 규정한 국제정세로서 다음의 세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무기 없는 전쟁에서 무력충돌로”로서 곧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변화”입니다. 셋째는 ‘제3세계의 형성’으로서 1955년 반둥회의에서 성립한 제3세계의 비동맹을 말합니다. 첫째의 동서냉전은 그렇다 칩시다. 둘째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셋째의 제3세계 비동맹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들과 우리의 현대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한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제3세계의 반둥회의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제3세계는 한국을 위시한 신흥공업국가가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두자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할진대 어찌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 제3세계의 성립을 두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규정한 세계사적 조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의 성립이나 발전과 관련하여 1945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빼놓는다면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모두가 다 아는 상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한국이 해방된 것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인본제국주의를 해체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이 펼친 세계 자유무역체제라는 판 위에서였지요. 교과서는 당연히 구래의 제국주의체제를 대신하여 1945년 이후 세계자본주의를 주도한 미국 헤게모니체제와 그 성격을 한국 현대사의 전제조건으로서 서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어찌하여 실패하거나 해체되고 만 중국 사회주의와 제3세계의 비동맹을 그렇게나 중시하고 있을까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교과서의 서술체계를 잡은 교육부의 검증위원들, 그리고 교과서의 집필에 참여한 역사가들이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식》의 영향하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론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해서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식》을 두고 아직도 지배적인 힘으로 살아 있다 한 것입니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인식》과 그에 입각한 현행 역사교과서를 그냥 두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념적이고 후진적인 역사의식으로는 선진국 진입에 요청되는 정신문화 영역에서의 도약을 기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실은 작년 2월에 뜻을 같이 하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이하《재인식》으로 약칭)이란 두 권의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학술적으로 우수한 국내외의 논문 28편을 묶은 것입니다. 그러자 세간에서 적잖은 호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이라서 보통 사람들이 읽기엔 어렵다는 불평이 많이 들렸습니다. 좀 쉽게 해설해 줄 수 없느냐는 부탁도 있었지요. 제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저는 《재인식》에 실린 논문을 한두 편씩 언급하면서 그것들을 해설해 가는 기분으로 한 장씩 써내려 갈까 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재인식》의 단순한 해설판은 아닙니다. 그 점을 명확히 해두고 싶군요. 생각하고 말을 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저이고, 제 생각을 펼치는 데 유력한 근거를 제시하는 차원에서 각 논문을 끌어와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굳이 이 말을 해두는 것은 각 논문을 쓴 사람의 원래 취지와 저의 생각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활자화된 논문은 저자의 손을 떠난 공공재(公共財)로서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는가는 읽는 자의 몫이기도 하지요.

[2]-1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2] 민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자  [2]-1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앞서도 지적했습니다만, 한 나라가 잘못 세워졌다는 주장이 나라 밖이 아니라 나라 안에서, 그것도 명망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심지어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음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디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가 정의로운 역사에 기초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으로 심어 주고 있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쓰는 식으로 날조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국가의 역사를 신성시하는 국가주의적 발상은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역사에 자긍심을 갖는 건전한 애국심의 국민을 교육하는 일은 국가에 부과된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의 하나이지요. 국가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숨겨서는 안 됩니다. 드러내고 비판을 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와 국가의 도덕 수준을 드높이기 위한 성찰의 일환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사회의 지도자들이 자기 나라가 잘못 세워진 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는 무언가 특수한 문화사적 내지 정신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한 가지로서 19세기까지 지배적이었던 성리학의 영향을 들고 싶습니다. 성리학은 일종의 근본주의적 철학입니다. 거기서는 사물의 인과가 오직 어떤 근본적인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예컨대 지난 60년간 한국의 정치가 혼란스럽고 사회가 부패한 것은 애초에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최근에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아파트 투기가 자꾸 일어나는 것도 친일파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요. 그런데 그런 명제들은 경험적인 자료로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증(反證)이 가능한 경험적인 근거 위에서 제기된 과학적인 명제가 아니지요. 그것들은 일방적이며 선험적이며 종교적입니다. 그러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명제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면 제대로 근대화된 사회라고 할 수 없지요. 중세사회와 근대사회의 중간에 놓여 있는 과도기 사회이지요. 솔직히 말해 한국사회는 아직 근대화의 역사가 짧기에 이러한 과도기적 특질을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근본주의적 명제 하나를 들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 한국인은 유사 이래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한국의 민족주의, 그것을 들겠습니다. 