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9] 아, 일진회 p364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방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개혁세력 사이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던 것이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조선의 모든 혁명단체가 연합하여 조선 왕조 및 수구 반동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과 연대 아래 조선혁명의 과제인 문명개화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대의 근대적인 대중 정치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서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사이비 단체인 것처럼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한 예로, 어느 백과사전에서 일진회에 대한 항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일진회 : 1904년 일본이 고문 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

설립연도: 1904년
구분: 친일단체
소재지: 서울
설립목적: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 대한제국 탄핵 문제 제출

한국에서 만들어진 역사책이나 국사 교과서들은 일진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혹 언급한다 해도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해 만든 단체라는 식으로 간단히 기술한 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일진회는 20세기 초 조선혁명을 위해 모든 혁명세력이 연합해 결성한 역사상 최대의 정치 조직이며 수십만 혁명가들의 결사체로서, 이들의 희생을 딛고 비로소 조선혁명은 완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니 일진회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한국 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진회의 원래 이름은 유신회였다. 1898년 고종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지도부와 조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발동되자 당시 모든 혁명세력은 지하로 잠적 할 수밖에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믿고 개화파를 죽이고 독재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동반도에서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가 조선에 흥미를 잃고 썰물 빠지듯 물러가자 자연히 조선 정계에서는 다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특히 일/러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조선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조선에서 고종과 친러파 등 수구 세력의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고종의 탄압을 피해 일본 등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던 개혁파들은 일본군을 따라 하나둘씩 귀국하여 유신회라는 이름으로 독립협회를 재건하였다. 유신회는 그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국가체계를 개조,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04년 8월 18일 창립된 유신회는 이틀 뒤인 8월 20일 일진회로 이름을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 단체는 다음과 같은 4개 강령을 제정하였다.

1. 왕실의 존중
2.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3. 시정의 개선
4. 군정 및 재정의 정리

일진회는 이후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솔선해 단발과 양복차림으로 외모를 바꿈으로써 회원들에게 개화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진보회> 라는 단체가 등장하여 전국 조직을 갖추며 무섭게 성장해 나갔다. 역시 일진회와 마찬가지로 시정개선(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이 단체의 회원들은 머리를 서양식으로 자른 뒤 검은 옷을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뜨였다.

진보회는 생겨나자마자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 1904년 말이 되자 그 회원이 38만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제국 정부는 처음에는 진보회의 정체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것이 동학당의 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 동학군과의 전쟁에서 일패도지, 수도 함락까지 각오해야만 했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힘을 빌어 간신히 동학군을 물리친 정부는 2세 교주 최시형을 죽이고 수년 동안 혹독한 토벌을 감행, 동학당의 씨를 말려왔다. (조선관군들은 사람들이 보는 길에서 산사람들의 눈을 뽑고 혀를 잘았다고 함, 이들의 비명 때문에 농민들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함)

그런데 그 동학당이 정부개혁과 국정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일어선 것이었다. 진보회의 정체를 파악한 대한제국 정부는 즉시 군대를 동원해 진보회를 탄압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도 진보회 토벌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수구세력의 본격적인 탄압에 직면한 진보회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민중조직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일진회는 진보회에 대해 통합을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구 독립협회의 개화파와 동학교도들은 하나로 뭉쳐 진보 세력의 통일전선을 수립하였으며, 이들은 새로운 통합조직의 이름을 일진회로 하였다.

개항 이래 줄곧 조선의 유신을 후원해왔던 일본은 조선 혁명세력의 거대조직이 출범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조선에서 동지를 얻게 되었다. 일본은 일진회를 토벌해달라는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이로써 1870년대 이래 3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조선 혁명운동은 비로소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지식인 혁명가와 민중조직, 그리고 일본 등 3대 혁명 세력이 처음으로 한데 뭉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조선 혁명운동은 정당성과 물리력을 모두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조선이 개항한 이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는 크게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5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이 번번이 좌절 됨으로서 조선은 세계의 흐름에서 뒤쳐지게 된 것이다.

