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5] 꼬뮌 p332

농민전쟁을 시작했을 때 전봉준의 당초 계획은 전라도 지방에서 세력을 규합 봉기한 뒤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농민군의 숫자와 세력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관군으로는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황급히 청군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 지도부는 초기 작은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전주성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방어진을 구축, 농성에 들어가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농민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군의 입장에서는 항상 대의명분을 세워 인민의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 신속한 기동전을 펼치는 것이 유리한 법이다. 즉, 전쟁 이론상 게릴라부대는 정규군을 점과 선으로 고립시키면서 자신은 인민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 적을 공격하는 전략을 취해야 하는 법인데, 동학군 지도부는 전주성에 고립되어 농성을 시작함으로써 이 같은 게릴라부대의 장점을 완전히 희석시키고 스스로 점에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4월 28일과 5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포위망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군 지도부 사이에서는 과거 평안도에서 봉기했던 홍경래가 정주성을 점령하고도 고립되어 관군에게 몰살당한 전례를 답습하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간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점차 계절이 따뜻해지고 농번기가 가까워옴에 따라 전봉준 군대에 참여한 농민들은 빨리 고향에 돌아가 벼를 심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점차 농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초조하기는 독재자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신속하게 청군이 상륙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따라 일본군의 대병력이 속속 한반도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당황한 정부는 일단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구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청일 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국내 사태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양측의 입장에 따라 1894년 5월7일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부는 농민군이 내건 폐정개혁 12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생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당시 휴전 협정의 골격이다. 폐정개혁 12개조는 탐관오리 처벌, 노비와 천민에 대한 차별 철폐, 과부 개가 허용, 잡세 폐지, 토지무상분배 등 주로 정치적인 것들이었는데, 고종은 일단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휴전에 합의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천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화약은 실제로는 전라도 지역에 대한 동학의 통치를 허용하는, 사실상 조선의 영토분할 협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폐정개혁 12개조에 대해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는 시늉만 내는 데 그쳤으며 조선의 정치체제에는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휴전으로 인해 농민군의 통치가 시작된 전라도 지역에서만 폐정개혁 12개조에 따른 혁명적인 조치들이 속속 집행될 수 있었다.

휴전과 함께 1894년 5월 전라도내 53개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6월이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은 공식적으로 모든 행정권을 전봉준에게 이양함으로써 역사적인 '전라도 꼬뮌'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전라감영을 접수하고 감사의 집무실을 사용하기 시작해 사실상 전라도 지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으며 53개의 모든 군현에서도 집강소가 군현의 행정기관을 접수하였다. 혁명 세력에 의해 조선 역사상 최초의 꼬뮌(주민자치)이 시작된 것이다.

꼬뮌이란 12세기 북프랑스 지역에서 발달한 주민자치 도시를 일컫는 말이나, 1871년의 빠리 꼬뮌이나 1927년의 광동 꼬뮌 등 혁명기에 단기간 존속하면서 주민자치를 실험한 사건들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이다. 원래 북프랑스 지방의 꼬뮌은 소규모 지역공동체가 왕이나 영주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주민 스스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주적인 자치정부를 운영하는 형태였다. 초기의 꼬뮌은 시장과 지도부를 주민 스스로 선출하여 자치행정을 시행하였으며, 이 집행부는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왕권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871년 빠리 코뮌에서 다시 등장하였다.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빠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혁명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3개월간 지속된 사건에 붙여진 이름이다.

빠리 꼬뮌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로서, 시민들은 9개의 집행위원회에 각각 10명씩의 위원을 선출하여 정부의 역할을 맡겼다. 위원회의 대부분은 자영업자, 소규모 자본가 등 쁘띠 부르주아지로 분류될 수 있는 계층이었으나, 노동자 20명을 비롯해 블랑키스트, 프루동파, 자코뱅 당원 등 갖가지 종류의 사회주의자들도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

빠리 꼬뮌은 20만 빠리 시민의 열렬한지지 속에 출범하여 짧은 기간 동안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한 뒤 인민군을 창설하였고, 종교 및 재산의 국유화, 주인 없는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빠리 꼬뮌은 3개월 동안 존속하였으나 1871년 5월21일 프랑스 정부군과 프로이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시민들은 처절하게 저항하였고 시가전이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꼬뮌은 끝내 붕괴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3만의 시민군이 죽었으며 이후 반동 세력에 의해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

