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7] 바보들의 행진 p437

한국, 중국, 대만 학자들에게는 일본의 교과서를 검증할 만한 힘이 없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학력은 매우 낮다 (대만출신 평론가 고분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니시오 회장)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불만을 얘기해도 전혀 이익이 안 된다. 두 나라에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없고 감정만이 있기 때문에 논의가 안 된다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이번에 우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것은 큰 돌파구를 연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데 있어서 국민운동이 승리한 것이다 (다쿠베 다다오. 이사)

이는 2001년 봄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를 두고 한국의 언론에서는 "일본 우익들의 자축파티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하하는 망언들이 쏟아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발언에는 생각해볼만한 점이 많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이번 교과서 파동의 본질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언론은 조국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본인들에게 극우파니 보수 우익이니 하는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마치 이들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거나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나 되는 것처럼 매도하곤 하는데, 이것이 과연 공정한 자세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의 발언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서 매우 존경받는 수준 높은 지식인들이다.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스스로 국제수준에 걸맞는 사고의 능력이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에 관한한 이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혹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에도 민족주의 세력의 폭력에 희생당할까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언론들은 일본에서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이 나오면 항상 망언이라고 매도하는 버릇이 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쉽게 망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건 한국이 한참 후진국인 중국과 같은 수준에서 비난을 받고 또 그러한 비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은 학문과 교육 언론 등이 오랜 역사를 거쳐 제자리를 잡고 균형을 갖춘 선진국이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수준 높은 국민들이 누구나 양심에 따라 신중히 판단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에, 이미 한국이나 중국에서 비판할 수 있는 정도의 심각한 역사의 왜곡이나 오류가 존재하기 힘들다. 그 결과 역사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일본인들은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반면 한국인들은 사사건건 이기적으로 트집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논쟁에서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언론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일어난 2001년 8월13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에 관해서도 한국과 중국의 항의에 관해서만 보도할 뿐, 미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일본 측 입장에 공감하는 국제 사회의 지지 분위기는 보도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입맛에 부합되는 사람들의 말만 되풀이되어 방송될 뿐 일본 주류의 움직임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당연히 한국인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중일 3국 사이에는 1982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교과서 파동이 있었다. 그때에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펴낸 <신편일본사>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한국과 중국 정부가 시정을 요구하자 1982년 7월 23일 마쓰노 국토청장관, 7월 24일 오가와 문부상 등 일본 정부의 각료들이 나서 "교과서 검정은 내정문제이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시정요구는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가당치 않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후 교과서 파동은 장기화되어 1986년에는 문부상 후지오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놈(야쓰)들인 한국과 중공은 세계사 속에서 그 같은 일을 한번도 안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이라고 직언을 했다. 후지오는 이어 그 해 9월 6일 <문예춘추>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일합병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양국의 합의 위에 성립됐다. 한국 측에도 얼마간의 책임은 있다" 고 발언했다.

지금 보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에서 발끈하여 규탄운동이 일어났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일본에서 이 같은 직언을 비판하는 까닭은, 패전국 일본에 만연하고 있는 자학사관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미국의 식민지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비하하는 데에만 능통할 뿐 아직 스스로의 역사를 제대로 보고 자부심을 갖는 단계에는 도달해 있지 못하다. 결국 야당은 후지오의 사임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후지오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파면을 자청, 9월 8일 나카소네 수상은 후지오를 파면시켰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이후 후지오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민당의 젊은 의원들에 의해 <국가기본문제 동지회>가 결성되고, 그 대표인 가메이 의원 등이 1986년 10월 23일 주일한국대사관을 방문, 이규호 대사에게 "현재처럼 중공과 한국이 교과서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등에 간섭하면 스트레스가 쌓여 10년, 20년 후 한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후지오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마지막인 가메이의 전쟁협박성 발언은 다소 지나쳤던 것 같다. 이 발언은 나중에 가메이가 그런 말을 한적 없다고 부인함으로써 유야무야 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의 뜻있는 인사들이 주변국의 내정간섭에 대해서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말 그대로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으로서, 머지않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되던 잘 나가는 나라였으며, 한국과 중국은 아직 답답한 군사독재를 벗어나지 못한 사회였다.