임오군란은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군인들이 일으킨 무장봉기였으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탓에 아무런 계획도 비전도 없었고 특히 지도부가 없었다. 이들은 민씨 척족 몇 명을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중심인물인 민비를 살해하는 데에는 실패함으로써 이후 청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잘 조직된 지식인 계층이 소수의 군대와 일본군의 지원을 업고 시도한 쿠데타였으나 기층 민중 조직의 지원을 받지 못한 데다 청군의 무력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 농민군은 강력한 기층 민중 조직과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지도부의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진해 개화당 등 지식인 그룹과 연대하지 못했으며 무조건 일본을 배척하는 잘못된 노선을 선택함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일/청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어 추진된 근대화 개혁이었으나, 일본이 3국 간섭으로 고립되자 고종과 민비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조선의 혁명가들은 1895년 민비를 죽이고 다시 고종을 인질로 잡아 갑오개혁의 정신을 이어가려 했으나 이 마저도 아관파천으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가 처한 절대절명의 과제는 시민혁명, 즉 낡은 절대군주제와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법과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세우는 일본식 유신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부르주아 계급이라 불릴만한 세력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고 시장경제와 화폐 시스템, 무역 등 경제발전의 정도도 매우 낮은 낙후된 미개 사회였다.

따라서 조선의 시민혁명은 자체 역량으로는 수행될 수 없었고, 조선의 문명개화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조선에 우호적인 외부세력의 후원이 있어야만 달성될 수 있는 과제였는데, 이 같은 외부의 마땅한 후원세력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개항 이래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던 집단으로는 동학, 개화당, 일본 등 3개의 세력이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수구 세력은 왕실과 양반계급 및 청, 러시아 등이 있었다. 동학은 올바른 사상에 의해 지도된 민중세력이었고 개화당은 지배계급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각성된 애국 지식인 집단이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 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무역을 하고 일본 열도에 대한 ''공격적인 방어'' 지역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힘없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로서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책이었다.

이 3개의 혁명세력은 1개, 혹은 2개의 세력이 연합해 간헐적으로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3대 세력은 점차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4년에 와서야 동학의 후신인 진보회, 독립협회와 개화당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일진회, 그리고 새로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 등 3대 세력이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해 손을 잡게 된 것이다.

통합 일진회로 인해 일본은 조선 내부에서 강력한 지원 세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국제적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일진회는 일본과 연합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룩하려 했으므로 이들의 결합은 이상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가르침을 내걸고 생겨난 동학은 신분에 귀천이 없는 세상을 추구했으므로 조선의 계급사회로서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동학이 세를 펴기 시작하자 조선 왕조는 잔혹한 탄압을 펼쳐 교주인 최 제우를 살해했고 그 결과 동학농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난이 진압되고 2세 교주인 최시형 마저 처형 당하자 손병희가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손병희는 1861년 충청도 청주에서 서자로 태어나 양반들의 가혹과 멸시를 받으며 자라난 인물이다. 1882년 22세 되던 해 동학에 입도한 뒤, 7년 뒤에는 최 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북접 의통령으로서 동학군을 지휘해 전투를 벌였고 전쟁에 패하자 은신 생활을 하였다.

그 뒤 2대 교주 최시형 마저 체포되어 참수당하자 1897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이후 동학에 대한 조선 왕조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이에 손병희는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 1901년 상하이를 거쳐 일본 동경으로 갔다. 거기에서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혁명가 박영효를 비롯해 오세창, 최인 등 개화당의 인사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는 우연히 찾아온 천금 같은 만남이었으며 조선의 개혁을 위로부터 추진했던 개화당과 아래로부터 추진했던 동학이 망명지인 동경에서 서로 조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사건이었다. 손 병희는 1904년 일본에서 만난 개화 인사들과 함께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애국단체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손병희는 일/러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3년 권동진, 이용구 등을 국내에 들여보내 전국의 동학조직을 진보회 조직으로 재편하고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검은 옷을 입도록 했다.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추진한 유색옷 입기와 단발은 조선유교 사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근대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으며 또한 실용주의 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의 유교 규범은 평상복으로 흰색만을 강요하여 백성들은 때가 잘 타고 빨래도 힘든 흰색 옷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또한 긴 머리를 감아올린 상투는 비위생적이며 평소 수많은 기생충(이)의 온상이 되어 조선의 남자들은 머리에 하얗게 서까래가 끼어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동학당은 1894년의 전쟁 이후 10년 동안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인해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2세 교주 최시형이 처형 당한 것을 비롯해, 동학 교도는 물론 그 들과 친분이 있는 사실만 드러나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탄압을 피해 은거해 있던 동학의 지도부는 서재필, 이완용, 이승만 등 독립 협회파가 주도한 1898년의 시민혁명이 고종과 수구파의 탄압으로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들 지식인 혁명가 그룹은 물론 조선혁명의 후원자인 일본과도 연합하는 것만이 동학의 생존과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손병희의 대리인 자격으로 진보회를 조직한 이용구는 갑오 농민전쟁 당시 논산에서 동학군 5만을 지휘했던 남접 의통령으로서, 손병희가 교주로 취임한 뒤에는 동학의 2인자가 되어 손병희를 그림자처럼 호위한 군사 지도자였다.