1894년에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이 같은 빠리 코뮌의 전통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오랜 산업혁명을 통해 이미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해 있던 프랑스 사회와 비교할 때 갑오농민전쟁 당시 조선 사회의 발전정도는 매우 뒤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 등을 살펴볼 때 동학에 의한 전라도 꼬뮌은 빠리 꼬뮌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파리 꼬뮌이 한 도시만을 대상으로 했던 데 비해 전라도 꼬뮌은 전라도라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자치 권력이었다. 또한 빠리 꼬뮌이 3개월 동안 지속된 것에 비해 전라도 꼬뮌은 5월부터 연말까지 8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군사력에 있어서도 5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동학농민군에 비해 파리 꼬뮌은 10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다 무너졌던 것이다. 동학과 농민 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던 전라도 꼬뮌은 나중에 일본-조선 연합군과 무리한 전면전을 시작함으로써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 한해 집강소 체제에 따른 자치정부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당시 조선정부군이나 청군, 일본군 중 어느 쪽도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 과격파들에 의해 시작된 2차 봉기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도 지역에서 갑자기 공권력의 공백이 생겨나고 농민군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주 감영에 위치한 농민군 지도부는 광대한 전라도 지역의 집강소와 농민군, 동학조직들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도부의 지시가 현장에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지역 유지와 부자들을 습격해 재산을 강탈하는 등 무정부 상태가 연출되었으며, 나주 등 일부 군현에서는 고을 수령이 자체 보유한 관군과 민병대를 조직해 농민군의 진입을 막는 일도 있었다. 또한 담양 등에서는 집강소 책임자가 스스로 식견이 부족함을 인정해 부사에게 통치권을 일임하기도 했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에서 주로 천민과 노비의 해방을 강조했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균등하게 무상 분배하는 정책을 지향했기 때문에 전라도 전역을 장악한 동학군은 천민과 노비, 빈농 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동학에 의해 이루어진 전라도 꼬뮌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파리 꼬뮌에서와는 달리 동학농민군이 체계적으로 정치경제학과 사회사상을 공부한 지식인 지도부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농민군은 동학이라는 종교에 대한 탄압과 조선 하층계급에 대한 수탈에 반발해 세상을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일어섰을 뿐, 더 큰 비전과 계획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국제정세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만약 동학농민군에게 개항 이전부터 체계적인 사회변혁을 준비해 온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개화당 혁명가들이 합류할 수 있었다면 보다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조선 땅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개화당의 혁명가들과 동학의 혁명가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들은 성장한 지역과 배경, 사회계급 등이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노선의 차이도 컸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말 조선사회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볼 때, 조선은 봉건 사회의 경험을 전혀 갖지 못한 탓에 시장경제와 화폐경제의 발달이 미숙했고 그 결과 사회 변화를 주도할 부르주아 계급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사회는 개항을 맞아 커다란 충격 속에 외부로부터 강제된 사회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급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애국심만으로 무장하고 신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지식인 그룹이 김옥균 등의 개화당이었으며, 지배층의 학정에 대한 반발로 무장봉기한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약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개화당에게 있어 당시 조선사회의 이상적이고 유일한 발전 모델은 이웃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처럼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고 있었으며 산업 구조도 조선과 비슷한 나라였으므로 이 같은 일본이 신속하게 시민혁명을 마무리 짓고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할 수 있다면 조선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개화당의 선각자들은 개항 이후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일본 사회의 모든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처음부터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과거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조선 백성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보다 앞선 일본의 경제시스템에 조선이 편입되어 가는 변화가 시작되자 조선 민중들은 큰 충격을 받는 한편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던 것이다.

