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3]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대한청구권과 대일청구권) p400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한 1945년 8월 15일 당시 조선에는 6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에는 약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이후 한반도의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점령지역으로서 군사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1945년 12월 6일의 미군정법령 제33호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 남한 내 모든 일본의 재산을 미군정청 소유로 귀속시켰으며, 일본인에 대해서는 재산을 몰수한 다음 모두 일본으로 추방하였다. 북한에서도 같은 조치가 시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나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년이 넘게 힘들여 정착한 한반도에서 단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알거지가 되어 쫓겨났다.

일본은 패전국의 입장에서 이 같은 조치에 항의할 입장이 아니었으며, 1951년 일본의 독립을 결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미군정청과 소련 점령군에 의해 압수된 일본인의 재산은 이후 정부 수립과 함께 각각 남북한 정부에 이양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이 재산에 적산(적의 재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권력자들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적산불하)

패전 후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힘들여 축적한 재산을 강탈당하고 일본으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살해와 강도 행위에 대해 당시 일본은 국가 자체를 상실하고 미군의 통치를 받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고, 이후 1952년 다시 일본의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야 하나둘씩 자료를 수집해 실태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쉽게 말해 35년 간 결혼해 재산구분 없이 살던 부부가 헤어지게 된 상황과 비슷한 것으로서, 서로 주고받을 것을 공정하게 합의하고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아쉽게도 일본은 발언권을 봉쇄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일본 측에 불리한 결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국교수립을 위한 한일회담이 열렸을 때 한국 측에서는 이 같은 일본의 입장을 배려하고 일본인 학살과 재산 강탈 등에 대해서는 사죄나 최소한 유감표명이라도 해야 했으며, 우리를 조선왕조의 학정에서 해방시키고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해 문명 개화시켜 준 데 대해서 공식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런 연후에 일본인들도 인정할 수 있는 잘못을 지적하고 또한 한국인들의 잘못도 인정하여 서로 신뢰와 공감에 도달할 수 있어야만 정상적인 협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과 성과를 무시한 채 오히려 조선이 피해자라고 일방적인 주장만 늘어놓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는 한일관계가 부드럽게 풀려 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1949년 조선, 대만, 사할린 등 빼앗긴 영토의 재정처리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인 스즈키 동경대학 교수를 불러 진술을 들었는데, 스즈키 교수의 시각은 당시 일본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할 만한 것으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공감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재정 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즉 조선에 투입한 돈이 조선으로부터 유출된 돈보다 많다는 의미)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 측의 공헌에 의한다.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반출 상황, 즉 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 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적으로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이 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이들 지역(조선, 대만, 사할린)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 각국도 오랫동안 일본의 영토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1949년 일본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스즈키 동경대학 교수)

스즈키 교수의 발언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으며 패전국인 일본의 억울한 입장을 조목조목 잘 지적하고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미개한 지역을 넘겨받아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 교육하고 사회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돈을 투자해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해 두었는데, 이에 대해 감사의 인사는 못 받을망정 오히려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즈키의 발언은 사실상 패전 이후 최초로 일본 정부의 입장이 대내외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이를 스즈키 망언이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이후 일본이 독립하고 한국전쟁이 끝나자 한국과 일본은 본격적으로 정부간의 국교수립 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일청구권과 대한청구권에 대해 토의를 하던 중 일본측 대표의 발언을 문제 삼아 한국 대표단이 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이후 이를 망언으로 규정, 공식적으로 취소를 요구하는 등 트집을 잡아 이후 한일회담은 4년9개월 동안의 단절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음은 최초의 한일회담이 결렬된 회의의 발언들을 기록한 것이다.

1953년 10월 15일 일본외무성 회의실.
<제2회 재산 및 청구권 분과위원회>

구보다 간이치로 일본측 대표: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진기 한국측 대표: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구보타: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진기: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 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 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 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구보타: 한국 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 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 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후 한국 측 위원들 흥분해 각자 발언함)

홍진기: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타: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경근: 천만 엔이나 2천만 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태하: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타: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진기: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타: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 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진기: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타: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 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경근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타: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진기 : 구보타씨는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라든가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우리는 양보할 여지가 없다.
('외무성의 회의의사록에 남겨진 구보타와 한국측 대표간의 응수',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 22일자)

그 외에도 구보타 대표는 1945년 미군이 재한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60만 재한 일본인을 일본으로 내쫓은 것과 한국을 일본과 아무런 상의 없이 대일강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전에 독립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일본의 조선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결과를 가져왔다는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는 전반적으로 1949년 스즈키 교수의 연구와 진술에 바탕을 둔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보타 발언에 대해 일본국 오카자키 외무장관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한국의 변영태 외무장관은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그들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침략근성을 아직까지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함으로써 제3차 한일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제4차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57년 일본측은 구보타 발언을 '철회'했지만, '잘못'이라고는 인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구보타의 발언은 일본인 주류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 대부분이 이 같은 스즈키와 구보타의 발언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한, 한일관계는 계속해서 꼬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본 측의 시각이 보다 공정하고 논리적인 것이며, 이에 반대하는 한국 측 주류의 시각은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한쪽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중간에서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쪽이 올바른 쪽으로 입장을 수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쪽이 90% 정도 일본 측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는 한 한일 공생관계는 그야말로 연목구어에 불과한 꿈이라고 할 것이다.