이 용구는 1903년 말 몰래 귀국하여 그동안 수구세력의 잔혹한 탄압으로 붕괴한 동학 조직을 진보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 용구는 조선 정부의 학정을 공격해 조선혁명의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고 이 과정에서 진보회의 조직은 순조롭게 성장하였다.

1904년 10월에 이르자 색옷을 입고 단발한 진보회원은 전국에 30만 명으로 늘어났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904년 말이 되자 창립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진보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13개도에 지부를, 360여 군에 지회를 가진 명실상부한 전국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조직 이었으며 독립협회 이후 최대의 민간단체였다. 진보회는 교주인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일/러 전쟁 기간 중 5만 여 명의 동학교도를 동원해 일본군의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와 군수품 수송을 도와주었다.

또한 러시아 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정보원을 한반도와 만주 각지에 파견, 적의 동태를 감시함으로써 일본군의 눈과 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러 전쟁은 개화당과 동학, 일본의 3각 연합이 그 연대를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일진회의 지도부는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과의 합방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를 결심하게 되었다. 1904년 말, 일/러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해 12월 26일 진보회와 일진회는 합동 총회를 열고 13도 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을 각각 선출하였다.

1년 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 등을 지도부로 선출하였고 일본인 <모치츠키 류타로> 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윤시병과 홍긍섭은 과거 독립협회의 간부로서 1898년 시민혁명에 앞장섰던 개화운동가이고 송병준은 민씨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일/러 전쟁 당시 일본군의 통역이 되어 귀국한 인물이었다.

일진회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정부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방침이 알려지자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하라'' 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여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원하였다.

1905년 드디어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1906년 3월2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던 날, 일진회는 남대문에 <환영> 이라고 쓰인 거대한 현수막을 내걸고 이토의 부임을 환영하였다.

일찍이 1880년대 일본의 시민혁명과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일본의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되어 일본의 시민혁명을 조선에 이식하는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토에 의해 비로소 조선의 선각자들이 오랜 세월 고대하였던 유신의 과업이 시작됨으로써 조선은 근대사회로 가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1907년 조선에서는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국채 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나라의 외채를 국민의 성금을 거둬 갚자는 소동으로서, 당시 고종의 학정으로 인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조선 인민의 입장에서는 실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소동이었다.

이에 대해 일진회는 1907년 5월 2일 정부탄핵 문제를 제출하여 국채 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백성의 고통과 모든 부작용이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고종과 그를 둘러싼 수구세력의 무능력과 비도덕성을 공격했다.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물러나고 한국 군대에 대해 해산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반발한 일부 군인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면서 서울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한편, 이어 전국 각지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반일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 수구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군과 일진회의 혁명가들은 의연히 내전에 임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일진회원들이 희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불에 탔으며, 반혁명 세력의 공격으로 전국의 많은 지부 건물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의 이홍장과 함께 세계 4대 정치가의 하나로 추앙 받던 이토 히로부미가 테러리스트 안 중근에게 피살된 지 1달이 지난 1909년 12월 4일, 일진회는 마침내 대한제국 2천만 국민을 대표하여 1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역사적인 성명서는 한일 합방 상주문이라는 제목으로 순종에게 보내어지고 내각에게는 한일 합방 의견서라는 제목으로 전달되었으며, 대내외에는 한일 합방 성명서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인민을 편안히 하며 동궁을 보도하여 우리 한국에 노력을 다한 것을 가히 잊기 어렵 거늘 의외의 하얼빈 변사를 일으켜 일본 전국의 여론이 비등하여 대한 정책에 근본적 해결을 주창함이 어떠한 위험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음도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 취함이니.... >

우리 황제폐하와 대일본 천황폐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단(一團) 정성으로 애소하여 우리 황실의 만세존숭(萬世尊崇)하는 기초를 공고히 하며 우리 인민을 일등 대우하는 복리를 향유하여 정부와 사회를 더욱 발전시킬 것을 주창하여 하나의 큰 정치 기관을 설립할 지면, 우리 한국의 보호, 열등(劣等)에 있는 수치에서 벗어나 동등 정치에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는 법률상 정합방(政合邦)이라 일컫는 문제이다....