개항 이후 조선의 쌀값은 일본에 비해 월등히 낮았기 때문에 일본인 무역상에게 조선과의 쌀 무역은 엄청난 이익이 남는 장사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초기 산업혁명기에 돌입해 급속히 성장한 생산력으로 인구가 급증,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조선으로부터 쌀과 대두(조선콩)를 마구 수입해 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쌀값이 오르고 지주들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나 다른 작물을 팔아 쌀을 사야했던 소작농들은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갈등은 1880년대 황해도와 함경도 경상도등에서 방곡령이 실시되고 일본 상인들이 이로 인한 손해를 조선 정부에서 배상하도록 요구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나날이 확대되었다. 사실 소작농의 식량부족과 쌀값 폭등은 일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주와 양반계층은 이를 일본 탓이라고 속여 농민들의 반감을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시스템을 조선에 이식하고자 했던 개화당과, 농민의 생활고와 반일감정을 기반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처음부터 서로 융화될 수 없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주화약으로 인해 시작된 전라도 꼬뮌은 농민군의 무장봉기가 얻어낸 최초의 의미 있는 성과였으며, 조선 사회는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3-6] 리엔지니어링조선 p339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농성에 들어가자 4월 30일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즉시 5월2일 북양 함대 소속 군함 2척을 인천항에 파견하는 한편, 5월7일에는 정규군 2천명을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청나라는 천진 조약에 따라 5월 2일 일본에 대해 '조선 정부의 청원에 따라 비적 토벌을 위해 육군 일부를 조선에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상을 통해 '지리상 무역상 중요성에 비추어 조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는 매우 긴요하므로 이와 같은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즉시 대응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5월12일 일본육군 제9여단 병력 9천여 명이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초기 투입부대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열강에 의해 사실상 분할점령된 청나라는 일본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개항 이후 외국과 벌인 모든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더 이상 서양열강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즉 청나라는 1884년 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처럼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도 일본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이미 군사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의 선발대는 아산만에 상륙해 농민군의 수도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반면, 일본군 9여단은 인천항에 상륙해 곧장 서울로 입성하였다. 이로 인해 5월초 이미 일본군은 숫자에서나 주둔 지역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반도에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한 것으로, 그 의의가 작지 않은 일이다.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첫 번째 조치는 1884년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즉 1894년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9여단은 혁명군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은 청에 대해 공동으로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으나 청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공사 오오토리가 이끄는 일본군 3천여 명은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과 민비를 감금하고 신속하게 서울의 4대문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궁궐호위병과 관군의 저항을 받아 대포와 총을 난사하면서 치열한 시가전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곧 고종의 항복 명령이 내려졌고 관군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민씨 정권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지방으로 도망갔고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장해제한 뒤 궁궐과 정부요인들의 집을 포위, 가택에 연금하였다.

이로써 조선에는 10년 전에 실패했던 혁명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이미 민씨 정권에 의해 모두 죽거나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고, 혁명세력의 중심이었던 김옥균마저도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김옥균이 두 달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이 때 귀국하여 조선의 혁명내각을 이끌었을 것이므로 그의 죽음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일의 하나이다. 갑신정변 이후 해외로 망명한 박영효 서재필 등도 민씨 정권에 의해 3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은 뒤였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박영효 만이 일본군에 의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해 서서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개항 이후 20년 만에 본격적인 조선의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1894년 6월 25일, 개혁을 집행할 임시 최고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창설하였다. 이 기관은 일체의 국정을 관할하고 심의 결정하는 초정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혁명평의회와 같은 기구였다. 일본은 군국기무처의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기존 민씨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인사는 철저히 배제하고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인사들을 포진시켰다.