[4-4] 유학생의 편지 p408

저는 미국에서 생활한지 몇 년 정도 된 유학생입니다. 나이는 허송생활을 좀 한 관계로 이십대 후반입니다만 아직도 학교에 몸담고 있습니다. 대학원 과정도 아닌 학부 과정을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저도 참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는 무엇을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걸까요. 저는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그것도 가장 많은 인종이 들끓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각 인종간, 국가 간의 오묘하고도 겉으로 함부로 들춰지지 않는 관계에 대해 많은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 대학에서 여러 강의를 듣습니다. 얍삽한 방편으로서 제가 학과수업 및 시험에서 득을 볼 수 있는 과목들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예를 들면, 아시아 국가들의 관계라던가,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중세와 근대의 일본, 근대 중국문학 등등이 있지요. 저는 한국에서 자라고 대학 2년까지 공부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인간으로써 완전한 한국 토종입니다. 고로 아시아 관계의 학과들은 다른 미국 학생들에 비해 상당한 이득을 보고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미국서 자란 아시아계 학생들보다도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이 미국 교수들이 가르치는 학과내용이 이제껏 제가 배웠던 내용과 교묘한 차이점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묘한 차이점,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한국에서 배운 역사나 정치, 사회 등의 내용과 별반 다른 점이 없습니다만, 교묘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고려시대 왜구가 창궐하여 한반도를 비롯, 중국 동부 연안 지방에까지 출현하여 양국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의 왕이 일본의 황제에게 칙사를 보내어 간청하기를 제발 왜구의 창궐을 억제해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백인 교수의 입에서 나옵니다.

사실 제가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운 것이 벌써 약 8년여 전의 일이므로 확실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대부분 맞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묘한 어감의 차이로 인해 모든 관계의 이미지 자체가 흐려지는 상황입니다. 왜구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략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후. 한국의 왕이 일본의 황제에게 운운하는 부분은 말입니다. 역시 맞는 호칭이지만, 어감으로 볼 때, Korean King 이란 말과 Japanese Emperor에서 상하 관계의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왕은 황제의 한 단계 아래란 뜻이죠. 왜구의 억제를 사절단을 보내 간청했다는 문장도 마찬가지 예입니다.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 섬을 정벌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최무선이 송나라에서 화약을 들여와 화포를 제작 왜구 소탕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백인 교수는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왜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고 말을 마쳤습니다. 이쯤 되면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한국의 왕이 대 일본 황제에게 제발 일본 해적들의 자제를 부탁했다고 그 결과 왜구가 사라졌다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왜구를 영어로는 WAKO 라고 표현하는데 교수도 누구도 뜻은 모르고 단지 일본 해적을 칭하는 말로만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개들이 정답이죠.

그리고는 한마디 끝에 덧붙이더군요. 몇 년 전 한 한국 학생이 자기 수업시간에 한 말에 의하면 한국 국정교과서에서 왜구의 침략이 250회가 넘는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여기 한국 학생 있나?" 하고 말해서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 영어 잘 못합니다.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려면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는 수준인지라 긴장이 되더군요.

"나는 한국의 정부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학생들에게 과장된 역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대뜸 묻더군요. 약 50여명 되는 학생들의 눈길이 긴장한 저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헌데 그 교수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처리되자 저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시겠죠? 왜 제가 갑자기 온몸에 휘감겨 오는 분노를 느꼈는지.

한마디로 한국 정부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겁니다. 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장해 교육시키고 있지 않다. 이차대전의 예만 봐도 알 듯이 전쟁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확인된 역사가 과장된 기록이더냐. 역사는 사실이며 과장된 교육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등등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 분노에 찬 그렇지만 조용조용 내뱉는 답변이 끝나자마자 그 백인 교수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I still think Korean Government is exaggerating the history." (그래도 나는 한국 정부가 역사를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아, 이게 웬 일입니까. 그 백인 교수의 한마디로 인해 저는 일개 일본 식민지국의 일원으로 치부되어 피해망상적인 발언을 해대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국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를 응시하던 50여명의 백인,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각종 아시안계 미국인 학생들의 머릿속에도 그렇게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아시아학 박사학위가 빛나는 백인 교수의 지식과 권위를 한 일개 유학생의 졸렬한 언변보다는 훨씬 신뢰할 테니까요. 그것도 일본 시다바리(쫄개)인 한국인인데 말이죠.

수업은 끝나고 남은 건 저의 분노와 수치감뿐이었습니다. 일본의 모든 것에 숭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편파적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을 백인 교수에 대한 분노. 내 나라에 대한 역사도 확실히 꿰뚫지 못해 미국 수업시간에 제대로 내 나라를 변론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수치감. 정말이지 그로부터 약 이주일간은 밤이면 밤마다 억울함과 수치심으로 잠을 못 이뤘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과연 진정한 애국자일까요? 아니면 극우로 치부될 수도 있는 민족주의자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지 분명한 건 저는 한국인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어찌 보면 객관성을 지닌 중간자적 입장(Neutral Position)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열린 가슴을 소유했다고도 자부하던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분들이 제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지금은 물론 피부로 느끼지 못하므로, "이런 쫌생이 같은 놈, 그러게 실력을 키우라니까" 라며 핀잔을 주시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과연 그 반 일본인 (Japanese Wannabe) 백인 교수의 수업 때문 만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극히 단편적인 일례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내나라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실추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역사를 과장하여 가르치고 있다니요.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혹자는 "아무래도 미국은 제 삼자이니까 한국이나 일본의 직접적인 역사 공방보다는 객관적인 사료와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한국 정부가 과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교수는 아시아 정세와 관계, 역사의 모든 것을 일본서 공부했습니다. 중국에 몇 번 방문하고, 한국에 한번 세미나 차 방문한 것이 일본 밖에서의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동남아 몇 개국을 관광했었다고도 하더군요.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해지십니까. 예. 당연합니다. 일본에서 일본인이 영어로 번역한 아시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인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 중심의 역사를 배우고 그걸로 박사학위를 딴 것입니다.