오호라! 이를 다행히 성립하여 두 날개가 같이 날며 두 바퀴가 같이 구르는 정치 범위 아래 살고자 원하되 삶을 얻지 못하고, 죽으려 하되 죽음을 얻지 못하는 우리 2천만 국민은 노예된 모멸에서 벗어나며 희생된 곤고(困苦)를 면하고 동등한 오열(伍列)에 한 번 새로이 회생하여 여지를 확립하고 전보를 시진(試進)하여 실력을 양성하면 전도의 쾌락을 향유하고 훗날의 활약을 가히 얻을 수 있음은 명확한 바이다. ....>


이 성명서는 내용이 내용인 만큼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해 본뜻을 숨기고 문장을 늘어뜨려 표현하고 있어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지만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이 일/청 전쟁을 통해 조선을 독립시켜주고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에 먹히게 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이것을 고맙게 여기기는 커녕 이 나라에 붙었다 저 나라에 붙었다 하다가 필경은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 역시 헤이그 문제를 일으킨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이등박문 태사가 백성들을 보살펴주고 태자를 이끌어주며 우리 조선을 위해 수고를 다한 것은 잊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하얼빈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이제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이 또한 우리 조선 사람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천황 폐하는 너그럽고 어진 마음과 큰 도량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형제처럼 어루만져주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일에서 신의를 잃고 있다. 지금 한국은 환자에 비유하면 이미 목숨이 끊어 진지 오래된 시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최근 해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본인이 1만명이 넘는다. 이대로 가면 조선은 일본 천지가 되고 조선인은 일본인의 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보호 받는 열등 국민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일본과 합쳐 세계 대제국을 만들어 세계의 일등 국민으로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보자. 이것이 조선 민족이 사는 길이며 황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같은 일진회의 주장에 대해 당시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은 일진회의 합방 상주문을 순종에게 올리지 않고 감추는 한편, 일진회의 합방 주장을 규탄하는 국민대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이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한일 합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정부와 언론기관에서도 일진회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일진회의 주장이 조선 민족이 생존해나가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방안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진회의 합방노선은 점차 조선내부의 대세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합방론에 반대했던 이완용도 이 성명서가 발표된 며칠 뒤, 이재명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입장을 바꾸어 한일 합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처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초지일관 조선혁명을 위해 올바른 노선을 지켜온 일진회는 1910년 9월 한일 합방 직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산 됨으로써 그 소임을 다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이용구 등 일진회의 지도부는 조선총독부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당시 테라우치 총독으로서는 이처럼 강대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정치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통치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해산하도록 한 것이다.

[3-10] 조선의 흡수합병 p377

>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 것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테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이 전권위원은 회동 협의한 뒤 아래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협정하였다.

1.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2.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인한다.

3.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태황제폐하(고종), 황태자폐하와 그 후비 및 후처(부인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그 부인들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작(귀족의 지위)을 수여하고 또 은금(하사금)을 준다.

6. 일본국 정부는 위와 같은 병합의 결과로서 모든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일본국에 여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 증거로 두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하는 것이다.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테라우치 마사타케

1905년의 보호조약으로 성립한 통감정치 이후 대한제국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겨 사실상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합병에 관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신속히 합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본 정부안에서 일어났으나 이토는 합병에 반대하면서 보호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토는 한일합병으로 야기될 수 있는 국제여론의 비난과 그에 따른 일본의 고립을 우려하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는 한일합병을 최소한 수십년 정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합병 방침이 결정되자 일본은 그 정비작업으로 1910년 6월 30일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인수한 뒤, 7월 12일에는 '병합 후의 한국 통치방침'을 마련해 이토의 뒤를 이어 새로 조선통감이 된 테라우치가 이를 갖고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일병합 공작을 전개하였다. 8월 16일 테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대신 조중응을 통감관저에서 만나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논의하고, 8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회의는 이 안건을 승인하였다. 8월 22일 순종 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는 최종적으로 한일합병안을 승인, 이완용과 테라우치가 도장을 찍어 조인하였다. 이로써 역사적인 한일합병이 성립되었다.