김홍집은 과거 갑신정변 시절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김옥균 등 개화당과는 달리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던 온건개혁파였다. 김홍집은 갑신정변 당시에는 미처 유교적인 국가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나 이후 10년이 흐르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신사상을 습득하면서 보다 개혁적인 인물로 변해 있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에서는 개화당의 씨가 마른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김홍집을 내세워 혁명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경복궁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내건 대의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 개혁이었다. 조선은 개국 이래 단 한번도 자주독립국으로서 국제 사회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으며,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천자에게 충성하는 명, 청의 일개 제후국일 뿐이었다. 조선은 해마다 중국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왕과 왕후, 세자를 책봉할 때마다 중국에 책봉사절단을 보내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천자의 책봉첩을 받아오기도 했다.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도착하면 조선의 국왕 휘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영은문(寧殷門, 은혜를 맞이하는 문)까지 나와 엎드려 사신을 맞았다. 이처럼 명청조 시대 조선은 중국의 일개 성에 불과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은 사실상 천자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을 통상교역의 대상이자 군사적인 완충지대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고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였다. 당시 나라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뒤늦게 일본의 힘을 얻어 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김홍집은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이 되었고, 박정양은 부총재관, 위원으로는 김종한, 안경수, 유길준 등 16명이 임명되었다. 일단 조직 구성이 완료되고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자 혁명 정부는 신속하게 조선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권력체계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분할하였다. 이는 왕실과 정부가 정식으로 분리되어 궁내부에서는 왕실 관련 문제를 전담하고 모든 정치 행정 재정 등의 업무는 의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근대적인 내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뜻에서 모든 공문서에 청의 연호를 사용하던 관례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개국기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즉 조선이 창건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기존 6조가 폐지되고 8아문이 설치되었다. 8아문은 내무, 외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무 등의 부서로 재편되어 각각 담당분야의 국가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영의정은 총리대신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각 부서의 수장을 부르는 호칭도 판서에서 대신으로 바뀌었다. 또한 좌우포도청을 통합하여 독립 경찰기구인 경무청을 신설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전제 왕조 사회의 틀을 벗고 서구식 내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회분야에서는 낡은 신분계급제도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양반 중인 평민 노비 등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졌고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었으며,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일가친척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제도 폐지되었다. 특히 신분제의 혁파는 조선 사회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양반에게만 허용되던 관직등용의 기회가 노비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써 조선은 미개한 계급 사회의 틀을 벗고 만인평등의 시민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노비문서에 의해 사람을 사고팔던 노예제가 불법화되었으며 적자와 서자에 대한 재산상 신분상의 모든 차별이 금지되었다. 또한 양반들이 병역과 조세를 면제받는 특권도 사라지게 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모든 재정관련 업무가 탁지부로 일원화되었고 시급하던 화폐제도 개선이 이루어져 모든 조세는 금으로 받고 화폐는 은본위제를 시행함으로써 화폐가치를 통일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은본위제에 기반한 새로운 화폐를 제정 통용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현물과 돈을 병용해서 납부하던 세금도 새로운 화폐로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방 관료들의 세금 횡령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왕실재정과 정부재정을 분리하여 민비가 나랏돈을 물 쓰듯 하여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었던 것과 같은 일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무려 200건이 넘는 개혁안을 일사천리로 의결 공포하였는데, 이는 다소 급작스러운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개항 이후 조선의 근대화 작업이 20년간이나 미뤄졌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갑오개혁은 대체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제기되었던 시대적 과제를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단지 토지제도에 있어 농민들이 요구하던 무상분배는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갑오개혁이 조선에 근대자본주의를 싹틔우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향후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지주 자본에 따른 기업농의 출현과 이에 따른 원시 자본의 축적 과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당시 김홍집 내각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주 제도를 혁파하고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하는 조치는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채 자치정부를 운영하고 있던 전라도의 농민들은 갑오개혁 정부에 의해 농민전쟁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자 처음에는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점차 토지소유권에 욕심을 부리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헛소문으로 반일감정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부르주아 혁명에 반기를 들고 혁명 세력에 맞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체제의 변혁을 위해 일어섰던 농민군이 이제는 공짜로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강도떼로 돌변하여 모든 개혁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오개혁은 일본이 1868년에 실시했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그대로 이식한 근대화 혁명이었으며, 변형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변형되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 시민혁명을 이끌만한 어떠한 계급 계층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당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원했던 유일한 외세인 일본의 개입과 일부 선각 지식인들의 협조로 시행되었다는 의미이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제 개혁은 그 본질상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독일의 강제 개혁과 같은 것으로서, 이웃나라에 시민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한 정당한 무력행사였다.

이후 1894년 말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내각에 참여함으로서 김홍집-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성립하게 되었고, 1895년 고종은 홍범 14조를 선포하고 머리를 자르는 등 솔선수범하여 조선의 문명개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써 그동안 군국기무처에서 담당하던 개혁 작업이 내각으로 이전되어 조선은 안팎으로 근대국가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와 내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거제도를 갖춘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모해 신속하게 국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웃나라인 조선에 혁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것은 값진 희생이었으며, 갑오년에 일본군에 맞서 저항했던 동학 세력도 10년 후 결국 진보회와 일진회를 통해 일본의 개혁에 협력하는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었다.