한 가지만 저의 사사로운 예상을 집어넣어 볼까요. 그 교수는 한국과 한국인을 싫어합니다. 왜냐구요. 자신이 공부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 일본에 항상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거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나라이니까요. 하여간 저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기말고사 전에 제출하는 10페이지짜리 에쎄이(레포트)에다가 주제인 동북아시아 중세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과 일본의 중, 근세 역사와 이해] 라는 제 나름대로의 레포트를 제출했습니다. 남아있던 제 두뇌 속의 지식을 총 동원하여 객관적으로 기술했습니다.

한가지 희망은 그 백인교수가 마지막 남은 백인 특유의 합리성과 객관성으로 제 레포트를 평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C- 라는 학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학점에 대해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통쾌함을 맛보았습니다. C- 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사명으로써 내 나라에 대한 조그마한 충성을 보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학점은 최하점을 받았지만 (C- 면 거의 최하점입니다. D 나 F 는 한 클라스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할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학기 내내 괴롭히던 억울함이 어느 정도 가셔지더군요.

게다가 또 하나 다른 통쾌함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 문제에 예기치 않게 저의 레포트에 실려있는 내용을 발췌해 만든 문제가 두 개 나와 있더군요. 과연 제가 제출한 레포트의 내용에 대해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출제문제 형식을 벗어난 엑스트라의 두 문제. 그 백인 교수는 자신의 권위와 지식이 도전 받았다고 괘씸해 한 한편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의 여부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나라에 대한 저의 슬픔을 간략하게 정리할까 합니다.

첫째, 현 상황으로는 갑자기 고치기 힘든 문제입니다만, 한국 학생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유학생들의 전공이 너무 치우쳐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경영이나 경제, 아니면 컴퓨터, 엔지니어링, 치과에만 편중되어 있다보니 순수 학문계통엔 아예 전무한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 교수와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자기네 맘대로 찢고 밟고 망가뜨려도 우린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유학생들의 전공이 심하게 편중되어 있는 상황은 그렇다 치고, 재미동포의 자녀들은 좀 다릅니다. 사실 그 수업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동포학생들이 한 2-3 명 있었습니다만, 그네들은 정말이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거의 백인 학생들과 같은 수준이라 안타깝습니다. 정작 영어에 능통하여 백인 교수들과 언쟁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국 동포학생들은 영어 능력에 비해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태니 어쩌겠습니까. 제일 슬픈 일은 그 동포 학생들은 백인 교수의 수업이 심히 편파적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그대로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 동포학생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더욱이 그런 종류의 수업들을 상당수 들어가는 와중에 말입니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 학생들은 조국이 한없이 약하고 비열하다고만 믿을 것입니다.

둘째, 한 학기가 더 지나고 어쩌다 그 편파적인 백인 교수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를 알아보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다음 학기에 대학원 과정인 아시아관계에 대한 리써치 쎄미나 수업을 하게 되었다면서 저에게 그 쎄미나 겸 수업에 참여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자신을 비롯해 모든 교수들이 겪는 어려움이 무언고하니, 일본과 중국에 관한 자료는 영어로 번역되어 연구할 수 있게끔 방대한 데이터가 있지만 한국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어서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 역시 저로 하여금 수치심을 유발시키더군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게 현실이니까요. 도대체 한국에 있는 학자 분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얼핏 들은 통계치에 의하면 일본 및 중국의 번역물은 홍수처럼 널려있는데 비해 한국의 번역물은 정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하는 그 수치스런 기사. 도대체 왜 이럽니까.

간단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똑똑한 한국 학생들, 더욱더 많이 유학을 가야합니다. 유학생이 쓰는 비용이 막대하다고요? 구더기 무서워 장 담지 마라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작자가 그따위 말이나 지껄이고 있으면서 금뱃지 달고 있습니까? 우물안 개구리처럼 안 그래도 일본보다도 훨씬 적은 국토 반으로 나눠놓고 아웅다웅하면 안됩니다. 세계로 나와서 실정을 알아야 합니다. 국내에서 소리 질러 봐야 아무도 못 듣습니다.
그리고. 학자분들. 최소한의 자료만이라도 제발 영어로 번역 좀 하세요. 쓸데없는 짓거리들 그만 하시고, 제발 자료 좀 제공합시다. 외국 교수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다지 않습니까. 걔들보고 한국말 배우라고 하라고요? 동해의 명칭이 이젠 거의 완전히 Japan Sea로 바뀌었고 세계가 인정하지요? 이러다간 정말 독도도 뺏깁니다. 내 말이 장난인 거 같습니까? 저는 정말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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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연히 서울대 국사학과의 홈페이지에 갔다가 발견한 것이다. 또 재미있는 글이 없나 하고 게시판을 훑어 내려가니 똑같은 글이 5개도 넘게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오래 전에 올린 글인 듯한데 호소력이 있었는지 여러 사람이 한두 달에 한번씩 계속해서 올려놓은 것 같았다. 이 글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본인도 말한 것처럼 이 유학생은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전형적인 한국 유학생이며, 동아시아의 역사와 관련된 수업에서 전형적인 갈등과 수치를 느낀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태를 접한 뒤 애국심을 발휘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응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 사태의 원인과 교수가 그러한 사고를 갖게 된 배경 등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의 분석과 대응방법도 현재 한국의 20대 젊은이들이 취할만한 보통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유학생의 경험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토론할만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먼저, 이 유학생이 내린 몇 가지 판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는 미국의 학자들이 한일 간의 역사를 잘못 알고 있으며 해외에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분개한다. 하지만 사실은 외국 학자들이, 혹은 일본의 학자들이 보고 있는 시각이 올바른 것이며 한국 정부와 학자들이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의 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진실과는 동떨어진 왜곡된 역사를 배우면서 터무니없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일본에 대해 뒤틀어진 지식과 감정을 갖게 된다.