합병조약의 조인 사실은 1주일 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국내외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조선은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조약의 내용을 보면 주로 왕족과 그 처첩들을 합병 이후에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제한적이나마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일본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이주,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한일 합병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며 조선왕조는 사실상 1905년에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조선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조선은 주로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에 대항할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한 일본은 만주와 조선반도의 이권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여러 차례 정치적인 협상을 벌여 비군사적인 분야에서 실질적인 이해증진을 도모하였는데, 그에 따라 이 시기 일제는 한국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받은 전쟁 배상금을 활용하여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광산 삼림 어업 시장개설 온천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의 금 수출을 비롯해 주요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에 대해 영국과 일본은 영일 동맹을 체결,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이 같은 긴장 속에서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이 때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선을 굳이 나눠 가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러시아의 분할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는데, 이는 불과 7년 전 일본이 먼저 제의한 분할을 러시아가 차갑게 거절했던 것과 비교할 때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1896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일본 전권대사로 참석한 야마가타는 러시아 측에 조선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완공을 앞두고 있던 러시아는 장차 조선을 통째로 점령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분할제의를 거절했다. 불과 7년 만에 러시아 측에서 수모를 감수하면서 38도선으로부터 한발 물러선 39도선을 먼저 제의한 것을 보면, 당시 일본제국의 국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졌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분할 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일본과 러시아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한 정세가 조성되었다. 1904년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결국 국교를 단절하였고 이틀 뒤 요동반도의 군사요충지인 여순에서 첫 번째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다음날 새벽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였고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한반도에 군대를 들여놓은 일본은 한국의 협력을 강요하였고 이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는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명의로 6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2.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한다.
3.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한다.
4.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5.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군사보호국이 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의 이 의정서가 체결되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여기에 서명한 이지용과 참서관 구완희의 집이 폭탄세례를 받는 등 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후 러일전쟁이 점차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왕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왕실이 오랫동안 숙달되어 있던 '이긴 편이 우리 편'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러시아가 전쟁에 이겼을 경우에는 이들이 어떤 자세로 나왔을 것인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엄정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서명한 것이므로 한일의정서는 무효다'라고 선언한 뒤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모든 이권을 취소하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했을 것이다. 국가의 명운은 안중에도 없었던 조선 왕실은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곡예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해왔던 것이니 이미 통치세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1905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부칙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 회담).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이 조약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점령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 이외에는 일본에게 아무런 전승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조선반도에서 보상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대두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했던 한일의정서를 폐기하고 실질적인 지배권을 획득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905년 11월 9일 최대한 모양 좋게 조선반도를 접수하라는 사명을 띠고 파견된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우고 보호조약 체결에 착수하였다. 먼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외교권 박탈 등 을사보호조약의 내용이 담긴 신협약안을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전달하였다. 그 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여 설득한 결과 고종의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어 11월 16일에는 정동의 손탁 호텔에서 8명의 대신을 모아놓고 협약안의 가결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인 11월 17일 고종과 8명의 대신이 참석해 5시간 동안 계속된 어전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을 데리고 회의장에 들어가 무력시위를 펼치며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대신 가운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후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 뿐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렇게 어전회의에서 5대 3으로 가결된 신협약안은 고종의 결재를 거쳐 다음날인 11월 18일 대내외에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접수한다는 것과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치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의 한일의정서와 1905년의 신협약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사외교권을 비롯한 모든 통치권을 접수함으로써 조선은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은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반일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주영공사 이한응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정치적인 이유로 자결한 것인지 다른 이유로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을사5적이라고 불리게 된 5대신에게는 개별적으로 암살시도가 자행되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고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해산에 따른 내전이 있었다. 1909년 이등박문이 안중근에게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일진회에서는 한일합방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고 일본 내의 여론도 합병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당시 일진회가 합방성명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죽어 시체만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으며 계속해서 일본의 보호국으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합병을 통해 일본의 일부로 통합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의한 대한제국의 흡수합병에 순조롭게 추진되었고 1910년 8월에 이르러 역사적인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4-1] 독도는 일본땅 p389

일본과 관련해서 한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해를 동해라고 주장하고 다케시마(埈島, 한국명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이다. 일본해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국제 사회에서 정착된 표기이며 지리적으로 보아도 정당한 이름인데, 한국 정부는 이것을 동해라고 우기며 세계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도에서 일본해를 동해로 바꾸려는 무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로 인해 '한국은 뭐든지 생떼를 쓰면서 관철시키려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국제사회에 정착된다면 (이미 그렇게 된 듯하지만) 한국인들은 어딜 가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황해는 서해라고 우기고, 동중국해는 남해라고 우길 것인가?