[3-7] 청일전쟁 p347

일본은 조선보다 22년 앞서 미국에 의해 강제개항을 경험하였다. 그 뒤 일본에 들어온 서양세력과 일본 내부의 지방 세력들은 이합집산하면서 오랜 내전을 겪었으며 그 결과 1868년에 이르러 300년 동안 유지되었던 강호(江戶, 에도) 막부정권이 붕괴하고 덴노(천황)를 중심으로 한 영국식 입헌군주제도 아래 단일 국가로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유럽의 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를 일본사회에 도입하는 시민 혁명에 성공하였으며 이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근대화는 더욱 가속되어 1881년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설립되었고 1885년에는 내각제가 도입되었으며 1889년에는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리로 1890년에는 일본 최초의 직접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일본의 이 같은 변화는 당시 열강의 침략과 전제 군주제 아래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놀랍도록 신속한 것이었는데, 이는 일본이 서유럽 이외에 유일하게 봉건제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봉건 사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작은 왕들의 연합체로 국가를 이루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서유럽과 일본의 봉건영주들은 군주로부터 받은 봉토를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인 세금제도와 법률, 그리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왕과 같은 존재였다.

봉건 사회의 경험이 왜 자본주의 발전과 그토록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큰 국가체제 아래 작은 번국들이 교류 경쟁하는 과정에서 시장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생산력 발달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 정도이다. 일본의 경우 오랜 막부 봉건시대를 겪으면서 활발한 생산력의 증대와 화폐 및 시장 경제의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중세의 유럽과 같이 두터운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근대화 혁명을 마무리 짓고 1880년대부터 본격적인 산업혁명기에 돌입한 일본의 국력은 신기술의 도입과 활발한 무역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그 결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경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청일전쟁은 개항 이래 40년 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놀라운 변신을 경험한 일본이 그 성장한 국력을 세계무대에 선보이는 첫 번째 기회였던 것이다.

1894년 5월 초 청일 양국이 거의 동시에 조선반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부터 사실상 청국과 일본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양측 사이에 뚜렷한 교전이 발생하지는 않고 긴장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6월 23일 서해 아산만 해상에서 최초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를 풍도해전이라 한다. 이 날 쓰보이 소장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아산만의 풍도 근처에서 정찰을 하던 중 청국 군함 2척을 발견하고 맹포격을 시작했다. 1시간 20분간 지속된 이 전투에서 청나라 해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주하였다. 이 두 척의 군함은 아산만에 청국의 추가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한 함대의 호위함이었는데 이들이 격파됨으로 인해 청군 1200명을 싣고 뒤따라오던 수송선이 격침되어 막대한 군수물자와 병력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풍도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아산만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청군의 보급로와 추가 병력이 차단되어 5월 초 선발대로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은 고립되었다. 아산만 일대에 고립된 청나라의 육군 2500명은 서울에서 남하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상, 방어에 유리한 성환 지역에서 방어진을 펴고 대기하였다. 6월 26일 남하한 일본군 혼성여단 5000명은 성환에서 청군과 조우,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위치가 불리한 일본군은 여기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병력 수, 화력,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앞선 일본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청군은 1000명의 전사자를 남겨둔 채 다시 아산으로 철수했고 이어 공주와 청주를 거쳐 평양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한반도의 평양이남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육지와 바다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남한 지역에서 청의 군대를 물리친 일본은 즉각 서울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 정부를 전복한 뒤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개화파들을 입각시켜 조선의 근대화 개혁에 착수했다. 당초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에 대해 청일의 공동작업을 제안했지만 청국이 이를 거절하자 단독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게다가 고종과 민씨 정부마저 일본의 시정개혁 요구를 거절하자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야만 했던 일본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관군의 군사력은 일본군의 상대가 못되었으므로 일본 입장에서 이는 쿠데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무력행사에 불과했다.