그 뒤 15년이 흘러 이제 일본은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장기불황에 시름하고 있고 중국은 서서히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하면서 장래 미국과의 패권 다툼을 준비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도 어두운 군사독재의 시대를 벗어나 어느 정도 개명된 민주사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이처럼 시대상황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중일의 다툼은 20년 전과 비교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이 똑같은 순서를 되풀이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언제까지 일본에 대해 트집잡기를 계속할 것인가. 최소한 한국만이라도 어서 빨리 이 바보들의 행진에서 발을 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4-8] 일본인의 속마음 p441

[ 1. 1963년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시이나 발언 ]
숙부인 고토 신페이(대만 경영 초기 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한 경제 이론가)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 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그로부터 2년 뒤에 일본국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반성'이란 표현이 있는데, 일본어의 뉘앙스에서 보면 반성은 한국어의 그것과는 달리 일종의 '다시 깊이 생각해 본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후회한다는 뉘앙스도 약간 섞여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죄한다거나 일본이 잘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외무장관으로서 역사적인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연일 반대 시위와 폭동으로 들끓고 있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시이나가 말한 것처럼, 19세기말 서구 제국주의가 서로 경쟁하듯 세계 각지를 침략해 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해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일본만이 신속하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한 유일한 나라였다. 따라서 일본의 전쟁은 크게 보아 일종의 정당방위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청일전쟁을 통해 노쇠한 청나라를 제압하여 조선과 대만을 독립시키고 러일전쟁을 통하여 또다시 조선과 만주를 독립시킨 것은 충분히 자랑할 만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일본인들도 그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 일본이 어느 정도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민중을 해방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 2. 1965년 다카쓰기 발언]
일본의 조선통치 36년 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 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에 속한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 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이 발언 역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있던 민감한 시점에 터져 나와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을 원수로 여기면서 절대로 다시 국교를 맺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여론을 이끌고 있었으며,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일본에게 엄청난 식민통치 배상금을 요구하는 무리한 숫자가 튀어나오고 있던 시기였다. 사실, 일본이 무리한 전쟁으로 미국에 점령당하는 사태가 없었다면 한반도와 대만은 아직도 일본과 같은 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일본, 한국, 대만 모두를 위해서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폭격으로 일본 열도가 잿더미로 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구 2억의 일본제국은 날로 부강해져 미국에 맞먹는 국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만주국까지 합친다면 인구 3억에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말 그대로 대동아연방체로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 3. 1986년 일본국 문부상 후지오 마사유키 발언]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이라는 것은 웬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뿌리를 자르려고 했기에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 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 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1986년 9월 6일자 일본의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4일 후 발매가 시작되는 <문예춘추> 10월호의 기사를 인용해 그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 발언에 대해서는 일본의 각 신문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많이 실려 토론에 올려졌다. 같은 날인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 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사퇴를 거부하다가 8일 나카소네 수상에 의해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 의원은 "조약법에 관한 빈 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씨를 파면했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였다 .(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별달리 문제시될 것도 없는 상식선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현직각료를, 그것도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 즉각 파면 조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당시 자민당의 소장그룹인 국가기본문제동지회 (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면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다시 철회되지 않았다. 후지오 발언 가운데 합병에 한국 측의 책임이 있다는 부분은 옳은 지적이며, 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합병은 일진회 등 한국측 혁명세력에 의해 스스로 강력히 추진되었지만 일본측에서는 거부하던 중, 조선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후지오는 나카소네에 의해 파면당한 직후에도 거듭 같은 내용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문예춘추 다음 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10월호에 실린 글로 인해 다음날 바로 문부장관 직에서 파면 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물러서지 않고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를 통해 계속 털어놓았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한일합병에는 한국 측에도 책임이 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일본은 한국에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런데, 후지오의 발언 가운데 일제가 한국을 선의로 통치했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되는 내용이었지만, 왜 그가 한일합병이 ‘나쁜 일’ 이었다는 전제로 양비론을 전개했는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 대부분에게 합병과 총독부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며 대체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록 간헐적으로 국내에서 저항운동이 발생하기도 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이들이 조선 사회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대체로 당시 조선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하고 만족스런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합병이 일본의 입장에서 그리 큰 손해를 입는 일이 아니었다면, 한일합병은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요즘 표현을 빌자면 윈윈 합병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주장이 일본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공격일변도였기 때문에 일본측에서 다소 과감하게 발언하는 인사들조차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4. 1995년 일본국 전 외무장관 와타나베 발언 ]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 일본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95년 6월6일자)