지도를 펴놓고 보면, 일본해는 송편 모양의 고립된 내해로서 오른쪽의 대부분을 일본 열도가 감싸 안고 있는 형태이다. 왼쪽은 남한과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가 접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해에 접하고 있는 부분은 전체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며, 한반도 전체를 보아도 채 5분의 1이 안 되는데, 이 바다를 동해로 불러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예전 조선시대 말기 간도(지금의 만주동쪽과 러시아 연해주)가 조선의 영토였던 시절에는 그나마 동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고 하겠지만, 한반도의 남쪽 일부로 영토가 줄어든 지금에 와서 동해를 주장하는 일은 무리가 있다. 설령 남북한이 공동으로 동해를 주장한다 해도 간도를 잃은 지금에 와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건 누가 보나 일본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한 바다인 것이다. 한국의 주장은 마치 일본이 태평양을 동해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이 이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소속된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데, 현재는 한국의 실효적인 점령상태에 놓여 있으며 독도 주변의 바다는 한일공동관리 수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미군정 상태에서 주권조차 없던 시절 독도를 무단 점거하여 아직까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이웃나라가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에서 도둑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소유권 주장은 이 섬이 한반도와 일본의 본토에서는 중간 지점이지만, 오키 제도보다는 울릉도에서 약간 더 가깝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05년 1월28일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1905년 2월22일에는 시마네현 고시40호를 발표, 이 섬을 '다케시마'로 부르고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한 바 있다. 이 당시 대한제국의 행정력은 울릉도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공식적인 항의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다케시마는 국제법상 당연히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은 것이다. 다케시마에 대해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가 소유권을 선언한 것은 1952년 1월 18일에 발표된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14호,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사실상 원인 무효다.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이 14호 고시에 의해 일본해의 공해 상에 마음대로 선을 그은 뒤 평화선이라고 부르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들을 모두 잡아다 부산항에 억류하는 등 일본에 주권이 없는 상태를 악용해 강도짓을 했다. 이승만의 생각은 일본 어부들을 잡아다 이를 인질로 삼아 일한국교협상에서 보다 많은 돈을 받아내려는 것이었으니 당시 이런 짓을 하는 한국이라는 국가는 해적떼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이승만 라인' 사건은 이후 우리 정부도 주장을 철회한 부당한 조치였으므로 그와 함께 선언된 독도주권 선언도 자동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일본은 1952년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주권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 평화조약 2조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 3개의 섬은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한국의 영토에는 이 3개 섬과 부속도서 등 3000여 개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즉 제주도가 한국 영토이므로 거기에 딸린 마라도 또한 한국의 영토로서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으며, 해저 지형을 보아도 전혀 다른 대륙붕에 소속된 섬이어서 어느모로 보나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할 수 는 없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1905년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으므로 이는 한일합병과는 관련 없는 무인도에 대한 무주물 선점이며, 소유권 선언 이전에도 오랜동안 일본 어선들이 강치(물개)잡이의 거점으로 이용하던 해상기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일본 땅이라는 것인데, 이는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에서 한국 쪽에 유리한 점은 울릉도에서 다케시마까지의 거리가 오키섬보다 약간 가깝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독도 분쟁에 대한 외국의 시각은 어떠한가. 압도적으로 일본의 입장이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중립적인 미국의 경우에도 지난 1999년 태평양사령부가 발간한 지도를 보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으며 독도를 일본 영토로 분명하게 표기해놓고 있다. 또한 홍콩의 경제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가 지난 1996년 독도문제와 관련해 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 섬을 한국 영토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고 협상을 통해 일본의 경제수역에 포함된 지역의 어업권을 획득한다거나 하는 실익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본해의 일본쪽 수역은 팔라우제도에서 시작된 쿠로시오 난류가 북상하다가 북태평양에서 내려오는 한류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각종 고기떼가 몰리는 황금어장이다. 과거 영해가 12해리였을 때에도 한국 어선들은 일본 쪽에 바짝 붙어서 고기를 잡다가 이 영해를 침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 200해리(360킬로미터)가 독점 경제수역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 한국 어선들은 일본 근해의 황금어장을 모두 상실하게 된 상태이다.