7월 1일, 청국과 일본은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했으나 별다른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청군은 평양성을 지키면서 남진하지 않았고, 그 동안 시간을 번 일본은 속속 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7월말이 되자 일본군은 두 가지 루트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일본군은 8월초 황해도를 거쳐 8월 중순 평양성에 도착했고, 본토에서 출발한 일본군 제3사단은 7월말 원산에 상륙한 다음 평양성을 향해 서진해 나갔다. 이들은 8월 중순 평양 근교에서 합류한 뒤 8월 16일부터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에 대해 전면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평양성을 수비하고 있던 청군 병력은 15,000여명으로 일본군의 공격부대와 비슷한 숫자였다. 게다가 청군은 이홍장이 이끄는 최정예 부대였다. 하지만 일단 무기와 사격술, 기동력과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청군을 압도하고 있던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전투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오전 8시가 되자 일본군은 모란봉을 점령할 수 있었고 오후 5시가 되자 청군은 모든 저항을 멈추고 투항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청군은 전사 2천명, 부상 5천 명 등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600명에 불과했다. 청국의 최정예 부대를 상대로 한 평양성 전투는 당시 일본군이 보유한 전투력의 질적인 우수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평양성이 함락된 다음날 청나라 해군은 일본 해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황해 요동반도 근처의 해양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는 이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연합함대 12척이 동원되었고, 청나라에서는 정여창 제독이 이끄는 전함 12척과 수뢰정 6척이 참가했다. 전투 초기 청나라 해군은 일본 군함 2척을 포위 공격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 사이 청나라 함대의 뒤쪽으로 돌아간 일본 해군의 주력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전세는 이내 역전되었다.

곧 지휘함이 파괴되면서 청나라 함대가 하나둘씩 흩어져 일본 함대에게 사냥 당하자 청의 해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나둘씩 도주해버렸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 해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결과는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후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요동반도를 점령하고 점차 북경 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자 청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막강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개항 이후 수많은 내전을 겪으면서 실전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막부 시대 일본은 수십 개의 번(藩, 일본어로는 한이라고 읽는다)이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정권을 사이에 놓고 많은 나라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여러 차례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또한 개항에 반대하던 몇몇 번에서는 독자적으로 서양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63년 개항을 거부한 사쓰마는 독자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조슈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식 무기를 갖춘 서양 군대와 맞서다 잇따라 패배하자 일본의 한국(번국)들은 이후 열심히 서양의 무기체계와 전술을 도입해 신속하게 무력을 증강하는 한편, 서양의 정치제도와 문물, 교육 시스템을 배워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처럼 강력해진 각 한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에 병력을 파견,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청국의 정예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미 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조선은 일본의 연합군으로 청나라와 싸웠다.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일본군 주력부대는 만주로 진격, 11월6일 금주성을 점령하고 11월 22일에는 요동반도의 핵심 군사항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순(뤼쑨)항을 공격, 단 하루 만에 점령해 버렸다. 요동반도를 점령한 일본군 주력부대는 다시 산동 반도에 상륙, 위해위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일본해군의 주력부대는 남아있던 청나라 북양 함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 모든 전함을 전멸시켜버렸다.

또한 남쪽의 일본 해군은 펑후 제도에 상륙하여 대만 점령전을 시작했다. 만주 방면의 일본군은 서진을 계속하여 1894년 연말이 되자 요하의 동쪽 지역 모두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본군이 만주와 산동 반도에서 북경을 압박해오자 청나라는 일본정부에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이는 사실상 청국의 항복 선언이었다. 청일 양국은 1895년 3월 30일 휴전상태에 돌입하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강회회담이 시작되었다. 4월 17일 양국은 회담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국의 전권대사 이홍장과 일본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합의하였다.