이것은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와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이후 언제나처럼 한국 측에서는 항의를 했고 와타나베는 일부 표현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 의원은 총리에게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 문제를 다룬 국회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으며 이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은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변함으로써 와타나베의 발언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 5. 1995년 일본국 총무청장관 에토 다카미 발언 ]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대한제국의 수상 이완용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입니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은 나빴습니다. 또한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한 뒤 1주일 후에 조약의 비준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통치하면서 일본은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먼저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을 정비했고, 산에 나무도 심었습니다. 하지만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이며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입니다.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인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조선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의식은 결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을 내지(일본)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이씨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곳곳에서 날치기한 보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장훈이라는 유명한 야구선수도 있고 롯데그룹의 사장도 조선인입니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면 모두 한국사람들 뿐입니다. 또한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 경영하고 있는데, 일본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이처럼 일본의 모든 계층에서 조선인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한일병합이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이것은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원래 오프 더 레코드로 발언한 것인데, 잡지 <선택>과 한국의 <동아일보> 에 보도되어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에토 장관은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0월 13일에 사임했다. 이후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 라는 등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사실 에토 발언에서 언급된 일본의 조선통치의 성과들은 그 성격과 본질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당시 조선은 일반적인 식민지라고 할 수는 없었으며, 만약 그런 것이 식민통치라면 전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은 앞을 다투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겠다고 나설 것이다. 1980년대 이래 동아시아의 대만과 한국 등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이들 지역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밝히는 저작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당시 일진회를 비롯한 조선의 혁명세력들에게 강력한 합병의 요구를 받았지만, 이토 통감은 줄기차게 이를 거절해왔는데 1909년 이토가 암살됨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한국 병합론이 우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합 이후에도 일본은 대체로 뒤떨어진 조선반도를 내지인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 결과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도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유례없는 '식민통치'를 극찬하는 저작들이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볼 때 에토 발언 등으로 상징되는 일본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입장은 한국정부의 입장보다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 6. 1995년 오자와 발언]
비슷한 시기인 1995년 12월에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은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아사히신문 12월 9일자)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부는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이 문제는 역사상 최초로 일본측에서 한일관계의 본질을 지적한 것으로서 일본 정부가 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는지 매우 의문이 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반일 교육은 과거 반공교육에 버금갈 정도로 철저히 이루어져 한국의 학교 현장이나 또한 일반 사회에서도 한일합병의 정당성이나 일본통치의 성과들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금기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는 설령 한국 정부의 반일 교육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인데, 대부분 허무맹랑하고 왜곡된 자료와 사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정부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이라면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자기중심적이고 솔직한 스타일이지만 일본인은 대체로 남의 기분을 먼저 배려하며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 같으면 자기 입장이 옳다 하더라도 접어두고 사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스타일이 양국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일관계의 모습이다. 그 결과 훨씬 더 잘못한 쪽에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는 이상한 한일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1]-1 극단의 20세기

[1] 빗나간 역사의식  [1]-1 극단의 20세기
지난 20세기는 기나긴 인류역사에서 어느 세기보다 파란만장한 시대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서도 세기말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거나 다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대규모 재난도 20세기의 특징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어떤 연구자는 20세기에 걸쳐 대략 1억 8천만의 사람들이 전쟁과 혁명과 학살과 기근으로 죽었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20세기는 전대미문의 살인적인 세기였습니다.

20세기는 인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이성의 위대한 실험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을 전후하여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립하였습니다. 인류의 1/3이 사회주의체제에 포섭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혁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류의 사회·경제생활이 걸어온 정상적인 진화의 코스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계급적이며 공동체적인 존재로 규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인간 이해는 잘못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번영하였습니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자본주의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였지요.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자본주의는 일찍이 누구도 상상한 적이 없는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1만 년 전 신석기 농업혁명이 있은 이래 최대의 변화가 지구적 범위해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그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빈곤과 질병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물질생활만이 아니지요. 대중교육의 보급, 대중민주주의의 확산, 여성의 해방 등 정신생활의 면에서도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위대한 성취를 목도했습니다. 한마디로 20세기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20세기를 가리켜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라고 하였는데요, 그 말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홉스봄의 그 말을 들으면서 20세기 한국사만큼 극단적인 시대가 달리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했습니다. 한반도는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두 강대국의 후견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의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백만 명이 죽고 다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적인 전쟁이 벌어졌지요.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대질주’(big spurt)라 불릴 만한 고도경제성장의 한 세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인간들의 물질생활이 비약적으로 충족해졌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경제에서 교역 규모 11위의 중강국(中强國)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제만이 아니지요. 1980년대 후반부터는 정치의 면에서도 민주주의가 성립하였습니다. 정치, 사상, 언론, 결사의 자유가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넘칩니다. 그래도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다 대한민국의 저력이라고 하겠습니다. 흔히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140여 나라 가운데 대한민국만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만, 사실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선진국 진입이 무성하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습니다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의 반열에 든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정치적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저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지난 20세기의 한국사가 너무나 극과 극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3세대 전에 세계정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식민지로 떨어진 나라가 선진국이 되겠다고 하니 그런 일이 가능한 법인가. 역사에서 그런 비약은 있을 수 없는데, 우리가 무엇을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역시 선진국의 국민이 되고픈 소망이 간절합니다만, 그럴수록 “무언가가 빠져 있어”, “이대로는 곤란해”라는 일종의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 점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빠져 있는 그 무언가는 아마도 정신문화의 영역일 겁니다. 경제나 정치와 달리 정신문화의 진보는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백 년을 단위로 또는 몇백 년을 단위로 겨우 약간의 변화가 관찰되는 것이 정신문화라고 하지요. 그런 정신문화의 영역에서 지난 100년간 우리는 과연 세계적으로 선진적이라고 평가될 만한 변화를 이루어 냈던가. 저는 이 점에 회의적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정신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역사의식과 관련하여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1]-2 잘못 세워진 나라