200해리가 독점 수역으로 인정받게 됨으로써 일본은 세계에서 5번째로 넓은 해양영토를 보유한 자원강국이 되었다. 태평양에 점점이 널려 있는 일본령 무인도들로 인해 북태평양의 상당부분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200해리 경제수역이라는 것은, 큰 바다에서 바위섬 하나만 갖고 있으면 무려 35만 평방킬로미터, 일본열도 전체 넓이에 해당하는 바다에 대해 독점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 각국은 바다에 잠겨있는 암초 주변에 엄청난 돌을 쏟아 부어서 섬으로 만든 뒤 소유권을 주장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태평양에 무인도 하나 갖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비해 20배가 넘는 해양영토를 가진 일본이 이런 조그만 섬 하나 양보해주면 어떤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차원이라면 일단 일본에 돌려준 다음에 부탁을 해야 할 문제이지 다짜고짜 점령해놓고 억지를 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 땅이 아닌 다케시마는 하루빨리 일본에 돌려주어야 한다.


[4-2] 가즈오의 죽음 p395

난 토종한국인이다. 그렇지만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한심하게 생각되어 칵 죽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왜 일본의 만행은 파헤칠 줄 알면서 자신들의 더러운 이기심과 저열한 냄비 근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것인가? 일제시대 조선에 와서 살던 일본인들 중엔 분명 훌륭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가즈오 일가족 살해사건처럼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일본이 그랬으니까 우리도 그랬다는 식으로 변명하며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려 하는데 애쓰고 있다. 이 분의 시신은 부산에 고이 이장되어 해마다 일본 사람들의 순례가 끊이질 않는다. 다음은 가즈오 부부가 죽던 날 그에게 평소 깊은 은혜를 받았던 김성수군이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증언이다. 그 사건 당시 김성수군도 가해자였으나 살인행위엔 동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즈오씨는 일제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경상도 지역의 일본인 지주였다. 지주라고는 하지만, 가즈오 가족은 일본 정부의 조선 이주 정책에 따라 당초에는 별로 원하지 않았던 조선 생활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다. 공무원이었던 가즈오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조선으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일본은 일종의 군사독재 체제로서,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즉시 매국노로 몰리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주 가운데는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법으로 규정된 것보다 많은 소작료를 거두는 못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소 인정이 많았던 가즈오는 소작료를 전체 수확의 1/10만 받았고 그곳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처럼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정을 함께 나누었다. 자신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법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소작료만 거둔 것이었다. 가난한 소작인이 식량이 없다고 하소연하면 기쁘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마을에서 누가 상이라도 당하면 온 식구가 함께 달려가서 음식 장만은 물론 손수 통곡까지 하면서 슬픔을 같이 나누곤 했다. 이렇듯 가즈오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진 참 인간이었다.

또한 가즈오는 주변에 갈 곳 없는 고아들이 생길 때마다 이들을 데려다 보살피곤 했는데, 한두 명씩 숫자가 늘어 1945년에는 어느덧 사설 고아원 수준으로 숫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즈오 부부는 이 고아들을 가족처럼 사랑해주었고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가즈오 가족은 평소 이처럼 조선인을 사랑했고 일본 군국주의의 침탈에 분개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던 1945년 8월 15일 자신들이 길러낸 조선인 고아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그 날, 바야흐로 만세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물결처럼 바람에 휘날리며 조선인의 세상이 왔다. 신은 자신이 받아야 할 조선인의 사랑을 가로챘다고 가즈오 군을 질투했던 것일까? 그가 친자식처럼 길러 동경제국대학까지 유학시킨 A의 주도하에 그의 집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장성한 청년들이 낫과 곡괭이, 삽을 들고 가즈오에게 몰려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성수군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가즈오: (부드러운 눈으로) 왜 그러냐 얘들아...
A: 쪽바리! 일본으로 꺼져라 꺼져버리란 말야.
가즈오: (짐짓 화난 목소리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너희 모두가 내 자식이요, 나는 이 집의 가장이며 너희들의 부모다. 너희 조국이 광복한 것은 나도 평소 애타게 바라온 일이다. 춤이라도 추어야 할 이 기쁜 날에 왜 패륜아 마냥 흉기를 들고 나에게 몰려온 것이냐? 나는 분명 너희들을 그렇게 교육시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정말 슬프구나 조선의 자식들아. 내가 사랑을 기울여 키워왔건만 결국 일본인과 조선인은 융화될 수 없단 말인가? 너희들이 원한다면 돌아가 주마.