이 유학생의 경우, 한국이 2차대전의 피해국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한국정부가 역사를 왜곡 과장한다는 교수의 말에 대해 그가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과 일본이 과거에 동등하거나 최소한 비슷한 국력을 지닌 존재였다고 믿으면서, 조선의 왕이 일본의 황제에게 부탁했다는 말에 들어있는 상하관계를 억울하게 여기고 있다. 이 모든 오판은 그가 한국에서 받은 잘못된 역사교육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한국은 대동아전쟁에 일본과 함께, 아니 일본인으로 참전한 전범국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피해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기뻐했으며 미국의 침략에 분개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에 불타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은 조선에 비해 훨씬 강대국이었으며 중국과 맞먹거나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조선과 비교할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과 일본의 황제라는 표현도 있는 그대로의 상하관계를 나타낸 것이니 한국인이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재팬 와나비라고 폄하한 교수도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해외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니, 한국인들만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뿐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 교수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외국인들이 그렇게 교육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유학생들이 해외에 나가 이렇게 비논리적인 억지주장을 펼치고 애국심에 불타 사태를 악화시키는 행동들을 취하게 만든 한국의 편협한 역사 교육 그 자체인 것이다. 다음에 소개할 글은 위에 인용한 글과 함께 묶여 있었던 것인데, 서로 관련이 없는 다른 유학생의 글이다. 미국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사를 인용 소개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배우며 이해하고 있을까. 여기 있는 한국사를 한 번 읽어보세요. 미국 교과서에서 그대로 옮겨온 글입니다.


The Kingdom of Korea
Korea is another East Asian with a distinctive and rich culture. For much of its long history, Korea has been dominated by stronger powers. Most often, China or Japan controlled Korean politically and influenced its culture. But the Koreans have managed to keep their own identity.
코리아 왕국
코리아는 독특하고 풍부한 문화를 가진 또 하나의 동아시아 국가이다. 긴 역사를 통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코리아는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이나 일본이 가장 빈번하게 코리아를 정치적으로 통제했고 그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켜나갔다.

1. The Early Years. The first recorded effort at political organization in Korea was made in 194 B.C. A military leader named Wiman set up a tate that came to be known as Wiman Choson. Choson lasted for approximately 80 years, until armies from China destroyed it. The northern part of Korea then became part of the Chinese Empire. From about A.D.1 to 900, Korea was divided into three kingdoms. The Chinese culture strongly influenced the kingdom in the northern part of the country. Buddhism, Confucianism, and the Chinese written language were brought to Korea during this period. Japanese culture had a greater effect on the two kingdoms in the south, which were closer to Japan.

1. 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국가는 기원전 194 년으로서, 위만이라는 장수가 위만 조선이라고 알려진 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중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대략 80여 년 간 존속되었다. 이후 한반도의 북쪽 지역은 중국 황제의 영토가 되었다. 대략 서기 1년에서 900년까지 한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국의 문화는 한반도의 북쪽에 있던 왕국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교, 유교, 그리고 중국 문자(한자)가 이 시기에 한반도로 들어왔다. 일본의 문화는 남쪽에 있던 두 왕국에 중국보다 더욱 더 강한 영향을 끼쳤다.

From the 10th through the 14th centuries, a dynasty of Buddhist rulers called the Koryo united all of Korea. (The name Korea comes from the word Koryo.) Although these kings ruled independently, they paid tribute to the Mongol Empire. During the Koryo period, in 1234, the Koreans invented movable metal type using Chinese symbols to print books. The Koryo period ended in A.D.1392. In that year, the Yi Dynasty established its rule over Korea. The Yi, who followed the teachings of Confucius, built their imperial capital at Seoul. This city served as the center of political rule for most of Korea´s history.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고려라는 이름의 불교 왕조가 한반도 전체를 통일했다. (코리아라는 이름은 고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의 왕들은 자주적으로 통치했지만 몽골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고려 시대인 1234년에 한국인들은 한자로 책을 인쇄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고려 시대는 1392년에 끝났다. 그 해에 한반도에는 ‘이’ 왕조가 들어섰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이’ 왕조는 서울에 제국의 수도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한국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A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was used to select government officials from a group of scholars trained in Confucian teachings. In this and in other ways, the Koreans continued to draw heavily on Chinese culture. But they did create their own alphabet in the 1440´s. China also gave Korea military aid. With this help, Koreans resisted Japanese forces that invaded their country from 1592 to 1598. During the war, a Korean hero, Admiral Yi Sunshin, built the world´s first iron-sided ship. With it, he destroyed much of the Japanese fleet, which was made of wood.