1.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을 포기한다.
2.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내준다.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4. 중국 영토에서 일본에게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타이완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를 거부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일본은 고전 끝에 1895년 11월에 이르러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은 300년 전 임진왜란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에게 패퇴한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국 청을 격파함으로써 일약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 서양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분루를 삼켜야만 했던 일본으로서는 이 청일전쟁의 승리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만주와 조선반도, 대만을 영향력아래 둠으로써 오랜 숙원이던 대륙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를 물리친 환호와 영광도 잠시뿐, 일본의 앞에는 더 큰 적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2차 봉기

한편, 국내에서는 전라도 지방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자치 행정을 펴고 있던 농민군 사이에 일본에 저항하는 2차 봉기를 감행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2차 봉기를 일으켜 조선 전체를 장악하자는 주장은 7월초부터 김개남 등 동학과격파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김개남은 주로 천민 계층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농민봉기로 인해 전라도 지역이 동학의 세상으로 바뀌자 주로 노략질에 치중하고 있었다. 특히 김개남의 부대에는 노비, 백정, 승려 등 천민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동안 조선 계급사회에서 당한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양반과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고 행패를 일삼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신중한 동학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비적떼와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전라도 지역에서 관민 화해 정책을 통해 부드러운 통치를 펼쳐왔는데, 김개남은 이 같은 노선에 불만을 지닌 세력을 규합하여 농민군 과격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개남은 전봉준의 정치적인 라이벌로 등장했는데, 그는 아마도 농민군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왕이 되려는 야심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제압하고 전선이 만주와 대륙 본토로 옮겨짐에 따라 김개남 등 과격파의 봉기요구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져 갔다.

이에 결국 전봉준 등 온건파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2차 봉기를 기정사실화한 채 준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지역에 대한 농민군의 통치가 5개월 이상 계속되면서 농민군의 세력은 놀랍게 성장해 이미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는 이들이 일본군과 조선 관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한 무력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무모한 시도였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경복궁 쿠데타로 인해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혁명적인 유신의 과업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 이들의 봉기는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는 것이었다.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실시된 갑오개혁은 당초 농민군이 주장했던 폐정개혁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훨씬 더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1차 봉기의 농민군은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촉발하는 혁명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2차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은 반혁명세력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있었다.

이들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단순히 세상을 뒤집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천민 계층의 원초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다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니 이미 혁명군이 아니라 힘이 커진 도적떼에 불과했던 것이다. 1894년 10월 초, 동학은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2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일본 연합군과 대적했으나 두 달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궤멸되고 말았다.