A: 의미심장한 눈짓을 B에게 보낸다. (재산 다 처분해 돌아가면 우린 모 먹고 살라고? -_-)
B: 죽어 쪽바리 씨발 놈아.

뒤이어 곡괭이가 가즈오의 뒤통수를 내리침과 동시에 수많은 삽과 낫이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기 시작했다. 이 때 가즈오의 아내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C는 가즈오의 아내를 보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정원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무려 13명이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라고 깍듯이 모셨던 그녀를 강간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수 군은 이 대목에서 자신이 말렸다면 자기도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간을 못 견딘 그녀는 행위 도중 사망했고, D는 평소 어머니라고 부르던 그녀의 온 몸을 난자질하고 것도 모자라 내장을 끄집어내 흩뿌렸다.

가즈오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평소 모범적이고 착했던 히미코 상은 방과 후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일어난 참상을 보고 넋이 나가 버렸다. 히미코가 며칠을 통곡하는 소리에 인근 주민들은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그 후 고아가 된 히미코는 밥을 구걸하러 마을 주변을 돌았지만 어느 조선인 하나 눈길 한번 안 주며 모른 척 했다. 결국 그녀는 9일 후 마을 다리 밑에서 앙상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히미코는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어린 아이였다. 가즈오의 재산은 용맹하고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조선 청년들의 손에 송두리째 넘어갔고,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침묵 속에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이 글은 나에게 어느 독자가 보내준 편지에 적혀있던 사례인데, 글의 서두에는 한국 사람이 반성하며 작성했다고 되어 있긴 하지만 가즈오군, 가즈오상 등 일본식 호칭들이 섞여 있고 마지막 부분 조선인에 대한 경멸에 찬 문장들(삭제함)이 포함된 것 등을 감안하면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본인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사건에 대해서는 들어봤다는 한국인들도 많은 것을 보면 실제로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인 듯하고, 또한 한국의 식민지 피해주장에 대한 일본인의 대항논리를 엿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이기 때문에 결코 그 무게가 가벼울 수 없는 글이라 하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본의 패전 후 조선반도에서는 이 같은 살해극이 많이 발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 이후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이 신속하게 진주해 군정을 시작했지만 남한에 미군이 상륙한 것은 9월 중순이었다. 따라서 약 1개월 정도 남한 지역에는 무정부상태가 지속된 기간이 있었다. 한반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인과 그 부역자들에게 원한을 지닌 조선인들이 많았을 것이고, 이들은 일본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일본 여자들을 강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8월 15일날 일본의 항복을 기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일본의 일부로서 패전국의 암담한 미래를 함께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일본 통치 기간 중 마지막 기간, 특히 대동아 전쟁이 시작된 마지막 4년은 일본인은 물론 일본의 통치를 받는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큰 고통이 안겨진 시기였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에게 8월 15일은 지긋지긋한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한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조선인에 의한 자행된 이 같은 학살과 잔혹 행위들은 전혀 알려지거나 조사된 적이 없고 우리가 받은 피해만 거듭거듭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제통치 기간동안 받았다는 그 피해라는 것도 사실보다 훨씬 더 부풀려져 있을 것임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받아 미개한 농업사회에서 단시일 내에 자본주의 공업국으로 발전해 높은 생활수준을 누려왔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자신들이 전승국이라도 된 양 일본을 저주하며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학살한 행위는 분명 인륜에 반하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들을 모두 추방한 뒤 남한과 북한의 정부는 강탈한 일본인의 땅과 공장들을 '적산'(敵産',적의재산)이라고 부르며 당당히 나눠가졌다.

만약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거나 최소한 영토를 보전하면서 휴전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과연 조선인들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도 예전보다 더욱 자발적으로 일본인임을 주장하면서 충성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 패하고 붙어 있어봤자 별 볼일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돌변해서 일본을 원수로 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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