이씨 왕조는 유교 사상을 공부한 학자들 가운데 정부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시험 제도를 운용했다. 이 같은 방법(과거제도)과 다른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코리언들은 계속해서 중국 문화에 깊이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1440년에 자신들만의 알파벳을 창조했다. 중국은 또한 코리아에 군사 원조를 했다. 이 도움에 힘입어 코리언들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한 일본인들에 저항했다. 이 전쟁에서 코리언의 영웅인 이순신 제독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제작했다. 이 배로 그는 나무로 만든 일본 함대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Explain: Early Korean history was shaped by the Koryo and the Yi. 설명하시오: 고대 코리아의 역사는 고려와 이씨 왕조에 의해 성립되었다.

2. The Manchu Influence. The war with the Japanese exhausted the Koreans. As a result, new invaders from Manchuria easily conquered the whole country in the 1630´s. The Manchus then went on to seize control of China. In Korea, while the Yi rulers remained on the throne, they were subject to the Manchu government. Korea, following China´s lead, isolated itself from the rest of the world. European sailors who became shipwrecked in Korea were usually held prisoner. In 1669, eight sailors escaped from Seoul after 13 years of captivity. When one of the sailors, Hendrick Hamel, returned to Holland, he wrote a book about his experience. This book gave the Western world its first description of Korea.

2. 만주족의 영향. 코리언들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지쳤다. 그 결과, 1630년대 만주에서 온 새로운 침략자들은 전 국토를 쉽게 정복했다. 그런
뒤 만주족은 계속해서 중국을 정복해나갔다. 코리아에서 ‘이’ 통치자들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만주족의 정부에 복속되었다. 코리아는 중국의 지도 아래 그 밖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다. 난파되어 코리아에 표류한 유럽 항해사들은 보통 감옥에 수감되었다. 1669년, 8명의 항해사들이 억류된 지 13년 만에 서울에서 탈출했다. 그 중의 한 명인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그가 경험한 것들을 책으로 썼다. 이 책은 서양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코리아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After 1860, Western nations and Japan tried to force the Koreans to open their ports to trade. The Koreans resisted all such attempts. At the same time, the rivalry between China and Japan over Korea grew. Both wanted control of rich resources in Korea, such as minerals and timber. In 1876, the Korean government finally gave to Japanese pressure. A trade agreement was signed, opening up several Korean ports to trade. Soon, other nations, such as the United States, Great Britain, and Russia, signed treaties with Korea. Russia, a neighbor of Korea, was, like Japan, especially interested in Korea´s resources.

1860년 이후, 서양의 나라들과 일본은 코리언들에게 항구를 열고 무역을 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코리언들은 그러한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같은 시기에 코리아를 대상으로 한 중국과 일본의 경쟁이 심해졌다. 두 나라는 광물이나 목재 같은 코리아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다. 1876년, 코리아의 정부는 결국 일본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무역협정이 맺어졌고 몇몇 항구가 무역을 위해 개방되었다. 곧이어 미국, 영국, 러시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도 코리아와 조약을 맺었다. 일본처럼 한국의 이웃 나라였던 러시아는 특별히 한국의 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The Manchu government in China resented the growing Japanese influence in Korea. The Manchus attempted to take firmer control of Yi affairs. This conflict between China and Japan let to a brief war in 1894 in which the Chinese were defeated. At the end of the war in 1895, China recognized Korea´s independence. Japan had ended the Manchu influence in Korea.

중국의 만주족 정부는 코리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만주족은 이씨 조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충돌로 인해 1894년 짧은 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은 패배했다. 전쟁이 끝난 뒤 1895년 말, 중국은 코리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일본은 이렇게 코리아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를 종식하였다.

Prove or Disprove: Korea was greatly influenced by competition between China and Japan. 입증 혹은 반증하시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경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3. Japanese Rule. After the defeat of China, the Japanese began to force a number of reforms on the Yi government. The Russian began to aid the Koreans against the Japanese. Russia wanted control of Korea. Japan wanted Russia out of Korea. The two powers went to war in 1904. To everyone´s surprise, the japanese defeated the Russians on land and sea. In 1910, Japan annexed Korea and ended the Yi Dynasty. Korea became the largest possession in the Japanese Empire.

3. 일본의 통치. 중국을 물리친 뒤 일본은 이씨 정부를 개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에 러시아는 일본에 반대하는 코리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리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를 원했으며 일본은 러시아를 코리아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이 두 열강은 결국 1904년 전쟁으로 맞붙었다. 놀랍게도 일본은 육지와 바다에서 러시아를 격파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고 이씨 왕조를 끝냈다. 코리아는 일본제국의 가장 큰 해외 영토가 되었다.

Japanese rule was harsh. A governor-general directly responsible to the Japanese emperor administered Korea. Freedom of speech and the press and other rights were denied to the Koreans. Schools had to teach the Japanese culture and language and ignore the heritage of Korea. The Japanese used their new colony as a place to raise rice to feed the people of Japan. Japanese business were encouraged, while Koreans were discouraged from engaging in such business. The Japanese also established military bases in Korea to aid further conquests in Asia.