[3-8] 전제군주 고종 p355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시작된 1894년의 혁명은 조선의 낙후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를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진정한 유신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새로운 국제 환경에 최소한이나마 적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지만, 갑오 혁명 정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오년의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혁명군이 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물리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조선에서 일정한 군사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청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넘겨받아 만주와 하북 지역까지 영향권에 둔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갖게 된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러시아는 중국의 북부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 한다. 이들은 3국 공사 명의로 일본 정부에 서한을 보내 요동반도를 포함해 만주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비록 친절한 충고였지만 일본이 거절할 경우 군사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 담긴 정치적 압력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힘겹게 얻은 요동반도의 거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을 감안할 때 독일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요동반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민비와 고종은 즉시 러시아에 붙어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통해 일본과 혁명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그 결과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갑오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선의 혁명세력은 민비를 제거하여 사태의 역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이 과업에 민비의 정적인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을 한 다음, 이들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잘 훈련된 일단의 일본인 무사와 군인들을 동원해 민비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의 정예 무사와 훈련대 병사로 구성된 특공부대는 손쉽게 이들을 제거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새벽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여 거사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사실상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를 위해 대원군과 연합한 혁명세력은 일본군의 힘을 빌어 민비와 그 척족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유신의 과업을 하나둘씩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이완용, 이범진 등과 내통한 고종은 어느 날 새벽 경복궁에서 몰래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의 경호를 받으면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갔다. 이들은 김홍집의 시체를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이로써 조선의 혁명운동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이 죽고, 10년 후 다시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김홍집마저 피살됨으로써 두 차례 모두 좌절되었다. 시대를 앞선 올바른 정신으로 조선 사회를 개조하려 했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죽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혁명세력은 결단을 내려 일본과의 합작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여기에서 잠시 이완용이라는 인물의 정치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관파천은 혁명세력이 인질로 잡고 있던 고종을 빼돌려 김홍집 등 개화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2차 혁명내각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완용은 이 같은 반동세력의 거사에 중심인물로 참여하고 그 공으로 고종이 새로이 구성한 어용반동내각에서 외무대신겸 학부대신겸 농무대신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3겸직 대신으로서 아관파천 시대 조선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이는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지도자가 되어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는 등 활발한 개혁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완용은 한말에서 근대의 시작까지 조선 정계에서 활동한 거물 정치인으로서, 비록 체계적인 사상을 지닌 혁명가로 보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고종과 일본, 국내 개혁파, 정동파 등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자신만의 활동 영역을 구축했으며 복잡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던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을미사변 이후 자신도 대원군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조차 거부하고 있었던 고종에게 있어 영어에 능통한 이완용과 미국인 앨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은 이후 조선 정계에서 정동파로 분류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과는 별다른 연줄이 없던 이완용이 고종을 경복궁으로부터 구출해낸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노선과는 관련이 없는 충성심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자 자연히 러시아 공사관이 조선 정부가 되었고 러시아는 이때부터 조선의 보호국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쳐 강력하게 남진 팽창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이 정책의 최종 목표는 지중해나 인도양, 혹은 태평양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따뜻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부산의 영도를 영구 임대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부산의 영도에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조선과 일본은 물론 태평양 전체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일본으로서는 악몽과 같은 일이었다. 또한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게 되면 미국이나 영국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영도를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실력행사를 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의 영도 조차 문제는 이완용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의 강력한 반대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 정계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은 러시아에 접근해 38도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897년, 러시아는 썰물처럼 조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는 청나라를 협박해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군사기지로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영도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조선 개혁세력의 반발과 영미일 동맹세력의 견제로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좌절되었지만, 요동반도에 여순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 한반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관심이 만주로 쏠리면서 군대와 외교관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고종은 1897년 다시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조선 정계는 이완용 서재필 등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과 고종의 지원을 받는 친러 반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로 재편되었으며, 일본은 러시아가 떠난 틈을 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6년 이완용, 서재필 등에 의해 창립된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독립문을 세워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이어 1897년에는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기 박영효, 안경수, 서재필, 이완용 등 개혁세력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고종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동 세력은 황성신문을 만들고 황국협회를 결성, 개혁파의 모든 활동에 사사건건 방해공작을 자행했다. 황국협회는 홍종우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1894년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공로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이 때의 조선 정계의 모습을 살펴 보면, 먼저 개항 이래 항상 조선 혁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일본은 3국 간섭으로 추락한 외교적인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러시아까지 조선에서 한 발을 빼는 상황이 되자 이미 청나라를 분할 점령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세력은 조선으로 밀려들어와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분주히 외교전으로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뚜렷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이후 조선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민운동을 일으켰으며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립협회는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국가로 변모시키려 하였으나, 고종과 황국협회는 헌법제정과 의회구성을 거부하고 왕의 1인 지배체제를 고집했다. 마침내 1898년 10월, 서울 시내에 박영효가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고종은 이를 빌미로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상재, 남궁억, 박영효 등 독립협회 간부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혁명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이승만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 지지파는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여 고종을 압박했다. 혁명세력의 위세에 놀란 정부는 체포한 독립협회의 간부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종은 중추원(상원) 관제를 개정하고 독립협회가 추천한 인물들을 상원의원으로 임명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하원 구성과 독립협회 인정을 요구하고 있던 혁명세력은 이 타협안을 거부하고 고종 독재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급기야 1898년 11월 21일, 고종은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을 사주하여 깡패단을 조직,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 습격사건으로 만민공동회는 3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서대문 밖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이승만은 선동적인 가두연설로 많은 시민을 규합하였으며, 이 날 하루 종일 한양 곳곳에서 왕당파와 혁명파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는 무정부상태가 연출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에게 돌과 각목으로 맞서는 한편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의 집을 습격하고 어용 깡패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1월 26일 독립협회는 고종과의 담판을 통해 윤치호를 상원 부의장에 임명하도록 하고 이승만 등 회원 17명을 상원(중추원)의원으로 파견하였다. 이후 혁명세력은 중추원을 거점으로 삼아 정부와 지속적인 대결을 시도하였으나,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모든 혁명지도자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조선혁명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혁명가들은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조선은 다시 고종의 독재 아래 신음하게 되었다. 이때 체포된 이승만은 이후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까지 5년 동안 기나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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