[1] 빗나간 역사의식  [1]-2 잘못 세워진 나라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집단적이며, 개방적이라기보다 폐쇄적이며, 실체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며, 실용적이라기보다 도덕적이며, 통합적이라기보다 갈등적입니다. 그러한 역사의식으로는 극과 극을 달렸던 20세기의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극단의 시대였던 세계사를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좋든 싫든 한국사가 그 속에서 자리했던 위치를 올바로 잡아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잘못된 역사의식은 사회와 국가를 분열시키고, 이웃 나라와는 부질없는 역사전쟁만 야기할 뿐이지요. 그래서는 결국 정신문화와 국제협력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선진국 진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의 관념적이며 도덕적이며 갈등지향적인 역사의식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그리 잘 세워진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던가요.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참가한 제2건국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진 적이 있지요. 1948년 8월의 제1건국에 무언가 심각한 하자가 있어 지금까지 문제가 많았는데, 지금부터라도 다시 건국하는 기분으로 잘 해보자라는 취지였다고 기억합니다. 건국사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은 현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보다 강력한 어조로 표명되었습니다. 취임 직후인 2003년 3·1절의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라고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연설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취지의 건국사 비판은 우리의 주변에서 대학 강단이나 대중 방송을 통해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것이어서 조금도 이상할 정도가 아니지요.

무슨 뜻일까요. 비판의 앞뒤를 잘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 하 식민지기에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세우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일제와 결탁하여 호의호식하던 친일세력이 미국과 결탁하여 나라를 세우는 통에 민족의 정기가 흐려졌다는 것이지요. 민족의 분단도 친일세력 때문이라는 겁니다. 해방이 되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친일세력이 미국에 붙어 민족의 분단을 부추겼다는 겁니다. 그런 반민족세력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이승만은 친일세력을 단죄하기 위해 열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9)의 활동을 강압적으로 중단시켰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친일세력이 주체가 되어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가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60년간 정치가 혼란스럽고 사회와 경제가 부패한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2건국’을 하거나 ‘과거사청산’을 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건국사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이 그 주관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의식을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이른바 민족이 역사의 기초 단위로 설정되고 있지만, 그 민족이란 것이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만큼 확실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하에서 누차 강조하겠습니다만, 민족이란 20세기에 들어 구래의 조선인이 일제의 식민지 억압을 받으면서 발견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입니다. 민족은 20세기의 한국사를 조명하는 중요한 시각이긴 합니다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체적인 역사의 단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개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이고 도덕적 이기심이고 협동능력입니다. 그러한 본성의 인간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또 상호 협동하면서 건설해 가는 생산과 시장과 신회와 법치와 국가의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명사라고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명사의 시각에서 지난 20세기를 보면 민족사에만 초점을 맞출 때와는 상이한 역사가 보입니다. 인간들의 삶을 규정한 여러 차원의 질서에서 적잖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을 관찰하게 됩니다.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이 중요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역사의 전부가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국민국가를 건설할 주체로서 근대문명을 이해하고 실천할 능력의 인간군이 생겨나고 있었음도 식민지기에 있었던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사이지요. 민족이 분단되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주장은 관점을 돌려놓기만 하면 애당초 성립하기 어려운 주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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