일본의 통치는 가혹했다. 일본 황제의 대리인인 총독이 코리아를 통치하였다. 코리언들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비롯한 다른 권리들을 가질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야 했고 코리아의 역사는 무시되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를 일본국민을 위한 쌀 생산지로 이용했다. 사업활동에서 일본인은 많은 혜택을 입었지만 코리언들은 그와 같은 사업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일본은 또한 아시아의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코리아에 여러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In some ways, the Koreans benefited from Japanese rule. The communication and transportation systems were greatly improved. Modern business techniques used by the Japanese helpe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Korea. The advanced educational system that the Japanese established trained many of Korea´s leaders. Korea did not become an independent nation again until 1945, after the defeat of the Japanese Empire in World War II. Even today, Korea continues to be influenced by stronger nations, especially China, Japan, and the United States.

몇몇 측면에서 일본의 통치는 코리언에게 혜택을 주었다. 통신과 운송 시스템에서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일본인에 의해 도입된 현대적인 산업 기술들은 코리아의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 의해 도입된 고등 교육 시스템은 많은 코리아의 지도자를 배출해내었다. 코리아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한 1945년까지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다. 오늘날에 와서도 코리아는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Give two examples of the harshness of Japanese rule. 일본 통치가 가혹했던 사례를 두 가지 쓰시오.
List two ways in which Japanese rule helped Korea. 일본 통치가 코리아를 도와준 두 가지 측면을 나열하시오.

후--------. 보셨나요. 저 지금 한숨 밖에 안나옵니다. 이러니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 대해 호감을 가질까요? 동양의 대표적 문화라면 중국과 일본만이 나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과서는 아예 한국 역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역사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지요. 저도 외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 역사가 왜곡이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하고 일본의 똘마니였다니.

다행히 역사 선생님과 이야기가 잘 돼서 우리 class는 이 역사를 배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른 부분(중국이나 일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이 지금의 평양 정도까지 그려져 있고,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영토로 되어있는 등 이쪽 부분에도 많은 수정이 필요하더군요. 앞에서 보셨듯이 고대사 연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 분발합시다! 이 자료가 우리나라의 역사 회복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 교과서에서 인용했다는 이 짧은 글은 한국의 역사를 실제보다 잘 평가해 준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한글창제, 이순신의 철갑선 등에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한국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나름대로 찬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유학생은 굉장한 불만을 가진 듯하며, 이런 역사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한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역사 선생에게 압력을 가해서 자기 학급에서는 이 역사를 배우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거품을 물고 분개했으면 선생이 교과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갔을까 싶다.

이 유학생은 위의 한국사에서 어느 부분이 불만인지를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았지만, 짐작해보건대 그는 고조선의 역사를 80년이라고 한 부분과, 삼국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영향, 조선이 만주족의 속국이었다는 부분, 일본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표현 등에 분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에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조라고 불릴만한 정치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외국에서는 위만조선과 삼국, 고려 등 여러 왕조가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이 아니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것도 사실이니 한반도를 명, 청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조선이 독립국이었던 것처럼 가르치는 한국의 교과서가 이상한 것인데, 이 점을 유학생들은 자주 착각하는 듯하다. 그는 우리가 일본의 도움으로 1897년에서야 처음으로 독립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대해서도 위의 한국사는 일제통치의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탄압한 것은 초기 10년뿐이며 그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헌법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당연히 일본과 똑같은 수준의 출판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합병해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쌀도 국내 가격보다 높은 값으로 일본에 수출한 것이지 그냥 가져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에 불리하게 기술된 교과서에 대해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은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분개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한국에서 배운 것과는 딴판이니 당연한 반응이라 하겠다.

이상 두 유학생의 글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의 역사 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진실을 왜곡하고 있으며 국제 수준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인해 더 이상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 같은 고통과 수모를 당하지 않는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애국심으로 불타 배운 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이 젊은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 할 것인가.

[4-5] 일본 정신과 야스쿠니 신사 p425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부럽게 여겨지는 것이 일본의 종교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강한 민족 정체성이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미개한 사회일수록 종교가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데, 인류가 점차 미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서유럽과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는 교회라는 것이 결혼식과 장례식 때에만 찾는 장소가 되어 평상시에는 술집이나 여관으로 영업하면서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이나 동유럽 등지에서는 아직 종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인데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이 백인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도와 이슬람 세계처럼 아직도 고대 종교가 현실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사회들은 종교로 인해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그 결과로 대중들이 종교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대체로 종교라는 것은 사회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며 종교의 영향력이 강할수록 미개한 사회로 남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명제에서 예외적인 민족으로 생각되는 것이 유태인과 일본인데 이들 민족에게 있어서 종교는 구성원 집단에게 일체감을 주고 공동체의식을 유지해주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유태인들의 경우 종교는 자체로 민족의 역사이며 그들이 유일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 방랑하는 동안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스스로 생존, 발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일본의 주된 종교는 신토인데, 이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성황당과 사당에 절이 합쳐진 듯한 것으로 조상숭배와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등이 혼합되어 일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였다. 신토의 뿌리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이다. 그래서 신사에 따라서는 어떤 신물을 가미(神)로 모시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일을 한 조상, 즉 뛰어난 무사나 학자, 장인의 혼령을 가미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국가주의가 득세하면서 모든 신사를 국가가 주관하기 시작하였고 천황을 모든 가미의 정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즉 이 시대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으나, 패전 이후 히로히토 천황의 인간선언(1946년 1월)과 평화헌법의 제정으로 인해 국가신토는 힘을 잃고 다시 원래의 신토로 복귀하였다. 신토에서 섬기는 가미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유일신이 아니고, 고대 그리이스에서 숭배했던 인간을 닮은 신도 아니다. 인간에 깃들어 있다가 육체를 떠난 혼령, 또는 애초에 영혼을 갖지 않은 존재에 내재해 있는 정령 같은 것이 가미의 개념이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일본의 신토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종교라고 생각된다. 신토에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오면서 다양한 외래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고 뒤섞이면서도 지금까지 그 뿌리를 지키고 있는 신비함이 있다. 신토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이 있고 사람들은 그 신이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함으로써 다시 혼탁한 사회에 나가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게 된다.