민족의 분단을 초래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처음부터 잘못이라든가, 통일이 되기 전에는 역사는 미완성이라는 식의 《인식》의 주장도 크게 보면 다 민족이라는 근본주의적 명제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한국에서 민족은 국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국가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보통의 한국인들은 그에 대해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이전에 한민족이란 민족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도 젊은 시절에 몇 번 경험했습니다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대학시절에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통일의 전사가 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체험은 보통의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근본주의적 열정과 감성의 체계로서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을 세계의 선진사회와 선진국가로 발전시키기에 역부족이며,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역사의 족쇄로 작용할 위험성이 크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우선 민족이란 무엇입니까.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민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에 합당한 민족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그런 시도를 해봤지만 모두 실패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의 통념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의하도록 합시다. 민족이란 단일 인종으로서 단일 언어를 쓰고 단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면서 스스로 공동의 운명공동체라고 믿는 주민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상징이나 신화를 발달시킵니다. 신화는 대개 민족의 성립과 관련된 건국신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 단군의 자손이다. 우리는 한 핏줄, 곧 한 겨레이다. 바로 그런 것 말입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민족의식을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5천 년 전부터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의 공동체였을까요. 막상 이렇게 따지고 물으면 아무도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모두 그렇게 믿고 있지요. 그것이 바로 민족이 지닌 신화로서의 힘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억압을 받는 고난의 시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2]-2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2] 민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자  [2]-2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그 점을 명확히 하려고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백두산을 예로 들었습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입니다.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가 생각납니다만, 교과서의 맨 뒷장을 보면 ‘우리의 맹세’가 있는데, 그 가운데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이지요. 어쨌든 어린 저에게 백두산은 처음부터 영산이자 영봉이었습니다. 제가 백두산에 오른 것은 나이 39인 199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백두산 정상의 천지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같이 간 동료 교수 가운데는 그 진한 감동을 한시로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곳에 강림하셨으니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기상을 이어받아 만주 고토를 수복하자.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뒤지면 전혀 딴판입니다. 1778년, 조선왕조 정조 연간에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고급관료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그는 이곳은 중국 땅도 아니고 조선 땅도 아닌 아득한 변방으로서 천 년에 한두 사람이 올까 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라와 보니 이 큰 연못의 이름이 없구나, 하늘이 내게 이름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일이란 삼라만상이 태극에서 발원하였으니 삼라만상은 원래 태극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명응은 백두산 꼭대기의 뻥 뚫린 화산구와 그에 담긴 큰 연못을 보고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연상하여 그런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연 당대의 성리학자다운 발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올라 여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강림 한 곳이라고 흥분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서명응 이외에 18~19세기에 걸쳐 서너 사람이 백두산에 올라 글을 남겼는데, 자세한 것은 제 논문을 직접 참조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백두산을 천하 으뜸인 중국 곤륜산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백두산 위에서 조선 땅을 내려다보며 ‘기자(箕子)의 나라’가 조그마하게 펼쳐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대변하는 산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문명이 중국 고대의 성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남으로 내려와 마한으로 흡수되었고 그 마한이 신라로 흡수되었으니 조선 역사의 정통이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신라로, 고려로, 그리고 조선왕조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조선왕조의 역사학은 이러한 기자정통설을 신봉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홀히 여겨 뒤편으로 제쳐 놓았지요. 18세기가 되면 단군의 고조선이 조선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만, 그래도 문명의 정통은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는 기존의 역사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백두산을 두고 곤륜산의 적장자라 하거나 조선왕조를 ‘기자의 나라’라고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역사관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시대의 역사관이 중국 중심이었다면,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관련하여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지요. 15세기 초 세종 연간의 일이었습니다. 기자정통설이 막 성립하던 시기였지요. 당시의 양반 학자들이 왜 기자정통설을 도입했던가, 그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는 인구의 3~4할이 노비라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양반들은 그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지배해도 좋을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그러자 기자 성인이 캄캄한 야만의 동쪽으로 오셔서 8조금법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도둑질한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법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노비란 원래 성인의 가르침을 어긴 야만인이고 우리 양반은 성인의 가르침을 깨우친 문명인이다, 그래서 양반이 노비를 지배하는 것은 세상의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한 성인의 뜻이었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개발된 것이지요. 기자정통설이 출현한 현실적 이유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신분의 인간들이 우리의 하나의 혈연으로서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나누어 가졌을까요. 저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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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