그러나 신토에서 경배하는 신은 다른 미개 종교와 달리 자연물이나 유일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 그것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훌륭한 조상인 것이다. 이것이 신토의 가장 큰 장점이다. 누군가 유교와 불교, 범신론, 샤머니즘 등에서 좋은 점만을 골라 이상적인 종교를 만든 것도 아닌데 신토에는 이 같은 장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를 한국의 유교와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제사는 죽은 모든 조상을 대상으로 한다. 살아있을 때 제아무리 못된 사람이었더라도 상관없이 죽기만 하면 누구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 같은 유교의 제사는 낭비를 조장하고 쓸데없이 후손들을 번거롭게 만드는 미개한 관습이다. 자기의 직계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배하기보다는 사회에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만을 대상으로 사당 같은 것을 만들어 공경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신토는 이 같은 점에서 독보적이다.

대체로 인류가 만들어낸 종교라는 것은 도그마, 이데올로기, 아집과 편견, 터부 같은 부정적인 관념의 집합체로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로이다. 따라서 사람이 교육을 받아 자연을 이해하고 이성이 냉철해질수록 종교는 설 땅을 잃게 되는 법인데, 일본의 신토는 그와 같은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희생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 위인들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 이것은 이상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회나 이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국가가 국립묘지를 만들고 국가유공자 제도를 만들어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희생한 사람의 후손을 보살피는 등 정치적인 대안을 마련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처럼 국가주의와 프라이드가 강한 나라에서는 국립묘지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종교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국립묘지와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신토는 국립묘지와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듯한 이상적인 종교인 동시에 사회 보상시스템인 것이다.

굳이 종교에 등급을 부여해보자면, 하급 종교에는 해나 달 혹은 힘센 동물들을 섬기는 원시 종교, 즉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 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고 자연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물 대신 인간과 비슷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신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중급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바다의 신, 태양의 신 따위가 등장하는 고대 그리이스의 종교나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과 기독교, 사람 모양을 한 수천 개의 신이 있는 힌두교, 우리나라의 유교 같은 종교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과 인간이 해탈하면 신이 된다는 불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조선의 동학(천도교) 등은 보다 발달된 상급 종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상급 종교들의 장점만을 모아 성립된 것이 일본의 신토인 것이다.

한국 사회는 하급에서 중급, 상급 종교들이 모두다 영향력을 지니고 존재하는 특이한 사회다. 한국인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가 하면 부적도 붙이고, 아직도 시골에는 성황당이 있는 곳도 많다. 풍수지리와 사주팔자도 믿는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와 천주교, 유교 등의 위세도 대단하며 천도교나 불교 같은 상급 종교들도 번창하는 곳이 한국 사회다. 반면 신토는 상급 종교들의 정수만을 모아 탄생한 것이기에 일본 사회에는 이 같은 중하급 종교들이 전혀 침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8만개의 신사 가운데 현대 일본 정신의 정수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여기에는 일본 현대사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존왕혁명파,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 희생당한 전사자, 그리고 대동아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 등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상 246만 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다른 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인데 이상하게도 패전 후 일본에서는 수상이나 정부각료가 이곳을 참배하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다. 참배할 때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 수상이 공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나카소네 수상이 유일무이한 사례였으며, 2001년 8월에 고이즈미 수상이 두 번째로 공식 참배를 했다.

수상이 국립묘지를 참배하겠다는데 시비를 거는 주변국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이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일이다.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어서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인데, 그게 다른 나라가 보기에 전범이지 일본 입장에서는 모두 애국자들이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이 국립묘지 참배하는 행위를 놓고 베트남 정부에서 항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자기나라 국민을 학살한 전범들이 국립묘지에 묻혀있으므로 이해할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국가의 명령을 받고 타국 땅에 가서 희생한 군인들이고 월남전으로 인해 경제발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들을 애국자로 대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하고 전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당시 일본이었고 조선인들도 누구나 일본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굳이 따져 말하면 전범국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막상 일본과 전쟁을 한 당사자인 미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관련도 없는 한국과 중국 등이 시비를 거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조선출신 일본군 2만 명과 중국 및 대만출신 일본군 2만 명의 위패가 있다고 한다. 일본과 조선의 인구비가 5대3인데 전사자의 숫자는 1%에도 못 미치는 것을 보면 당시 일본이 얼마나 양심적으로 전쟁을 치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2만 명의 조선출신 일본군 전사자들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위패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일이다. 전사시점에서 일본인이었고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므로 그 영혼을 기리는 것은 당연히 일본의 권리다. 일본 정부는 신토의 교의상 일단 가미(신)가 되면 인간이 넣고 뺄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데, 참으로 애틋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일본이 이들 조선출신 전사자의 위패를 한국으로 보내준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인가?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을 위해 싸운 전쟁 범죄자라고 욕하며 부관참시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위패를 돌려달라는 유족들은 자기 조상이 일본에서 신으로 경배 받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불쾌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4-6] 가미카제의 후예들 p432

가미카제만큼 일본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용어도 드물 것이다. 가미카제는 神風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과거 13세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두 차례나 연합함대를 구성, 상륙을 시도했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그것이 일본을 지켜준 바람이었다고 신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려몽 연합함대를 괴롭힌 것은 지금의 태풍인데,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기록된 함대의 출발 장소가 지금의 홍콩 근처인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은 필리핀 북부나 대만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미카제를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 공군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름이 갖고 있는 신비함 때문인지 수많은 일본 청년들이 이 특공대에 자원, 미국의 군함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당시 사망한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1030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은 11명이었다고 한다. 비록 1%에 불과했지만 이는 태평양전쟁이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음을 상기시켜준다.

4시경 나는 만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 있었다. 거대한 함대가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섬뜩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돌연 짙은 검은 구름이 선단을 덮기 시작했고, 멀리서 울리는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구름은 대공포화 연기였다. 곧이어 반점 같은 것 몇 개가 하늘의 이 구석 저 구석으로부터 연기구름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우리의 자폭기들이었다.

"가미카제 공격이다." 난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이 달려왔다. 까만 반점이 연기 속에서 날아들었고, 뒤이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공격은 10분간 계속되었다. 차츰 연기는 걷혔고, 나는 멀리 몇 척의 선박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어슴프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공격이 꼭 필요한 것일까? 나는 자문하였다. 저 큰 함대 속에서 배 몇 척을 격침시키는 것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일까? 자원을 했건 안 했건, 그들과 그들의 부모는 다 같이 이 무모한 전쟁의 희생자인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고급장성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저주스럽고, 가장 치졸한 짓이야!" 한 병사가 분개해서 말했다. (일본군 하사관 오가와 데쓰로. 필리핀 루손섬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는 위의 병사가 있었던 필리핀 방어전에서 처음 선을 보인 뒤, 1945년 초 오키나와 방어전에서 대부분의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호주군과 함께 과달카날 상륙작전을 거쳐 뉴기니를 탈환하고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등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오키나와가 점령되면 여기에서 출격한 미국의 폭격기들은 곧바로 일본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일본은 오키나와 방어에 총력전을 전개했다.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잔혹했던 전투로 기록된 오키나와 점령전은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 해병 2만 명이 전사했고 오키나와 섬의 건물 90%가 파괴되었으며 오키나와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으니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은 전투였다.

당초 가미카제 특공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잡는 것이었다. 비록 항모를 격침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는 30척 이상의 미국 전함을 침몰시키고 300척이 넘는 전함을 파괴하는 엄청나나 성과를 거뒀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자살공격은 당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서양인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 가미카제는 영어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칭하는 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아유 워너 비 어 가미카제?'라고 하면 무모한 일을 하다 죽고 싶냐는 뜻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와 비슷하지만, 약간 더 강한 의미를 지닌 용어라고 하겠다.

루손 섬에 있던 위의 일본 병사가 말한 것처럼, 100% 죽음이 확실한 자살공격으로 조종사들을 몰아넣는 것은, 전쟁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젊은이들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치졸한 짓이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어차피 생명을 단순한 숫자로 계산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이며,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부하들을 서슴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결단력이 전쟁지휘관의 미덕인 것이니 가마카제에 대해 휴머니즘의 잣대를 갖다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비록 서양인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겠지만 이 가미카제의 정신은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일본 특유의 미덕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2001년 5월 일본에서는 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이야기를 담은 '호타루'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끌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 일본공군의 소위로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전사한 조선인 김선재와 살아남은 특공대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김선재가 출격 전날 식당에서 고향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고 이를 듣고 있던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나 한국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 탓에 많은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다.

스스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산화한 김선재 소위처럼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 가운데에는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면서 자발적으로 일본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비록 다른 나라로 갈라졌지만 이 같은 사실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이즈미는 스스로 가미카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고향은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인데, 이곳은 과거 가미카제 특공대의 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그는 자주 이곳에 들러 특공대원들의 글을 읽고 그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고이즈미는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이처럼 가미카제의 후예인 고이즈미가 일본을 이끌어 가는 수상이 된 후 그들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웃으로서, 과거 대동아 전쟁에 참여해 함께 싸웠던 우리가 이 같은 일본의 행사에 박수를 쳐 줄 수도 있는 것이니 오늘날 이를 항의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고이즈미는 과거 무능했던 일본 총리들과는 달리 가미카제의 후예답게 용기 있고 과단성 있는 정치인으로서, 일본 유권자들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고이즈미가 이끄는 자민당에 절대다수 의석을 몰아줌으로써 고이즈미 개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고 있는 토니 블레어, 미국의 10년 호황을 이끈 빌 클린턴에 이어 일본도 드디어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은 것일까. 아직도 늙은이들의 손에 휘둘리며 구태의연한 낡은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볼 때 일본의 이 같은 변화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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